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엘리나가 자신만만하게 말한 것이 계약이었기 때문에…… 사샤는 그 부분만이 살짝 거슬렸다. 아, 하나 더. 그녀의 곁에 황후가 있다는 것.
황궁에 다녀온 지 사흘이 지났다. 하루하루 보내는 것이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막 편하지도 않았다. 아직까지도 그녀는 공작저에서 그저 한량 같은 사람이었고, 그녀를 위협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리고…… 카일러가 없었다.
그날의 모임에서 많이 마음을 다잡고 갔었는데 오히려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간 것이 아무래도 찜찜했다. 엘리나가 어떤 아이인지는 모르겠지만, 황후가 얼마나 독한 사람인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카일러를 놓지 못했다는 부분에서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로제, 공작저의 안살림에 대해서도 알려 줘. 나도 일하고 싶어.”
“아, 사샤 님.”
그래서 카일러가 떠나고 사흘째 만에 의욕을 가지고 목소리를 냈다. 작은 책상 앞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던 로제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미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하지만 사샤는 대번에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사실 좀 엇갈리려 했던 부분이 생기는 것을 경계하고 있던 로제는 대뜸 나가려는 말을 입 안에 가두고는 다시 사샤를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은 못 하지. 그게 하루 만에 될 일이었으면 진작에 내게 넘겨주지 않았겠어?”
로제가 생각했던 바를 그대로 읊는 그녀를 보면서 로제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어쩌면 세상 쿨하고, 그래서 멋있는 듯도 보였다가…… 간혹 나태해 보일 정도로 자유롭기도 했다. 자신의 기준이 있는 듯 보여서 그런 부분은 걱정이 잘 안 됐지만…… 살림을 맡겨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로제, 나 이거 다 읽었어. 영지에 지금 얼마나 있는 것인지 모른다는 얘기인 거 같은데, 광장 정비라면 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그녀가 내민 것은 번화가의 광장을 새롭게 정비해야 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왜 광장을 정비해야 하고 얼마가 들고 하는 내용보다는 그래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예산이 되느냐 하고 걱정하는 것뿐이었다.
마을의 광장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모이는 아주 중요한 장소였다. 뿐만 아니라 외부인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이기도 했다.
필요하다면, 해 줘야 하는 일이기에 최종 가결을 위해 카일러에게 보여 줄 서류 쪽으로 분류했다.
“잘하고 계십니다만…… 계속하실 생각인가요?
그녀의 새로운 집중할 거리에 로제가 슬쩍 제동을 걸었다. 아무리 즐겨도 일이고 처음 시작하는 일에 의욕이 넘치는 것은 좋지만 정도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내가 방해가 되는 게 아니라면 하고 싶어 내가 이 공간을 사용하는 게 방해가 되는 건 아니지?”
“지금…… 여기 공간이 얼마나 많은데 방해라니요. 내용도 정확하게 찾아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잘하시네요.”
로제의 칭찬에 사샤의 어깨가 한층 올라갔다. 좀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는 제게 이름을 주고 먹을 것을 주고 강인한 눈으로 바라봐 주기도 하고 커다란 손으로 따뜻한 온기를 전하는 사람이었다.
“좋았어. 그럼 다음은…….”
“사샤 님! 공작님께서 오십니다!”
이제 막 다음 것을 펼쳐 들려고 하는데 난데없이 파반의 목소리가 울렸다. 까딱하다간 종이에 손을 벨 뻔할 만큼 놀랐던 그녀는 옷장을 뒤졌다. 카일러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옷까지 쳐다보고 있을 땐가 싶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옷을 고르다 난데없이 수줍어진 사샤는 그냥 그 상태로 밖으로 나갔다.
정문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기사들과 마지막 인원을 체크하고 장비를 체크하고 있는 카일러가 보였다.
“아, 사샤. 돌아왔다.”
사샤는 그동안의 기억을 담아 갑자기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겉으로는 매우 멀쩡해 보여도 그 일정이 결코 평탄지 않았으리라.
사샤는 조심스럽게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러가 그녀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올 것을 기다리고 있던 그는 사냥물이 도망가지 못하게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잘 다녀오셨어요? 다친 데는 없어요?”
이것저것 막 물어볼 것투성이였는데 그냥 이렇게 딱 두 개만 물어보았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일러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잘 다녀왔다. 다친 데는 한 군데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가 단호하게 대답해 주는 것도 좋았다. 이제까지 조금 꿀꿀했던 기분이 그 미소로 화악 날아가 버렸다.
그녀와 나란히 선 그는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손을 맞잡은 것도 아니고 팔짱을 낀 것도 아닌데 그의 발걸음을 따라 사샤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발을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괜찮았는가.”
“그럼요. 아무 일도 없었는걸요.”
“……나도 정말 별일 없었다.”
