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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38화 (38/128)

38화

사샤는 쭈뼛거리며 공작의 방 앞에 섰다.

저녁을 먹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파반이 전한 말은 아마 지금 바로 그녀를 부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지금 그 앞에서 머뭇거리는 건…… 복잡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떠나기 전 그가 보였던 이상한 행동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떠올라 궁금해져 버렸고, 그리고 카일러라고 부르라 했던 그의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방금 뒤뜰에서도 들었던 말이지만, 머릿속에 맴도는 목소리는 그 밤 침대에서 들었던 목소리였다. 맞부딪는 피부에서 전해지는 온기와 짜릿한 감각에 더해 카일러라는 이름을 말하는 목소리까지 감각을 달려 온몸으로 퍼졌기 때문에.

‘왜 하필 그런 타이밍에 이름을 말해서는…….’

그걸 떠올릴 때마다 그 밤이 떠오르니까 변태가 된 것 같잖아!

본래 부를 생각도 못 했던 이름을 그렇게 각인시켜 버린 것 같아서 부르기가 쉽지 않았다. 부르라고 하면 딱 잡아떼야 하는 걸까.

“들어와라.”

“히익!”

그때 안에서 카일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저 문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었을 뿐인데, 어떻게…….

사샤는 더 얼쩡거리기를 관두고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안은 아주 어두운 상태였다. 오후 시간인지라 저물어 가는 빛이 매우 강렬한 시간임에도 일부러 가려 놓은 채라 빛이 한 자락, 두 자락, 이렇게 스미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게 뭐예요. 나 따라 하는 거예요?”

사샤는 얼른 문을 닫고 어둠에 눈을 크게 떴다. 아주 조금 눈을 깜빡이며 그렇게 서 있자 내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가 내면으로 파고들고 있을 때 카일러는 커튼부터 전부 젖히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켜 주었다. 자꾸만 침잠해 들어가는 자신을 멱살 잡아 끌어 올려 주었다.

하지만 사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끌어올릴 때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을 어둠 속으로 내려 보냈다. 마치 물속에 들어갈 때 조금씩 묻힌 다음에 서서히 걸어 들어가듯이.

카일러는 커다란 1인용 소파에 몸을 묻듯이 앉아 있었다. 두 눈을 꾹 감은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가끔 눈을 질끈 감았다. 무엇을 떨쳐 내고 싶은 듯이.

“저…… 다녀온 일이 힘들었어요?”

사샤는 최대한 평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을 걸었다. 그의 정면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잔뜩 불편해하던 그 미간이 스륵 주름을 풀었다.

“일이 힘든 게 아니다. 후…… 다녀온 것도 피곤한데 아직도 가라앉지를 않아.”

어둠을 가르고 나가는 그의 목소리가 촤악 가라앉았다. 목소리가 침묵을 깨는 것이 아니라, 마치 침묵 속으로 스며드는 느낌. 어둠과 너무나 동화되어 있는 그 모습이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다.

번쩍 저를 들어 올려 어둠에서 꺼내 주던 그의 심정이 이런 거였을까.

그는 사샤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손을 마다하지 않았다. 마주 잡은 손을 당기는 대로 따라가자 그는 제 오른쪽 허벅지 위로 그녀를 앉혔다.

하, 하고 깊은 숨을 내쉬는데, 마치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 하나를 내려놓은 것 같은 짙은 한숨이었다.

“나를 이렇게 안고 있으면…… 편안해한다고 느끼는데…… 맞아요?”

아까 분명 그의 목소리는 어둠 속으로 차분히 스며들었는데 자신의 목소리는 톡톡 튀는 것 같아 자연히 목소리를 죽이게 되었다.

팔걸이에 걸쳐 있던 그의 오른팔이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당겼다. 그의 손을 잡을 때부터 뻣뻣하게 버티지 않고 힘을 뺀 채로 몸을 맡겨 버렸다.

카일러는 사샤의 머리가 제 어깨에 기대어질 만큼 허리를 당겨 안은 채 조용히 숨을 쉬었다.

그게 마치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인 것 같아 사샤도 말없이 그에게 기대어 안겨 있었다. 단단한 몸에 기대어 안겨 있는 것 자체로 일주일간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편안하게 느끼는 게 이런 느낌이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살아온 적 없다 생각했던 탓에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하고 막연히 생각이 들었다.

“사샤.”

어둠으로 사라지던 목소리 대신 그녀의 가슴에 확 날아와 꽂혔다. 이 이름으로 불린 게 불과 몇 개월뿐인데…… 왜 이 목소리가 부르는 이름에 이토록 설렐 수 있는 것일까.

“이 이름을 불린 게 얼마 안 되는데…… 공작님이 불러 주는 이름 되게 좋아요.”

서로의 실루엣만이 명확하게 보이는 어둠 속이라서 그런 걸까, 사샤는 속으로 했던 생각에 목소리를 입혀 보았다.

그가 어깨를 흠칫 떠는 게 느껴졌다. 그가 제 말에 반응했다는 사실에 사샤가 살풋 미소를 짓는 사이 카일러는 기대게 했던 그녀를 떨어뜨렸다. 제대로 허리를 세워 앉은 그녀의 지척에서 마치 두 눈이 보인다는 듯이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걸 나도 느끼고 싶은 것이다.”

