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42화 (42/128)

42화

“그때 그래서 설명을 제대로 드렸던 거라 생각했는데…… 황후 폐하께선 그래서 이 옷을 황궁에 입고 오지 말라는 뜻으로 말씀하셨던 건가요?”

이미 이렇게 아름다운 스토리텔링까지 입어 버린 드레스를 더 비난할 수는 없었다. 큼, 하고 헛기침을 한 그녀는 살짝 눈을 감았다 느리게 떴다.

지금 그녀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표시를 알아챈 것도 자신밖에 없었다.

“황궁에서 영애들을 다시 만나다니 신기하군.”

그사이 사샤는 백작 영애들을 챙겼다. 바로 얼마 전에 즐겁게 확인했다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도 즐겁게 나눈 참이었다.

“다시 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공작부인! 그날은 정말 모두가 즐겁고 소중한 시간을 보냈어요!”

라다의 말에 나머지 영애들도 격한 끄덕임으로 호응해 주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그노트가는 파티를 열지 않은 지 오래다. 그 이유를 모르시냐.”

다시 한번 지나간 주제를 꺼내는 황후를 돌아보았다. 지그시 바라보는 사샤의 두 눈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녀의 반응을 바라는 미디에나는 점점 조금씩 저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쓰디쓴 울컥거림을 느끼며 노려보았다.

“저는 그 이유에 대해 듣지 못했습니다. 하녀장에게도, 집사에게도요.”

사샤가 당당하게 말하자 오히려 미디에나의 표정이 난감하다는 듯이 일그러졌다. 저런, 하는 말과 함께 눈썹을 늘어뜨리는 게 굉장히 가식적이었다.

“거기 선대 공작 내외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면 더더욱 못 할 텐데……. 카일러, 지금의 공작에게도 매우 아픈 기억이다. 그 부모님이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다. 사고였지만 아무튼 너무도 큰 사고였기 때문에 그에게도 아픈 기억이라고.”

어쩐지…… 설명이 아니라 따지려는 목적으로 꺼낸 말 같았다.

“그런 이야기들을 황후 폐하께서 어찌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이제 저희 집안의 문제인 듯하네요. 파티는 잘 치렀고. 공작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안 하셨습니다.”

“예, 맞아요. 심지어 저희랑 이야기하는 데에 와 주셨더라고요. 멋지셨죠!”

적절한 타이밍에 살짝 눈치 없이 끼어 피콜라 영애가 대답을 대신 해 주었다. 사샤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황후는 피콜라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심기가 불편한 걸 그제야 안 영애들이, 그 기세를 숨기지 않는 황후의 눈치를 조금씩 살피기 시작했다.

“정말…… 그렇게 남의 자리 빼앗아 앉아 들먹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

그리고 드디어 참지 못했는지 엘리나가 버럭하는 목소리를 냈다. 미디에나는 흘끗 못마땅하다는 듯한 눈길만 한 번 줬을 뿐이지 그에 대해 뭐라고 제재를 하지는 않았다.

“오호라, 이제 정면 돌파다?”

사샤는 입속으로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날의 경고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아주 제대로 맛을 보여 주기 위해 엘리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득의양한 그 얼굴이 보기 싫었다. 또 똑같은 걸로 걸고넘어지려고.

“남의 자리라니요…… 후작 영애님 말씀이 심하시지 않나요? 공작부인께 그런…….”

보고 있던 로즈힐이 거들고 나섰다.

그 자리는 굳이 따지자면 아무도 가질 수 없는 자리였다. 카일러가 그간 갖은 방법으로 그에게 접근하려 했던 영애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였다. 소문만으로도, 공식저인 연회에 한 번이라도 그를 보았더라면 알 것이었다.

아무튼 너무나도 많은 영애들이 탐냈지만 그래서 더 가질 수 없었고, 카일러부터가 우선 철벽이었기 때문에 채워질 수 없는 것이었다.

“거기는 원래부터 비어 있던 자리였어요. 누구에게 주어지거나 했던 적 없던 자리에 사샤 부인이 오신 거죠.”

“잘못 알고 계신 모양이네요. 제게는…… 카일러 공작이 황제 폐하께 ‘이베른의 영애’와 결혼하겠다 전달한 말을 확실하게 기억해요. 이베른의 영애……라고만 했다는 거죠.”

미디에나가 무슨 위험한 비밀을 말하듯이 그렇게 말했다. 백작 영애들은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그때만 해도 사샤 님은 귀족 사교 모임은커녕, 바깥에 나가면 몸이 급격히 나빠져 죽은 것만 같이 아프던 때였다고요. 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과연 그런 시기에…… 카일러 공작께서 말한 이베른의 영애가 누구였을까요?”

사샤로서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 이전의 삶에서 그들이 어떻게 했는지까지는. 그녀가 반박을 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자 영애들은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그 말씀하신 시기가 언젠지 정확히 모르겠군요. 제게는 이베른의 영애, 그러니까 엘리나와 결혼하겠다는 말은 해 주신 적이 없어서 모르겠군요.”

사샤는 우선 그 일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정확하게 어떤 절차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이게 이루어진 건지 그녀는 아무것도 아닌 게 없었기 때문에…….

