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여기서 두 사람의 말다툼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떽떽거리면서 따지던 엘리나가 조용해지자 할 말이 없어진 사샤 또한 조용히 여러 가지 쿠키를 맛보면서 음식에 집중했다.
그 뒤로는 약간의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영애들은 아무래도 후작 영애와 황후에게 함부로 말을 걸 수 없었고, 그들과 공작부인의 은근한 신경전에 눈치를 보면서 차만 홀짝였다.
“저는 공작저에 지금 주인이 안 계셔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영애들도 살펴 가시고, 다음에 또 봬요.”
침묵을 깬 것은 사샤였다. 그녀는 안 그래도 카일러가 없는 공작저를 걱정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주인 없는 저택을 지키는 것에 익숙해진 고용인들이었겠지만, 자신이 돌아간다고 해서 딱히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샤가 그렇게 미소를 짓자 황후는 그린 듯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끝까지 풀어지지 않은 분위기에 백작 영애들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엘리나, 조심히 돌아가렴.”
그녀는 엘리나에게도 인사를 남겼다. 미묘한 공기의 흐름을 남긴 채 사샤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달칵, 문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도 그 여운이 들릴 듯이 침묵이 흘렀다.
“그땐…… 사이좋아 보였는데. 그치?”
피콜라 영애가 옆에 앉은 아이시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아까 엘리나가 꺼낸 말에 대해 반추하는 듯한 그녀의 말에 아이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다와 로즈힐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요한 응접실에서 그 목소리가 엘리나에게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엘리나 영애……?”
황후는 그녀의 반응이 무슨 의도를 가진 것인지 알지는 못했지만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주었다. 저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영애들이 이쪽에 슬쩍 눈길을 던지는 것이 보였다.
“괜찮아요, 황후 폐하. 감사합니다. 그렇게 괴롭히더니 지금은 아픈 게 나았는지 얼굴빛도 나아지고…… 많이 좋아 보이네요.”
엘리나의 말에 황후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토닥여 주었다. 그녀가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깨닫지는 못했다 해도 미묘한 이야기의 흐름을 눈치챈 영애들의 시선이 조금 더 이쪽으로 향했다.
“아, 저희 집에 있을 때만 해도 아파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답니다. 패악은 또 어찌나 부리는지…….”
아까 이그노트 공작부인에게 표독스럽게 따져 대던 엘리나 영애는 가련한 얼굴을 하고 가슴을 부여잡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 갑자기 격변한 말투와 분위기에 영애들이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팠다고 하면 그 사샤 공작부인의 이야기일 텐데, 그 성격 좋아 보이는 그분이 아파서 패악을 부렸다고……?
“그랬군. 이베른 후작, 그 인자한 분이 어째서 그랬나…… 했더니.”
황후가 살짝 그에 맞춰 한마디를 얹자 영애들의 눈동자가 슬쩍슬쩍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그노트의 공작부인이 될 이가 이베른 후작의 숨겨졌던 첫째 딸이라는 이야기가 돌았을 때 안 그래도 다들 그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베른 후작이라 하면 사람이 인자하기로 유명했다. 진중한 얼굴은 자칫 차가워 보일 수 있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것.
거기에 이베른 후작 영애 또한 아름답고 선하기로 유명했다. 방금 사샤 공작부인을 대할 때의 모습은 깜짝 놀랐지만…….
그 모든 것이 사샤 부인이 아파서 패악을 부렸다는 이야기에 힘을 실어 주는 것만 같았다.
황후는 옆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여린 눈썹을 늘어뜨린 그녀를 지켜보면서 다른 이들은 모르게 눈썹을 들썩였다.
아까 사샤에게 따질 때만 해도 너무 들이대는 모습에 조금은 실망했었다. 태연하고 쿨한 사샤라는 여자에게 계속 밀리기만 했었기 때문에 제가 그녀를 상대할 사람으로 선택을 잘못했나 하고 살짝 후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나가고 난 뒤 자신의 말에 아주 약간의 의문을 가진 이의 말 한마디로 바로 이 이야기를 생각해 낸 것이었다.
게다가 평소 쌓아 놓았던 이베른 후작과 후작 영애의 평판도 한몫할 것이었다. 미디에나는 약간 난감한 얼굴을 한 채 그녀들을 스윽 돌아보았다.
“이제 영애들도 돌아가면 될 것 같군. 엘리나 영애는…… 내가 잘 달래서 보내도록 하지.”
서로 눈치를 보면 네 명의 영애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를 하고 나가는 와중에도 따스한 눈으로 엘리나 영애를 바라봐 주는 황후의 뒷모습을 돌아보며 나갔다.
넓은 복도를 터덜터덜 걸어 나가는 와중에도 네 명은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발소리만 울리는 가운데 피콜라가 멍하니 중얼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아팠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아프면 사람이 괴팍해지게 마련이긴 하죠.”
그리고 그 말에 옆에서 걷던 아이시 영애가 화들짝 놀라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피콜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아이시는 순안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엘리나 영애의 말을 인정한다는 것은 사샤 공작부인이 엘리나 영애를 괴롭혔고, 카일러 공작을 꼬드겨서 동생이 가야 했을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됐다는 것들까지…… 모두 의심하게 하는 말인 것이다.
