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그러니까아! 언니가 영애들을 모아서 파티를 했다니까요? 어떻게 그렇게 공작부인 행세를……! 저도 파티 열게 해 줘요. 영애들 초대할 거예요!”
신전의 2층에서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던 미디에나는 1층 회랑을 울리는 짜증 가득한 목소리에 미간을 확 찌푸렸다. 발을 멈춘 미디에나를 따라 그녀의 뒤를 따라오던 시녀와 시종들도 다들 멈추었다.
“엘리나. 여기 신전이잖아. 쉿, 조용히……!”
“엄마는! 지금 신전인 게 문제야? 여기 복도잖아. 누가 뭐라 한다고!”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나오기 전 그녀를 부르는 이름에 미디에나는 두 눈이 번뜩했다.
“언니가, 응? 이그노트의 이름을 얻었다고 으스대는 거 전에 엄마도 봤잖아. 어쩜 그래? 다락방에 처박혀서 맨날 밤에만 기어 내려오던…….”
“엘리나! 조용히!”
짜증을 있는 대로 부리던 목소리가 하면 안 되는 말이라도 한 듯이 다른 목소리가 너무도 다급하게 막아 버렸다.
그러고는 한동안 꿍얼거리는 소리만이 이어졌다.
미디에나는 멈췄던 발을 움직여 조금 서둘러 아래로 내려갔다. 1층으로 다 내려와 회랑을 둘러보자 왼쪽 편으로 뻗은 길 위에 두 명의 여인이 보였다. 딱 엄마와 딸로 보이는 그들을 본 미디에나는 뒤에 있는 예하라에게 물었다.
“저기 가는 이들은…….”
제일 가까이에 서 있던 시녀장 예하라는 미디에나가 가리키는 곳으로 슬쩍 고개를 빼 바라보았다가 다시 바르게 자세를 잡고 대답했다.
“이베른 후작저의 후작부인과 그 딸인 엘리나 영애입니다. 미모로 정평이 나 있는 엘리나 영애는 이그노트의 공작부인이 정해진 이후로 가끔 저리 히스테릭한 모습을 보인다 합니다. 본래 그랬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뒷모습을 본 것만으로 바로 대답하는 예하라의 정보력에 뒤따르는 이들이 감탄하는 사이 미디에나는 한쪽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저 영애가…… 이그노트 공작부인……의 여동생이란 말이지.”
미디에나의 붉은 입술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그녀가 오른손을 살랑살랑 흔들자 예하라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고요한 회랑에는 미디에나가 그녀의 시녀장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잠깐 울렸다 바로 사라졌다.
*
“아니, 그러니까 뭐예요? 누군데 그래요?”
엘리나는 이제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었다. 하지만 마차를 타기 전 들렀던 기도실에서 나오다가 어떤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버렸다.
양쪽에서 딱 붙어 팔짱을 낀 그녀들은 여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힘이 세서 한번 붙들리고 나자 뿌리칠 수가 없었다. 당황하여 소리를 지르려는 그녀의 입을 펼친 부채로 막아 버린 그녀들은 다짜고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사태를 파악한 엘리나가 조용히 부채 안에서 물었지만 그들은 꾹 다문 입술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이…… 누가 부르는 건지는 알려 줘야……. 저 엄마가 기다리고 계신다고요.”
작게 꿍얼거리는 목소리에도 그녀들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그렇게 끌려간 엘리나는 다시 신전으로 향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홀이 아니었다. 여기는 완전 고위 귀족들이 조용히 와 기도하고 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도실이었다.
그녀들은 한 기도실 문 앞에 서서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지만 굳건하게 붙들고 있던 팔을 풀고 한발 물러났다. 어리둥절한 엘리나가 문을 한 번, 그들을 한 번 바라보았다.
“들어가십시오.”
그들이 단 한마디를 꺼냈다. 엘리나는 자신을 만나고자 하는 이의 지위를 깨닫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문손잡이를 돌리고 들어가자 바깥에 남아 있던 여인들이 문을 닫아 버렸다. 그것은 마치 바깥은 그들이 지키고 있을 거라는 걸 암시하는 듯했다.
안으로 다시 눈을 돌리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화려한 보랏빛 드레스만으로도 이미 그녀가 누군지 알 것 같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이베른 후작 영애?”
“에? 예…… 예?”
엘리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이상하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녀의 기에 짓눌려 버린 것도 있었다.
곧 자신의 실수를 떠올린 엘리나는 큼큼 서둘러 목을 가다듬고는 다시 그녀에게 예를 다해 인사를 했다.
“제국의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이베른 후작가의 엘리나입니다.”
제법 우아한 몸짓으로 인사하는 그녀를 곁눈질로 본 미디에나는 들고 있는 부채를 살랑이다 탁! 소리가 나게 접었다. 인사를 마치고 곧게 자세를 잡으려던 엘리나가 흠칫 놀라 움찔거리고 말았다.
“이리 와 앉아요.”
미디에나는 우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간은 꾸민 듯한 정도의 목소리에 경직된 엘리나는 그녀의 부채가 가리키는 대로 미디에나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엉덩이만 겨우 걸친 채 고개도 들지 못하고 앉은 그녀를 바라보며 미디에나가 부채 너머에서 눈동자를 빛냈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을 텐데, 미안해요. 대화를…… 좀 나누고 싶어서 불렀어요.”
