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신경은 쓰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그게 생각만큼 쉬운 것은 아니었다. 패기는 부렸으나 그녀가 만나러 가는 것은 황후였다. 심지어 제게 악의만 가득할 황후.
씩씩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정말 아무 일 없이 다녀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사샤가 믿을 것이라고는 카일러 이그노트…… 그 남자 하나였다. 그 남자와 같은 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가 황후보다는 제 편에 서 주리라는 확신 하나.
그리고 분명, 카일러는 그녀에게 말했다. 이그노트라는 이름에 해가 되지 않을 만큼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해도 된다고 해 주었다.
오늘이 아마…… 그의 말대로 해 볼 첫 번째 날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제. 가자.”
사샤는 코니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갈아입고 머리를 정돈한 뒤에야 1층으로 내려왔다. 당연히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로제가 그 자리에 없었다.
“오늘 황궁으로 가는 길은 제가 동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샤 님.”
로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자리에는 그녀가 아닌 파반이 있었다. 생각지 못한 이의 등장에 잠깐 어리둥절했지만 사샤는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할 일이 있을 때가 있으니까.
“그, 드레스는…… 그렇게 입고 가십니까?”
파반이 사샤의 네이비 드레스를 보더니 주저하면서 말을 꺼냈다. 사샤는 그의 잿빛 눈썹이 움찔거리는 것을 보다가 제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이그노트 공작부인의 이름에 먹칠할 정도인가?”
소매를 쓸어 보고 치마도 사악사악 쓰다듬었다. 디자인이 단순하다 뿐이지 원단도 정말 고급지고 색깔도 곱고…… 참 예쁘고 비싼값 하는 드레스인 것 같은데, 어째 다들 이걸 싫어하는 것 같을까.
“저…… 그게…….”
파반은 파반대로 난감했다.
아무리 봐도 요즘 귀족 여인들이 입고 다니는 것과는 꽤 다른 디자인이었다. 단순하기는 하지만 좋은 원단을 사용한 것이었고 무엇보다…… 전 공작부인께서 입으시던 것이었다. 차마 이상하다거나 하는 말은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선대 공작부인께서 아껴 입으시던 드레스인데 그게 어찌 먹칠을 하겠습니까.”
파반이 그렇게 말하자 사샤는 살짝 밝게 웃었다. 선대 공작부인의 옷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조금 궁금하긴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이 드레스가 왠지 맘에 들어서 또 입게 되더라고. 저쪽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갈까?”
살짝 입꼬리를 올린 사샤는 씩씩하게 발을 옮겼다. 찰랑이는 치맛자락이…… 파반으로 하여금 시간을 착각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황궁 중에서도 황후궁의 후문, 지난번 사교 모임 때 오고서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 이렇게 오게 되었다. 딱히 좋은 기억도 아닌데 와 가지고 또 안 좋은 기억 하나 쌓고 가게 생겼다.
“다녀올게.”
사샤는 마차에서 내려 파반에게 인사하고는 황후궁에서 나온 시녀를 따라 혼자 씩씩하게 걸어갔다.
넓게 공간을 사용했던 그때와는 다리가 안내된 곳은 화려한 소파가 놓인 응접실이었다. 구불구불한 금테 두른 소파들이 커다란 자리를 만들었고 그 가운데 테이블에도 화려한 티 웨어가 가득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응접실로 안내되어 들어간 곳에서 사샤는 잠깐 다리도, 생각도 멈추었다. 황후와의 독대를 생각하고 있던 사샤는 소름이 돋는 게 느껴졌다.
“공작부인…….”
“왔어? 오랜만에 보네?”
난감한 얼굴로 그녀를 부르는 것은 바로 라다, 로즈힐, 아이시, 그리고 피콜라였다.
그리고 득의양양한 얼굴로 대뜸 친한 척 인사를 건네는 것은…….
“아, 이베른의 후작 영애로군요.”
모르는 척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눈길과 이름을 한번 불러 주었을 뿐인데 다시 의기양양하게 턱을 들어 올리는 것이 가관이다.
사샤는 고의적으로 배치해 좋은 듯, 황후의 대각선 옆이자 엘리나의 앞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다들 잘 들어갔어요? 안부 묻는다는 게…….”
“다들 잘 들어갔어요, 사샤 부인.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라다의 말에 사샤는 마음을 놓은 듯이 고개를 뻗어 쓱 둘러보고 다시 앞을 보았다. 공석인 상석을 보던 사샤는 슬쩍 속으로 코웃음을 지었다.
뭔가 잘 만든 무대의 느낌이 났다. 뭐 하려고 열심히 알아보고 준비한 무대.
“아, 영애들. 모두 와 주었군요.”
사샤가 등장하고 아주 자연스러운 텀을 가진 뒤에 이 자리의 주인공인 듯이 등장한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이들이 서둘러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바라는 바인 걸까?
살짝 입꼬리를 올려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질 수 없다 이거야. 한창 날카로운 황후의 표정과 반대되도록 사샤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사교 모임 이후 정말 바람직하게도 소소한 모임을 가졌다고 들었어요. 음, 대대로 사교 모임을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었는데. 자, 어떤가요, 공작부인?”
