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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40화 (40/128)

40화

“이번에도 날짜를 장담할 순 없군. 한…… 닷새에서 일주일쯤 예상한다.”

카일러는 또다시 출정에 나섰다. 보고를 듣고 가는 건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를 따라 저 뒤에는 공작가의 기사들까지 전부 말에 올라 저택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사샤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강하기만 할 줄 알았던 남자가 괴로워하는 걸 보았기 때문에 보내는 마음이 아팠다.

“몸조심하고요. 배웅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간은 침대에서 꼼지락거리는 그녀를 두고 그저 나갔을 텐데. 아…… 로제나 파반이 배웅을 해 줬었겠구나. 갑자기 자신이 뭐라도 된 양 생각하고 있는 것이 웃기고 민망해서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시선을 쓱 돌렸다.

“몸조심하고, 금방 돌아오겠다.”

사샤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그는 자신의 손을 한 번 스윽 스치듯 만지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딜런이 그런 그를 맞았다.

“차라리 함께 데려가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부인 한 분 지키지 못 할 만큼 위험하지도 않고…… 공작님의 소리를 차단해 주신다면 좀 더 편안하게 일을 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딜런은 한껏 날카롭게 벼려져 있는 카일러의 기운을 곁에서 느끼며 그렇게 말했다.

딜런에게는 유일하게 그 사실을 밝혔다. 사샤에게 닿아 있으면 제 귀에서 나는 엄청난 소음들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그건 안 되지. 우선 안전이 완벽하지 않은데 굳이 나 잠깐 편하겠다고 데려가는 것이 말이 안 되고,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그들의 행적을 제대로 쫓을 수 있으니까. 나의 편의를 위해 사샤도 너희도 위험에 빠뜨리는 짓이다.”

“……경솔했습니다.”

딜런은 바로 그의 말에 고개 숙여 수긍했다. 그러고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저택 정문 앞에 서서 아직도 떠나고 있는 기사단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공작부인을.

“잘 기다려 줄 거란 것만으로도, 괜찮아진다.”

제 주인이 이런 말을 할 거라곤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딜런은 얼떨떨한 얼굴로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도 분명 어렸을 때부터 조금씩 변화를 맞이해 오기야 했지만…… 예측하지 못한 부분이라 혼돈스러웠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제국의 모든 영애들에게 그가 이런 눈빛과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걸 알게 된다면 그녀들은 모두……!

“으으.”

“……? 뭐냐, 추운 거냐?”

“아닙니다, 공작님. 가시죠.”

오싹하게 전신을 훑는 한기에 흠칫하는 그를 보고 카일러가 말을 걸었다. 그를 격하게 고개를 내저은 후 똑바로 앞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카일러가 공작저를 떠나자마자…… 어쩜 이렇게 타이밍을 딱 맞췄을까?

마치 그가 저택에 없다는 걸 안다는 듯이 궁에서 보낸 초대장이 도착했다.

그 편지를 사샤에게 전달한 파반과 곁에서 그를 지켜보는 로제 모두 그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황후가, 아니 황후께서…… 나를 초대하셨다?”

불러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그녀가 가지고 있는 불온한 마음을 온 제국이 알고 있음에도 눈 가리고 아웅 중이신 황제 폐하의 발버둥을 좀 헤아려 주시면 좋겠는데.

“아프시다고…… 할까요?”

로제가 고심 끝에 의견을 내놓았지만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끈질기신 분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내실 리 없지.”

제법 진지한 얼굴로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옆에서 하나둘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역시, 사교 모임에서 조용히 지나간 건 단지 보는 눈이 많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 만남을 생각하자니 제 어깨가 다 흠칫한다. 이그노트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누가 버튼을 누른 듯이 돌변하는 그녀를 다시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슬쩍 피하고 싶단 생각마저 들었다.

“가실 겁니까?”

“큰일 날 것도 아닌데, 뭐. 다녀올게.”

이제 제가 이그노트 공작부인이다 하고 알려졌겠다 대면한다고 뭔가 크게 해코지는 하지 않겠지 싶었다.

“때리거나 가두진 않겠지. 창피 주면 입 다물면 되고.”

“사샤 님…….”

황후가 부른 것이니 거절할 수 없이 가야 했다. 차마 말릴 수 없어 바라보고 있는 로제와 파반은 그들의 새 안주인이 패기가 넘치는 말을 하는 것을 걱정을 섞어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바로 내일이라니…….”

“황후 만나러 가는 게…… 아, 황후 폐하 만나러 가는 게 뭐가 그렇게 큰일이라고. 집에 있는 옷 입고 가면 되지, 뭐.”

그때 사샤의 눈이 반짝였다. 저번에 처음 만났을 때 입은 그 드레스를 입고 가 볼까? 옷을 보고 무시하는 그녀를 보고 카일러가 그녀를 두둔해 줬던 때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그럼 난 도서관 들어가 있을게. 점심시간 되면 불러 주겠어?”

