46화
사샤는 은근한 허세를 부리듯이 그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서 이야기했다. 제가 나오고 나서의 분위기가 어떻게 됐을지는 모른다. 해볼 테면 어디 해 봐라 하는 느낌으로 먼저 자리를 뜬 것이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카일러는 그녀의 강력한 주장에 미심쩍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계약이라……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역시 그게 알려지는 것이 좋지는 않을 것 같군.”
카일러의 말에 사샤는 살짝 움찔했다. 엘리나가 말할 때는 딱히 신경도 안 쓰이고 코웃음 칠 수 있었던 단어가 그의 입에서 나오자 세상 심각한 이야기가 되었다.
누가 보면 기복 심한 사람인 줄 알겠네.
카일러는 책상 맞은편에 앉아 일하던 것도 놓고는 그녀의 손을 꼭 맞잡았다.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손등을 문질러 오는 움직임에 손끝이 슬쩍 간질거리는 느낌이 났다.
“음……. 이쪽.”
지금 잡고 있던 건 오른손이었는데 그가 한참 마주 잡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그 손을 놓고는 왼손을 책상 위로 올려 내밀었다.
사샤가 왼손을 내밀어 그의 손 위에 올리자 이번에는 왼손을 마주 잡고는 오른손으로 펜을 집어 들고는 방금까지 책상 위에 올려진 채 외면당하고 있던 서류에 사인을 했다.
“……일하시는 동안, 저 이렇게 있으라고요?”
“오래 할 거 아니다. 잠시만.”
그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손을 부드럽게 감싸 주었다.
떨어지기 싫어한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게 맞는 걸까. 일에 왼팔을 책상 위에 가로질러 놓은 채로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 알 수 없이 귀여운 느낌이 들어서 사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신혼 첫날밤부터 잠자리를 함께한 이후 그녀와 항상 닿아 있었다.
처음에는 집에 며칠마다 들어오기도 했고, 오래 있는 게 아니라 밤에 들어왔다 아침 일찍 나갔으니 접촉이라고는 그…… 밤을 보내는 것이 다였다. 대화도 없고, 그저 그랬……었으니까.
하녀들 사이에서도 그가 사샤와 결혼한 이유가 밤 때문이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점점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그가 사샤와 함께 있을 땐 꼭 가까이에 붙어 있었던 것 같았다. 끌어안거나 손을 잡거나, 모두 안 되면 그저 가까이 서 있기라도 했다.
똑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샤는 그에게 쉬라고 얘기해 줄 로제인가, 하는 기대감에 문 쪽을 돌아보았고, 카일러는 노크 소리는 아랑곳없이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사샤는 제가 대신 대답을 해 줘도 될까 하는 생각으로 문과 카일러를 돌아보고 있는데 대답이 계속 없자 알아서 문손잡이가 돌아갔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역시나 로제였다. 하지만 그녀가 온 것은 카일러를 쉬게 할 목적이 아니었다. 그녀는 손에 든 봉투 하나를 카일러의 책상 위에 내려놓아 주었다.
물론 사샤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보고는 흠칫했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봉투를 내려놓고 그의 곁에 우아한 자태로 섰다.
“공작님, 안 계신 사이에 황궁에서 온 점심 만찬 초대장입니다.”
“음. 언제.”
“내일입니다.”
로제가 하는 말에 카일러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는데, 오히려 앞에 앉아 있던 사샤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는 턱을 살짝 당기는 것으로 그 말을 받아들이는 듯 보였지만…….
“내일?”
사샤의 날카로운 물음에 로제는 그녀에게로 네, 하고 대답을 전해 주었다.
“이거…… 왜 나한테는 보여 주지 않았어?”
“초대하는 분이 공작님뿐이었습니다.”
아, 그렇다면 내겐 보여 주지 않는 것이 맞다. 가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저런 초대장을 보내 놨다는 건가?
“저거 그럼 카일……러가 여기 없을 때 온 거란 이야기인가?”
“그렇습니다.”
로제는 아무런 표정 없이 그녀의 질문에 모두 대답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예측은 못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럼 카일러, 가지 마요. 지금 안 괜찮아 보이는 건 알죠?”
얼마나 강철 체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연달아 짧은 기간 안에 두 번이나 마물을 깨부수러 다녀온 사람이었다. 안 그래도 황궁에 귀족들이 모이는 자리라면 사람들 복작복작한 곳일 테고, 사람들이 카일러를 편하게 가만히 놔두지도 않을 텐데…….
저렇게 황제가 부른다고 별다른 고민도 없이 간다고 하는 걸 보니 그동안 어떻게 해 왔을지 눈에 선했다.
황좌에 앉아 눈웃음을 짓는 황제의 모습이 떠오르자 살짝 울컥하는 뭔가가 있었다.
카일러는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이 바라보는 모습을 보다 익, 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 만찬, 별거 아닐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가지 말라고요. 아니, 제국을 위해서 멀리 나가 열일하고 돌아온 사람을 왜 쓸데없이 오라고 해요? 일하는 날이 있음 쉬는 날도 있어야죠.”