“……예?”

그가 뜬금없는 말을 꺼낸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눈을 피할 수가 없다는 느낌이 들어서 어둠 속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사샤의 목덜미에 입술을 살짝 붙였다가 떼었다.

“내가 부르는 사샤라는 이름이 좋았다고 했잖아. 나도…… 그대의 목소리가 부르는 내 이름을 듣고 싶은 거다.”

아…… 역시.

그가 이 말을 꺼낼 것을 무서워하고 있었거늘, 이렇게 말하니까 그가 왜 제게 이름으로 불러 달라 했는지 대번에 이해하고 말았다.

“카…….”

한 음절만 발음한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왜 이 이름 하나 꺼내기가 이리도 어려운 것일까.

그러자 그의 손이 올라와 그녀의 입술을 툭 매만지고 지나갔다. 뜨겁고 투박한 손인데 그 손길이 너무 조심스러워 심장에 또 툭 거세게 부딪혔다.

“카일러…….”

“그래.”

사샤가 그의 이름을 발음하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순간적으로 밀려온 파도에 휩쓸리듯 사샤의 심장이 흔들렸다.

내가 이 이름을 부르기 힘들었던 이유를…… 알아 버렸다. 그건 바로…… 내가 이 남자를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부르는 제 이름에 심장이 조이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마저 이렇게 설레 버리면……. 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이만큼이나 걸어와 버렸던 것이다.

“좋다. 앞으로는 그렇게 불러.”

마음이 어떤지 기분이 어떤지 표현해 본 적 없는 남자가, 감정을 표정으로라도 나타내 본 적 없을 것 같은 남자가 좋다고 하는 말에 어느 여자가 꺾이지 않을 수 있을까.

사샤는 몸을 돌려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그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 순간만은 왠지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린 한 쌍의 작은 짐승이 된 것 같았다.

서로의 품으로 파고들며 온기를 갈구하는 것이 온전히 나를 감싸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고 외로움과 감정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외롭다고 아무에게나 파고들었다가는 깊이 상처 입고 피 보기 십상이니까.

“마물을…… 처치하고 왔다. 그것들은 재생 속도를 이길 만큼 강력한 한방을 날리거나 난도질을 내줘야만 해서 개체수가 적더라도 피곤해. 인간이 아니라고 해서…… 죽이는 게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물이라니…… 얘기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영애들이라서 관심이 없었던 것일까. 제국 사람들이 평온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이 남자 때문일 텐데…… 모두들 알기는 하는 걸까.

“너무 수고했어요……. 죽이는 게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닌 그 마음이 좋아요. 하지만 정말 죽을 만큼 힘들면…… 좀 내려놔도 괜찮아요, 그 마음. 누구도 당신에게 뭐라고 할 자격 없으니까.”

사샤는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약간의 사심을 담아.

카일러가…… 살짝 웃었다. 귓가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이 살짝 떨리는 느낌만큼 그가 웃음소리를 내었다.

“사샤.”

“네?”

그가 부르는 이름이 부드럽게 울렸다. 이번에는 아까 그가 해 주었던 것처럼 부르는 이름에 즉각적으로 대답을 해 주었다. 다시 한번 귓바퀴에 그의 아주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억지로 방에 빛을 들이지 않아도 이미 나는 평소대로 돌아왔다. 마치 사샤, 그대가 빛인 것 같군.”

“……의외로 낯간지러운 말을 잘하시는 데요?”

분위기가 떠오르는 듯하자 사샤는 바로 그를 끌어 올렸다. 아직도 어스름한 방 안. 그러나 푹 가라앉아 있기만 하던 것들이 통통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낯간지러운…… 것인가. 자제하도록 하지.”

눈치 없고 물정 모르는 남자 같아져서 사샤는 왼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툭툭 내려쳤다. 아, 하는 소리를 내는 그였지만 자신이 왜 맞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낯간지러운 게 좋은 거예요. 나쁜 뜻으로 창피하다는 것이 아니라…… 수줍고…… 기분 좋다는 거예요.”

“그대가 빛인 것 같다는 말이 마음에 든 모양이군.”

카일러는 고요히 웃고 있었다. 그가 몸을 들썩일 정도로 웃고 있는 것도 아닌데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입술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사실이다. 끝도 없는 괴로움 속에 난데없이 작은 불빛을 매단 등불이 하나 들어와 준 느낌이야. 이 불빛만 따라가면…… 밝은 곳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말을 길게 하는 그도 처음이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에 사샤는 또륵,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그저 혼자인 삶이 성인이 되도록 이어지고,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이라는 것은 꿈꿔 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곁에 있는 것을 기꺼워하고 고마워하는 이가 있었다. 자신이 마치 길 안내자가 된 듯, 자신의 뒤를 따라오겠다는 그의 말에 벅차올랐다.

“괜찮아요? 그게 나여도?”

“그래. 그게 너여도 된다. 너면…… 될 것 같다.”

웃음을 머금은 어미가 사르르 사샤의 마음에 녹아들었다. 그는 이미 제국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남자라 했지만 그의 이런 면은 나만 아는 거다.

평생…… 다른 이들은 몰랐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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