“예에…… 알겠습니다.”

카일러를 보낼 때와 마찬가지로 씩씩하게 대답한 그녀는 테이블에 황궁에서 온 편지를 내려놓고는 가볍게 일어나 거실을 지나쳐 계단을 올라갔다.

“괜……찮으신 겁니까.”

파반은 그 뒷모습을 따라 시선을 올리다가 하얗게 세어 잿빛이 된 눈썹을 꿈틀거렸다.

로제는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기에 부드럽게 입술을 올려 웃을 뿐 타박하지 않았다.

“된다고 하면…… 황후 폐하 앞에 가서도 패기 부리고 올 것 같은 분이에요.”

로제가 그렇게 말하자 파반은 더욱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정말 괜찮겠냐 묻는 그 무언의 눈빛에 로제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니…… 그런 말을 해 놓고 그렇게 태평하게 웃는 겁니까? 걱정이 돼서 보낼 수나 있을까.”

살짝 혀를 차는 파반을 탓할 수도 없었다. 그 표독한 황후의 앞에 보내는데, 좋은 마무리를 할 수가 없는 사이일 게 뻔한 상황이다. 심지어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해 줄 주인도 안 계시고…….

“공작님께서 어떻게 저분을 모셔 올 생각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알수록 뭔가 다른 분이에요. 확실히.”

로제가 말할수록 파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제가 제대로 상대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확실히 안주인의 성정이 어떤지 알고 있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공작님와 황후 사이의 일과 황후의 성정까지 생각한다면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는데, 어째서 같은 여인으로서 그런 걸 더 잘 알 로제가 이렇게 걱정도 없이 태평한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황후, 미디에나는 황제마저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메딜란 공작의 고명딸로서 그 괴팍한 공작의 결정에 따라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로 머나먼 수도로 떠나온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에게 정략결혼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했고, 자신의 광활한 영지를 떠나 황후로서 수도에 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 카일러가 띄어 버린 것이다.

뭐 그들의 주인은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은 적이 없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그녀는 그 생각을, 마음을 접거나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속된 말로…… 잘못 걸린 것이다.

“잘나신 걸 죄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잘났다고 좋았던 것도 하나도 없는데…….”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파반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뜬금없는 말이 무엇인지는 로제도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들의 주인에 대한 말이라는 것을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나마 지위가 잘나고 절친이 잘나서 괜찮은 거 아니겠어요?”

“휴…… 절로 한숨이 나는군.”

그나마 황제를 절친으로 둔 제국 최고의 공작 가문이기 때문에 험한 꼴 당할 일 없이 살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황후로 인해 험해질 수 있었던 것을 황제가 겨우 막아 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황제 폐하가 아예 억지로 결혼을 시키기는 했지만 아마 아직까지는 얕보고 있을 거예요. 약간…… 저 여자만 쫓아내면 된다?”

“무슨 그런 망상을! 그런다고 그 자리가 자신의 것이 되는 것도 아닐 텐데!”

고지식한 파반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황후였다. 물론 이해할 생각마저도 없고 말이다.

로제 또한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다른 영애들이 카일러를 보고 눈을 반짝이고 군침을 흘리고 어떻게든 눈에 띄어 보려 갖은 애를 쓰는 것은 귀여워 보이기라도 했지. 황후의 그런 행태는 제 주인을 마치 우습게 보는 것만 같아서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황후에게 제대로 된 명분을 가지고 대들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카일러는 거기에 대고 제대로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우선 황후의 앞이라 말을 함부로 할 수 없었고, 남녀의 관계로 보아도 그녀를 떨굴 만큼 독하게 할 수가 없었다.

정중히 사양하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는 여인이니까.

“공작님으로는 안 돼요. 차라리 같은 마음을 가진 여인끼리 싸운다면 모를까. 사샤 님에게는 명분이 있고, 얼추 맞먹을 지위도 뒷받침이 되고요. 아주 적절하죠?”

로제가 어째서 저렇게 평온하게 생각하는지는 이해하겠는데…….

“그래, 그건 이해한다고 칩시다. 그 역할을…… 사샤 님께서 제대로 해 줄 것이라 보는 겁니까.”

“음…….”

로제는 살짝 말을 아꼈다. 정확하게 어떻게 해 줄 거라는 정확한 기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고, 실제로 그녀가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도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기대해 봐도 좋을 거 같아요. 여자는…… 사랑받으면 강해지거든요.”

“……잘 모르겠군요.”

파반은 결국 고개를 저었지만 로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오늘 카일러를 배웅하는 사샤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런 생각이 확신이 되려고 했다. 처음은 어색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점차 교류를 하고 이어져 가는 것이 보이는 듯했기 때문에.

“문제만 안 생기게 잘 봐 주면 될 거 같아요.”

혹여나 상처 입고 돌아오시더라도 잘 다독여 드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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