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사샤를 태운 마차는 요란하지 않게 이그노트 공작저로 돌아왔다. 그저 곁을 지킬 뿐인 파반은 그녀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저 평온하기만 한 것 같은 그녀의 눈가에 약간의 근심이 어려 있었다.
“들어가셨던 일은 문제 없으셨습니까.”
돌아오는 길에는 마차에 함께 올라탔다. 저택에 도착하기 전 가까이에서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완벽하게 연기하지 않는 이상 보고 만지면 대부분 드러나게 되어 있으니까.
파반이 말을 걸자 자신의 생각에 멍해져 있던 사샤의 눈동자가 초점을 찾았다. 슬쩍 고개를 드니 센 머리카락 때문에 잿빛을 띠는 머리카락을 가진 이가 마차 안에서조차 깍듯하게 앉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 문제없었어. 음…… 응. 별다른 문제는 없었어.”
하지만 문제없다 말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파반은 슬쩍 미간을 모았다. 아무리 봐도 지금 그녀의 분위기는 아무렇지 않은 게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파반이 조용히 그녀의 얼굴을 눈동자에 담고 있었다.
“제게는 별다르게 이야기를 해 주지 않으시렵니까.”
파반이 문득 목소리에 힘을 풀고 말했다. 깍듯하며 멋진 집사로 알려져 있지만 공작에게도 뒤지지 않는 큰 덩치에서 오는 듬직함과 그의 생각까지 살필 줄 아는 섬세함으로 그의 지지가 되어 주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사샤와는 크게 접점이 없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낯설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막 멀게 느껴지거나 어려운 사람이라는 인상은 아니었다. 그저…… 말붙일 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예? 뭐…… 굳이, 가 아니라…….”
여기는 나이 든 집사와 하녀장의 손으로 이끌어져 나가는 곳이 바로 이그노트 공작저였다. 이름을 카일러가 유지해 준다면 안을 관리하는 것은 하녀장, 그리고 공작저의 바깥을 보는 것은 바로 파반이었다.
이제는 나이가 좀 들었지만 소싯적에는 무예에도 조예가 깊어서 파반 정도면 카일러와 대련 정도는 심심찮게 가능할 정도였다. 그는 체재를 이끌어 나가는 것과 더불어 실제 생활을 이끌어 가는 것에도 조예가 깊었다.
사샤는 그런 파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이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고 직접 경험해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을 보고 있는 그의 눈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저택의 일정을 확인하고 가는 카일러의 습관은 파반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했다. 꼼꼼하기도 꼼꼼하거니와 그런 부분에선 마치 정치하는 사람처럼 매우 치밀해 보였다.
“누가 나를 싫어하는지를 확인하고 왔어. 생각보다 거칠어서 조금 당황한 거 같아.”
사샤가 드디어 입을 열자 그는 더욱 경청하는 자세로 앉아 눈을 떠 보았다.
“옆에 사람들은 그 말에 흔들리고. 근데 뭐 맨날 알던 사람들도 아니고…… 그런 말이 있고 거칠게 나오면, 휩쓸리기도 하기도 하지.”
거기까지 말했을 때 파반은 살짝 굳어 있었다. 쉽게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대출 어떤 분위기였을지는 파악이 되었다.
“그럴 바엔 한 가지를 버리는 게 편하기는 할 텐데……. 그래서 고민은 했지만 당한 것은 없어.”
사샤는 마지막엔 당차게 말했다. 사실 정말로 당한 것이 없었다. 엘리나가 무슨 생각으로 증거네 계약이네 말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얼토당토않은 추측이 아니라는 것은 좀 주요한 일이었다.
“메인이 생선이라서 그냥 가볍게 먹고 나온 느낌이야. 걸리는 것도 없었고, 엘리나가…… 후작 영애가 덤벼들기는 했지만, 뭐……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아.”
그들의 정확한 사정을 모르기는 파반 측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는 좀 더 깊게 물어보고 싶은 것을 참으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답답하게 묻어 두실 필요는 없습니다. 부인께서 필요한 것이 있다 하면 물심양면으로 도우라는 카일러 공작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럴 땐 그냥 이야기를 해 주시는 것도 좋습니다.”
파반은 마치 꿰뚫을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집안은 무슨 고용인들이 다 돗자리를 깔 것처럼 이리도 다 안다고 한단 말이오.
사샤는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제 기색을 살피고 말을 걸고 하면서 대꾸하는 저를 보고 진짜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진실을 감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여기 집사와 하녀장은 도대체가 사람을 얼마나 잘 아는 거야? 독심술이라도 하나 봐.”