은근한 목소리의 강약 조절에 엘리나는 심장이 터질 듯이 달리는 느낌에 숨이 찰 것만 같았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도 않았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마구 뒤엉킨 느낌이었다.
“무…… 무슨 대화를……. 아, 저야 물론 영광입니다, 황후 폐하.”
당황하지만 예법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녀의 몸부림이 아주 마음에 든 듯이 미디에나가 붉은 입술을 쓰윽 끌어 올렸다.
“저번 사교 모임에 참석했었죠?”
“예…… 그렇습니다. 참석했었습니다.”
엘리나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는지 아닌지를 계속해서 신경 써야 했다.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편하게 해요, 엘리나 영애. 난 영애를 잡아먹으러 온 게 아니니까.”
별안간 미디에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한껏 긴장하느라 식은땀까지 날 지경이었던 그녀는 문득 가벼워진 분위기에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용기를 내어 눈을 들자 부채 너머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황후의 두 눈이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넘어다보고 있었다.
“예, 제가…… 폐하를 뵙고 얘기를 나눌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서요. 정말…… 아름답고 우아하시네요.”
엘리나는 사교계에 열심인 편이라 높은 영애나 부인들에게 사근사근하게 대하는 법도 알고 있었다. 방금까지는 그녀가 보낸 사람들에게 이미 기가 짓눌린 채 들어와 그녀의 위압에 눌렸지만 살살 풀어 주자 본래의 생기가 돌아왔다.
“얼마 전에 사교 모임에서…… 내가 좀 재밌는 얘기를 들어서 말이에요.”
사교 모임……? 분명 그 자리에 엘리나도 있었다. 그날의 주목할 만한 일이라면 사샤가 이그노트 공작부인으로서 그 자리에 참석했다는 것? 그 정도였다. 본인은 집으로 돌아가려는 길에 사샤를 붙들고 화를 쏟아 내려다 또 기분 나쁘게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돌아왔던 기억밖에 없었지만.
“재밌는 얘기…… 말씀이세요?”
그녀가 모르겠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묻자 미디에나의 눈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 부채 안의 입술이 전혀 웃고 있지 않다는 것을 엘리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모임이 파해서 대부분 집으로 돌아가는 때에 인적 드문 복도에서 말이죠. 한 영애가…… 부인 하나를 붙들고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거예요.”
한껏 집중한 엘리나와 부채 너머의 미디에나. 미디에나는 한껏 긴장을 올린 타이밍에 살짝 몸을 소파의 등받이에 기대며 내리깐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남의 거 그렇게 뺏어 가 놓고 언제까지 뻔뻔한지 보자고…… 말이야.”
집중하고 있던 엘리나는 숨조차 들이쉬지 못한 채로 놀라 그대로 멈춰 버리고 말았다.
숨소리조차 허락되지 않는 긴장감 속에서 미디에나에게서 떨어져 나온 눈동자가 하릴없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그러고는…… 겨우 공작저에 살고 있다고 너무 기고만장해진 거 아니냐 묻던데……”
소파에 기대어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조차 압박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떨리는 숨을 겨우 들이마신 엘리나가 겨우 눈을 들어 미디에나를 바라보았다.
그날의 대화를…… 미디에나가 모두 들었다. 그녀가 읊조린 말은 엘리나가 사교 모임 끝에 사샤를 붙들고 퍼부은 말이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공작가의 권위에 먹칠을 하는 것과 같았다. 상대하는 이가 바로 이그노트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저…… 황후 폐하, 그것이…….”
“그래서 말인데, 엘리나 영애……? 궁금한 것이 있는데…… 남의 것을 빼앗았다는 것은 사샤 부인……이, 예정된 것을 틀어서 이그노트 공작을 빼앗아 가져갔다는 말인가요?”
그 말을 꺼내는 황후의 목소리부터 이미 기름이 번질번질한 거 아닌가. 물어보는 저의를 모르겠어서 대답해야 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원래…… 원래 이그노트 공작님은 언니를 데려가려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종의 무엇이 있었고, 그다음 공작님께서 꼭 저희 언니를 데려가겠다고 말을 꺼낸 거였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미디에나는 눈을 빛냈다.
“하지만…… 그건 결국 공작님께서 선택하셨다는 이야기…… 아닌가?”
미디에나의 목소리에 간교가 흘렀다. 하지만 그걸 눈치채지 못한 엘리나는 자신을 의심하는 말에 번뜩 불타올라 버렸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폐하! 내키지도 않아 하는 공작님을 꼬여낸 거예요! 제가…… 그 증거를 알고 있습니다.”
너무도 자신만만한 엘리나의 말에 동그랗게 떴던 미디에나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증거라고?”
“예! 증거요! 제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미디에나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진 것을 엘리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니 의욕이 갑자기 솟아오른 것이다.
엄마와 아빠는 그녀의 말을 제대로 믿어 주지 않았다. 니가 무슨 증거가 되겠냐, 그런 머리로 뭘 하려고 그러는 거냐. 하고 밀어내기 바빴다.
“호오…….”
하지만 눈앞의 황후 폐하는 달랐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황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작을 흠모한다고 했지…… 당황으로 내내 어지럽던 엘리나의 눈에 순간 이채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