“말을 해 주신 적이 없다? 모르고 있었으면 빼앗아 간 게 정당화가 되나? 그때 공작님께서 어째서 그 저택으로 오셨겠어. 겉으로는 사냥의 물자 조달을 위해 왔다 하셨다지만, 결혼할 신붓감을 물색하러 오셨던 거라고!”

엘리나의 말이 구체화되기 시작하자 오히려 기억이 없는 사샤보다도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본래의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부탁을 했다는 것인가, 그래서 자신은 이미 약속을 흘린 이가 있어서 그에게 해명을 해야 했고,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는 온전한 결혼이 아닌, 계약이 낀 결혼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아아…… 저대로 끌려가려니 머릿속이 복잡해지기만 했다.

“신붓감을 물색하러 오셔서 날 발견하신 거겠지.”

“아니, 그게 말이 돼? 그때 너와 내 꼴이 비교가 되냐고!”

또 버럭 소리를 지르던 엘리나가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해선 안 되는 말을 해 버린 것 같은데. 사샤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말에서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꼴……이요?”

“세상에, 사샤 부인, 이전에 후작저에서 어떻게 사셨기에 그런 험한 말이 붙었을까요?”

영애들은 그녀의 말을 꼬투리 잡아 사샤에게 걱정을 투여하기 시작했다. 애잔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들을 다독이자 그녀들은 엘리나에게 약간의 적의를 담은 눈빛을 보냈다.

“뻔뻔하구나, 정말. 그렇게 고귀한 척 다 하고. 그런데 나, 그날 그것도 봤어.”

하지만 웬일인지 엘리나의 분기가 사그라들지를 않았다. 원래 이 정도면 깨갱하고 물러나 줘야 하는데 자꾸 기세만 더 오르는 느낌이라 뭔가가 이상했다.

사샤는 최대한 침착하게 그녀가 던져 올린 공을 받았다.

“부디 비난만 하려고 하지 말고 설명을 좀 해 주겠어? 자꾸 그렇게 버럭버럭 하면 이야기를 제대로 전해 들을 수가 없잖아?”

사샤는 아직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 철벽 같은 마음에도 금이 살짝 가 버리고 말았다.

“계약서, 그거 봤어.”

사샤는 급격히 숨을 들이켤 뻔한 것을 겨우겨우 참았다.

그녀가 지금 한 번도 제대로 해결해 보지 못한 문제였다. 도대체 계약 내용은 무엇인지, 무슨 문제로 계약을 하게 된 것인지, 심지어 그 계약서가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계약서라니? 그게 뭐지?”

아주 좋은 소스를 물었다는 듯이 미디에나가 그것을 물어 버렸다.

“들어 보세요, 황후 폐하. 그날 저 두 사람은 계약서를 작성했어요. 정확하게 무슨 내용인지까지 제가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계약서라고 말하는 것을 분명하게 들었단 말이죠? 그러고는 그다음 날 공작님께서 저희 부모님에게 사샤를 데려가겠다고 말했어요.”

사샤는 미간을 찌푸려버렸다. 그 계약 내용을 차라리 알고 있어서 이야기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아냐, 그건 아니다. 남을 통해서 그 내용을 들었다면 더 싫었을 것 같았다. 뭔가 서로에게 비밀리에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것이 계약이었을 테니까…….

“사샤 부인? 계약이라니요? 정말…… 그런 건가요?”

“그냥 서로 좋아하시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거…… 아니었어요?”

“설마…… 그때…… 아니죠?”

사샤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렇게 앉아 있기만 하자 백작 영애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미디에나 앞에서도 쫄지 않고 기세등등하게 말하던 여인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마치 대답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

“정말이에요?”

사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저 계약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핑 하면서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마음이 넘쳐서 그를 배웅하는 마음이 벅차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는데 말이다.

사샤는 그러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마물들을 해치우러 가기 위해 떠나는 그의 뒷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방긋 미소를 지어 올리는 그녀의 볼이 매끄러웠다.

“그럴 리가요. 저희가 뭔가 모종의 거래를 하기엔, 제가 너무 가진 것이 없지 않나요? 저는…… 사람들 앞에 내보이지 못할 정도로 아픈 영애였을 뿐인걸요. 반면에 그는…… 많은 것을 가진 공작님이시고요. 계약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요.”

그녀가 당당하게 하는 말에 영애들은 다시 설득이 되었다. 엘리나가 이를 악무는 것도 미디에나가 못마땅하게 보는 것도 다 필요 없었다. 사샤는 또다시 멍해지려는 걸 다잡고 머릿속에 그의 등만을 떠올렸다.

그와 함께 걷기로 했으니까. 그의 곁에 있기로 했으니까.

그 계약은 결국 서로를 위한 것일 거라고 믿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진실이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너무너무 슬프겠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바꾸면 된다. 사람의 감정은 변하고, 계약은 다시 쓰면 되는 것이다.

무서워할 것 없다. 그를 좋아하는 내 마음이면…… 무엇이든 될 것만 같았다.

“자, 그럼 오해는 다 풀리셨나요? 차가 아주 맛있네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