들어가는 내내 카일러는 그렇게 몇 번이고 확인하고 다시 자신의 답도 해 주었다. 아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면서 다독이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잠시 방에 들러 옷을 편하게 갈아입은 카일러와 함께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파반이 대행하고 있던 것과 로제가 맡고 있었던 것들을 보고받는 듯했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았다. 돌아오자마자 일을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거들겠다고 앉은 것이었다. 물론 이렇게 가다가 잠이 들 수도 있고 알아서 쉬기도 하겠지만…….
그런 걱정을 하다가 문득 눈을 들자 그가 보였다.
탄탄하고도 넓은 어깨가 단단한 근육을 덮고 있었고, 책상 앞에 앉은 이는 기사가 아니라 마치 학자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아주 단정해 보였다.
“저…… 정말 안 쉬어도 괜찮아요? 당분간은 제가 해도 괜찮은데.”
그를 위한 걱정이었다. 피곤한 기색이 없다고 피곤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럴 리가. 그렇게 힘들고 괴롭다고 제게 고백을 해 준 지가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았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가운데 다시 한번 출정을 나가야 했던 것이라 그의 마음이 너무 걱정이 되었다.
카일러는 서류를 들여다보던 눈을 들어 자신을 보는 사샤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괜찮다.”
이상했다.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원래 마물 소탕을 하고 돌아오면 지난번처럼 마음이 좋지 않고 무거워서 한동안 좀 침울한 상태가 유지되고는 했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도 빈번하진 않지만 있었던 일이었다. 전쟁은 가장 끔찍하고 무서운 일인데, 그는 이미 전쟁의 경험도 있었다고 했다.
전쟁은 승자와 패자로 갈리긴 하지만, 승자라고 해서 평탄하게 끝나는 이야기들이 아니었다.
사람을 죽이고 죽이고…… 제 손으로 앗아 가는 목숨이 쌓일수록 돌이킬 수 없는 강은 건너고 있는 느낌이었다. 마치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사람이 아니라 마물이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생명이 있어 움직이는 동물이고, 벨 때 또한 그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아닌 가축이다, 하고 생각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누가 가축을 그렇게 대량으로 놓고 피가 터져 흥건해진 때까지 난도질을 한단 말인가.
“그래요? 그럼 다행이고요.”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사샤를 보는 순간 어쩐지 괜찮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항상 돌아오던 공작저인데 무엇인가가 달랐다.
떠날 때도 그런 얼굴로 자신을 배웅해 주더니만 돌아올 때에도 부리나케 달려 나오는 모습에 웃음이 잔잔하게 번져 갔다.
예쁘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예쁘다는 말이 절로 들렸다. 황후나 뭐 이베른 영애를 보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감정이었다. 사실 다른 여자들도 모두 그랬다. 하지만 왠지 저 여자만큼은 빛을 머금고 예쁘게 빛나고 있다고 느꼈다.
“사샤가 있어서 다행인 것 같아. 음. 내가 지금 괜찮은 것은 분명 그대의 덕분이 맞는 것 같다.”
“……공작님.”
그리고 그 기분을 아주 솔직하게 표현해 보았다.
눈앞에 그녀를 두고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꺼내 보여 준다는 것은 꽤나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평소 하지도 않던 단어별로 끊어 말하는 게 나와 버렸다.
그 어설픈 고백 같은 말에도 볼에 홍조를 띠며 눈동자를 또륵 굴리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제 얼굴에도 같은 미소가 지어지는 것 같았다.
“사샤야말로 기다리는 동안 별일 없었는가. 여기야 뭐 크게 일이 벌어지는 곳은 아니긴 하다만.”
그리고 카일러는 그렇게 다시 한번 안부를 물었다.
그간 고용인들에게 물었던 것과는 그냥 그 의미 자체가 다른 것이었다. 그저 공작저의 안위를 물었던 것과 달리 그녀의 일상이, 하루하루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까까지는 괜찮다 대답하던 그녀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기색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은 마음에 대번에 눈썹에 구겨져 버렸다. 그 변화를 느꼈는지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카일러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음…… 큰일 있었던 건 아니고요. 황후 폐하가 궁으로 초대하셔서 다녀왔어요.”
입 다물고 없었던 일로 하려다가 사샤는 마음을 바꿔 먹었다.
“황후 폐하…….”
그는 그렇게 곱씹는 것만으로도 이미 분노를 충분하게 표출하고 있었다.
이유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의 분노는 황후에게로 향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사샤는 그래서 말을 덧붙일까 하고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곳에는…… 엘리나 영애도 있었고, 얼마 전에 제가 저택으로 초대했던 라다, 로즈힐, 아이시, 피콜라 영애가 모두 있었어요. 그리고…… 엘리나 영애가 제게 계약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계약이라고.”
그의 목소리가 살벌해졌지만 그렇다고 일단 말을 꺼낸 거, 거짓을 말해 줄 수는 없었다. 그의 손을 더욱 꼭 잡으며 사샤는 괜찮다는 의미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제가 누구예요. 이그노트의 공작 인이라고요. 제대로 이야기해 주고 왔어요. 내가 누구인지. 계약은 무슨 계약. 우리 사이에 그런 건 없었다고도요. 그녀들도 그날 카일러가 내게 해 준 걸 보았으니 다 알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