뭐 아이디어를 준 것은 그녀였기 때문에 딱히 반박할 거리는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좋은 영애들과 즐거운 시간 가졌습니다. 옆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저까지 함께 대화에 참여시켜 주시고,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다른 분들도 그러셨나요?”
온화한 미소와 함께 꺼낸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한껏 경직되어 있던 영애들의 분위기가 한층 풀렸다.
“공작저 구경도 하고 정말 유익한 시간이었죠?”
“맞아요. 정원도 정말 예뻤고요. 차도 맛있었고……. 오랜만에 편안하게 이야기 나누어서 더 재밌었어요.”
라다가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편안하게 잘 놀았다고 대답하면서 그녀의 표정이 왜 이리 비장한지 알 수 없을 노릇이었다.
“어머, 파티? 하하 거기에 사람들도 초대하고 그랬어? 후작저에서 내가 했던 게 그렇게도 해 보고 싶었어, 언니?”
엘리나는 대놓고 하대하는 것에 곁에 있던 다른 영애들이 흠칫 놀라는 것이 보였다. 사샤가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그녀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라고 이러는 거야.
“엘리나 후작 영애. 말을 굉장히 거침없이 하는 분이시네요. 조금 자제하셔야 하겠어요.”
그냥 보통 백작 영애나 이런 이들이 하는 말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보통은 이제 그러지 말라거나 했을 텐데, 그중에도 사샤는 조언을 하듯이 대꾸한 것이었다.
이 자리의 유부녀라 하면 황후와 사샤였으며, 사샤는 이베른의 언니나 하는 것들을 내버리고 온전히 이그노트 공작부인으로서 그녀를 대했다.
“어머, 지금 저한테 명령한 거예요?”
“흠, 그걸 명령이라고 받아들이셨다면 어쩔 수 없네요. 부탁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제안 정도로 해 두지요.”
발끈하는 엘리나에데도 아랑곳없이 사샤는 태평하게 그녀에게 대꾸했다. 부드럽게 아이 하나 달래듯이 꺼내는 말에 엘리나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어버버 거리기만 했다.
“아무튼 이렇게 좋은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사샤는 물어보았던 것에 대한 대답을 건네며 이 이야기는 끝이 나야 맞았다. 하지만 역시 자신을 보는 순간 이성을 잃고 반짝이는 엘리나의 광기에 혀를 찼다.
저거는 도대체 어떤 심술을 갖고 살기에 저 모양인 거야. 고개를 살래살래 저어 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깊이 있게 알고 싶은 사람도 아니라 그냥 넘기자 싶었다.
“이그노트의 공작저라면…… 모임이나 연회를 열지 않은 지가 오래인데…….”
“예.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황후 폐하가 나오신다는 모임에도 나오고 이번 저희 집에서 파티도 열었던 것이에요.”
“재밌었어요. 그렇죠?”
사샤의 말에 로즈힐도 동의의 말을 얹어 주었다.
“부인과 영애들께서 모이는 곳을 다녀와 보니, 그게 굉장히 좋더라고요. 좋은 분들과 좋은 이야기를 나누는 편안한 자리가 더 있었으면 싶어서……. 부족한 게 많았을 텐데 다들 즐겁게 다녀가셨다니 다행이에요.”
황후의 사교 모임보다 아주 작은 것이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직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지 모르나 지위로 따져 보자면 후에 미디에나를 위협할 만큼 세력을 차지할 만한 이그노트 공작부인.
그리고 의도했던 대로, 황후는 그녀를 경계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저번에 지적했던 드레스를 또 입고 왔군요. 내 말이 그렇게 우습게 들렸나요?”
황후는 갑자기 그녀의 옷을 훑어보자 눈빛이 화악 싸늘해져 버렸다. 그 분위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던 사샤와 다른 영애들은 갑자기 변한 황후의 분위기에 살짝 경직이 되었다.
“제…… 드레스 말씀이신가요?”
“그래. 그 드레스.”
온화하고 너그러운 황후라고 연기하고 싶었는지 존댓말을 쓰던 것도 놓고 미디에나가 날카롭게 물었다.
이 드레스를 입고 황궁에 들어와 하녀인가 했더니 카일러의 부인이었다는 것도 모자라, 그가 직접 나타나, 자신을 드레스 원단도 못 알아보는 멍청한 여자를 만들어 버렸다.
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처음 들어왔을 땐 미처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 들어오다 문득 드레스를 발견하자 미디에나는 확 열이 뻗쳐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드레스, 선대 공작부인이 아끼시던 옷이고, 최고급 원단으로 장인이 지어낸 이런 것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신기할 정도예요. 그때…… 공작님께서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네요.”
그녀는 절대 당황하지 않고 대꾸에 대꾸를 거듭했다. 황후는 붉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이시 영애, 이 드레스가…… 정말 하녀복 같아 보이나요?”
“음…… 아니요, 자세히 보면 핀턱 장식이 잔뜩 들어간 거잖아요. 그 차이를 이해하시겠어요? 고급 원단에 정성이 엄청나게 들어간 드레스예요. 아마…… 딸 없는 선대 공작부인께서 며느리에게 넘겨주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요?”
아이시의 감성적인 대답에 모두들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좋아했다. 그 해석은 사샤도 마음에 들어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