사샤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기막히게 홀로 여행을 떠난 와중에 아주 지혜가 가득한 사람을 만난 것 같은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이 앞길을 창창하게 밝혀 줄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어두운 구석에서 한 줄기 빛을 내어 주리라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줄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렇게 보셨다면 다행입니다. 저희에게는 지켜봐 온 눈이 있습니다. 안에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사샤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넣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안에서 황후 폐하만 뵙는 게 아니었어. 엘리나에다가…… 내가 얼마 전에 공작저로 초대한 영애들 네 명이 거기 고스란히 앉아 있는 거 있지? 어이없게, 정말.”
삐죽삐죽한 목소리로 사샤가 중얼중얼 아까 있었던 이야기가 떠올라 말을 꺼냈다.
이렇게 하는 거구나. 새삼스럽게 위의 문제를 들어 가지고 당황할 줄 알았던 파반은 침착하게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사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고, 그때부터는 그녀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왠지 지금은 도와주고 싶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나더러 계약 결혼을 한 거라고, 그 와중에 내가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공작님이 날 좋아해서는 더더욱 아니라고 어찌나 바락바락 하던지.”
“다분히 고의적이군요. 그 백작가 영애들이 함께 초대받은 것처럼.”
“수상하기 짝이 없었어.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사샤의 얼굴이 못마땅함으로 물들어 갔다.
제게 흠 하나 남기자고 엄청난 기세로 이야기를 꺼내는 엘리나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자기 분에 못 이긴 듯 말을 쏟아 내는 엘리나에게서 치밀함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 그것만이 끝은 아닐 거야. 황후를 곁에 둔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어설펐으니까. 아마 황후는 또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을 거야. 그렇지?”
주절주절 읊조리던 주제가 갑자기 파반에게로 넘어왔다.
그녀가 말해 준 것을 토대로 생각을 하자면, 판은 황후가 벌려 놓았고, 곁에서 엘리나가 바람을 잡고 의심을 흘리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엘리나는…… 과연 이들이 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하는 것이 맞을까 싶은 때가 있었어. 그것에 대해서는 부족하다고 뒤늦게 깨달았어. 탄탄한 근거를 가지고 우기는 것은 아니었거든.”
정확히 무슨 이야기인지는 대충 알아들었다. 너무도 당당한 태도가 살짝 마음에 걸렸다. 무슨 일이라도 생겨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오싹한 예감이 들기도 했다.
“황후 폐하는…… 확실히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 가녀린 외모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독을 품고 있는 분이라 했습니다.”
파반의 충고가 가슴 깊이 들어왔다. 이 판을 벌려 놓고도 한 발짝 뒤에 서서 자신의 편일 것이 분명한 엘리나의 말에도 어느 정도 방관하던 그녀였다.
황후는 무조건적으로 엘리나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그런 구분 자체가 가능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음……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다. 절대적인 자기 편은 없다고 믿으시는 분일 듯했어. 음…… 진짜 무서운 분이야.”
거기에 엘리나의 화력이 더해지면 어떤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여자들이 이래서 무서운 거다.
삼삼오오 모이면 꼭 거기에 우두머리가 생기게 마련이다. 무리에 속한 여자들은 거기에 복종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텐데…… 겉으로 보기에 오늘의 우두머리는 엘리나 영애 같았다.
그리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는 황후를 보면서 백작 영애들은 그 ‘무리에 속한 여자들’이 될 확률이 높았다.
“아, 마차가 도착했나 봅니다.”
그사이에 마차는 이그노트 공작저로 들어서고 있었다. 고개를 슬쩍 기대어 보니 저 멀리서 가까워 보이는 건물의 위용에 다시 한번 감탄하고 말았다.
마차는 서서히 공작저에 도착했고 마차가 온전히 멈추가 먼저 내린 파반이 그녀에게로 손을 내밀어 주었다.
“고마워.”
사샤는 내리기 전 그의 손을 짚은 채 사뿐하게 내렸다. 듬직한 파반은 확실히 카일러가 없는 공작저를 이끌어 갈 만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집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릴 때처럼 손을 잡은 채로 정문까지 걸러 들어왔다. 그리고.
“아, 돌아오셨습니까, 사샤 님.”
정문 앞에서는 로제가 그들을 맞아 주었다. 마치 언제 올지 몰라 계속해서 이 앞에서 기다려 주었던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사샤는 왠지 그 모습이 너무나 인상 깊었다.
외출했다 돌아오는 집,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오기를 기다려 주는 사람들. 방금 자신이 육체의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이 간극을 잘 조정해서 끝까지……. 끝까지. 계약은 어디가 끝인 것일까. 우리에게도 끝이…… 오는 걸까.
사샤는 씁쓸한 입술을 혀로 한번 핥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점심 제대로 못 드셨죠? 요즘 영애들 사이에서도 모임에서 디저트 없이 식사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하고 왔을지까지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사샤는 그녀를 향해서는 찌푸렸던 미간도 풀고 강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