앞서 걸어가던 이들도 쫑긋 귀를 세우는 것이 보였다. 아이시는 그들의 눈치를 보며 그녀의 어깨를 툭 밀었다.
“생각해 봐. 카일러 공작님께서 뭐가 아쉬워서 그분을 택했겠어요. 엘리나 영애가 저렇게나 아름다우신데 말이에요.”
하지만 주변의 분위기가 어떤지도 모른 채 피콜라는 거의 확신을 담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계속 걸어 난가고 있던 라다가 휙 뒤를 돌더니 그녀를 향해 따지듯이 말했다.
“그때 공작저에서 사샤 부인 못 봤어? 그분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는 다 같이 느꼈었잖아.”
라다와 로즈힐 모두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을 본 피콜라는 자신의 말이 대번에 공격을 받자 갑자기 불끈 하는 마음이 들어 그들을 힘 준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리가 그분에 대해서 뭘 그렇게 잘 안다고? 이베른 후작 영애야 워낙 사교계에서 유명한 분 아니니? 얼마나 아름답고 선한 분인지 소문이 자자한 분이란 말이야. 둘 중 하나를 믿어야 한다면 차라리 이쪽이 맞지 않아?”
“그, 그거는 그렇지만…….”
이쪽의 말도, 저쪽의 말도 맞는 것 같다는 생각에 아이시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나는 내가 본 것만 믿어. 황후 폐하를 대할 때도 그분이 얼마나 당당했는지를 봤다면 그런 의심은 하지 못했을 거야.”
로즈힐도 옆에서 라다를 거들어 주었다. 하지만 영 자신의 생각을 돌릴 수가 없는 듯 피콜라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 뿐이었다.
“본인도 말했잖아. 자기가 부족한 것이 많았는데 무엇 때문에 계약을 하시겠냐고. 다시 말하면…… 저렇게 완벽한 이베른 영애를 두고 왜 아프고 도움 줄 것도 없는 그분을 왜 선택했느냐는 말이야.”
“그럼 그렇게 도움 될 것도 없는 영애가 조른다고 그걸 받아들이실 분이라는 건가?”
세 명의 영애는 황후궁 복도 한복판에 서서 그렇게 서로 따지고 있었다. 아이시만 가운데서 여기도 저기도 끼지 못한 채로 중개를 하겠다고 서 있었다.
“그런데 뭐야, 너네. 지금 그분 두둔한다고 나한테 이렇게 화를 내는 거야?”
그러다 문득 피콜라가 억울한 듯이 말했다. 두 명이 서서 자신 대신 이제야 알게 된 사람의 편을 들려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화를 내는 게 아니야. 진실은 제대로 가려야지. 이 이야기가 잘못 퍼져 나갔다간 사샤 공작부인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니?”
“아니, 너희는 도대체 그분을 얼마나 안다고 이렇게 역성을 들어주는 건지 잘 모르겠어. 꼭 사주라도 받은 것 같잖아.”
“피콜라…….”
아이시가 그런 그녀를 말려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말을 엎어져 흘러 버렸고 그 말에 젖은 로즈힐과 라다는 미간을 찌푸렸다.
“너야말로 그런 이베른 후작 영애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데? 그분이 진짜 소문처럼 좋은 분이라는 증거가 있어? 너에게?”
편을 가르자고 시작한 말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도 모르겠지만 서로에게 잔뜩 빈정이 상해 버리고 말았다.
“아까 사샤 공작부인에게 대하던 태도가…… 사실 그분의 진짜가 아닐까 생각했어.”
“라다, 너도? 나도 그런 느낌 받았어. 선하다고 유명한 아가씨가…… 자기 괴롭히던 사람을 만났다고 그렇게 치졸하게 소리를 질렀을까?”
로즈힐까지 거들고 나서자 피콜라는 점점 자신의 말이 힘을 잃고 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그 옆에 황후가 있었잖아. 난 그게 제일 못 미더워.”
로즈힐은 거기다가 위험한 한마디도 더 덧붙였다. 그 말을 꺼내기 전에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한 말이었지만 역시나 그런 부분에서 나머지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하긴, 이건…… 따지고 보면 카일러 공작님이 가운데에 끼어 있는 일이잖아. 이베른 영애와 사샤 공작부인의 사이는 어느 쪽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황후 폐하와 비교하자면 사샤 공작부인이 더 맞는 거 아냐?”
피콜라 영애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말다툼에 갑자기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넓은 복도에는 다시금 침묵이 찾아오고, 네 명은 다시금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총총총 걸음을 옮기는 그녀들의 발이 하나같이 빨리 이곳을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듯했다.
문 앞으로는 각각의 마차가 주인이 나오길 기다리며 서 있었다. 말의 투레질 소리와 말발굽을 바닥에 구르는 소리가 울리는 그곳에서 영애들은 서로에게 작게 인사말을 남긴 뒤에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다그닥다그닥 어쩌면 평화로운 말발굽 소리들이 울리면서 마차는 하나둘 황후전 앞을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