아, 예전 삶의 말이 나와 버렸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 그 단어를 못 알아들은 것 같기는 했지만 그걸 정정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입술을 비죽 내민 사샤가 거의 화를 내듯 불만을 꺼내 놓자 그제야 그 의미를 이해한 로제는 살짝 눈을 키웠다.
“나는 괜찮다.”
“……그렇게 말해 버림 화낸 내가 이상해지잖아요.”
너무 쉽게 괜찮다 말해 버리는 카일러 때문에 김이 팍 새 버렸지만.
“아닙니다. 사샤 님 말씀이 맞습니다. 공작님께선 먼 곳에 가서 힘든 일을 하고 오셨는데, 좀 쉬셔도 좋지 않겠습니까?”
로제는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하고 제국을 위해 싸우고 다니는 것이 간혹 안쓰럽다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는 언제나 완벽한 남자였고, 조금만 쉬어도 금방 체력이 살아나는 강철 인간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무리 강철 체력이라고 해도 정도를 넘어서면 지치는 것이 맞는데 말이다.
“너는 갑자기 왜 그러느냐는 표정 짓지 마세요. 사샤 님을 통해서 깨달은 것인데, 내일은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로제는 자신을 보는 카일러의 눈빛을 읽은 듯이 침착하게 눈빛에 대답을 했다. 그러자 그의 미간에 살짝 금이 갔다.
“나는 굳이 초대하지 않은 건, 크게 의미 있는 만찬은 아니라는 뜻인 것 같은데, 맞나요?”
그는 봉투를 열어 보지 않아도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하고 사샤가 다시 입을 열려는데, 이번에는 카일러가 한 박자 더 빨랐다.
“황제 폐하께서 일부러 주기적으로 여는 만찬이다. 귀족들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자리지.”
“……그래서, 갈 거라고요?”
귀족들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에 이그노트가 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가겠다고 하는데 여기서 더 말리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입술이 비죽하게 나온 사샤를 보며 로제도 옆에서 입꼬리만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조금은 거칠고 어설프지만 카일러를 생각해 주는 안주인이 제법 기특해 보인 것이다.
“그럼 저도 데려가요.”
그런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이 안주인이 한발 앞서나가 버린다. 로제의 시선도 카일러의 눈도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가 굳이 가야 할 분위기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냥 얼굴만 비치고 돌아올 수 있도록, 피곤하게 하는 사람 없도록 해 줄수 있다면 좋겠다고, 단순히 그런 생각이었다.
“바로 내일인데.”
카일러는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며 낮게 읊조리듯이 말했다.
황궁에 간다 하면 대부분 드레스부터 맞추고 준비하느라고 며칠씩 걸리는 것 같던데, 그녀는 아까 로제가 내일 만찬이라고 말했던 것을 듣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그새 잊어버린 것인가.
의문을 담은 카일러의 목소리에 사샤는 어깨를 으쓱였다.
“왜요? 내일 만찬이면 저는 못 가요? 아…… 초대받은 사람이 아니어서 못 가나요?”
그가 대답도 없이 물끄러미 그녀를 보고 있자 핑, 어떤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아차 하는 얼굴이 된 사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히려 내가 가서 카……일러가 고생하는 거면 안 가고요.”
기왕이면 같이 가고 싶지만 그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그노트 공작의 곁에 나란히 세우기 위해 절 데려온 게 아닐지도 모르니까.
“그대가 온다고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다. 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
그는 가만 보면 제게 안 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역시, 무섭기는커녕 아주 좋은 남자다. 안 그래도 인기 많은 남자인데.
어쩜…… 벌써부터 그걸 질투한 걸까. 다른 영애들이 그를 바라보게 될 것이…… 그러다가 그가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까지 알게 될까 봐?
“그럼 준비해 두겠습니다.”
로제는 그들이 내린 결론을 접수하고는 인사하고 그대로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사샤는 여전히 잡혀 있던 왼손을 꾹 잡았다.
“…….”
카일러가 서류로 향하려던 시선을 바로 돌려 그녀를 넘어다보았다.
“서류 급한 거예요?”
사샤는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금방 끝낸다던 일이었는데 뭔가 끝을 낼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한번 막아 봐야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녀의 의도를 알았는지 카일러는 펜을 내려놓고 왼손을 마주 힘주어 잡았다. 너무 편해서 그만…… 하는 알 수 없는 말을 나직하게 중얼거리면서.
“내가 그렇게 피곤해 보이는가.”
“아니요. 괜찮아 보여서 더 쉬게 해 주고 싶어요.”
카일러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그건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는 의미였다.
아무렴 어때, 자신의 신호를 알아채 주고 펜을 놓았다는 게 중요했다.
“밥 먹고 씻고…… 잠도 자고 해요. 기왕 가는 거 내일 얼굴에서 아주 광채 나게 해 줘야지.”
그리고…… 황제한테 허락도 받아야 하겠다. 중요한 자리 아니면 이 사람 좀 쉴 수 있게 말이다.
당찬 생각을 하며 사샤는 카일러의 손을 이끌고 집무실을 나섰다. 맞잡은 손은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