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나직하고도 왠지 심장을 설레게 하는 목소리가 그냥 갑자기 울린 거라면 그저 잠깐 흠칫 놀라고 말았겠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채 버린 영애들은 얼어붙어 버렸다.
눈동자만 또르륵 굴려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던 그때, 당황한 사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작님! 벌써…… 돌아오셨어요?”
회양목 너머에서 한 남자가 등장했다. 언제 오는지 기약 없던 카일러가 그곳에 서 있었던 것이다. 들어오자마자 이곳으로 들른 듯 갑옷을 입은 그대로였다.
무서운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막 놀라는 모습을 보기에 좋지 않을 텐데…….
마치 집에서 몰래 파티 열다가 걸린 사람처럼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이것 참 난감하게 됐다 싶어서 어설프게 미소를 지어 보려는데, 갑자기 그가 제 옆에 서더니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는 것이 아닌가.
그의 행동에 놀랐던 것도 풀어진 듯 영애들이 어머어머 하며 그를 반짝이는 눈동자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저 마음 이해하니까. 이 남자가 얼마나 잘생겼는지는 나도 잘 아는 거니까 이해해 줘야겠지.
“잠시 실례하겠소, 영애들.”
“벼, 벼, 별말씀을요……!”
이런 상황에서도 입이 먼저 움직이는 라다가 대답을 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에게 눈을 잠깐 맞췄던 카일러는 제 옆에 선 사샤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라다가 눈이 빠질 듯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것은 당연히 모른 채로.
“내가 나가 있느라 파티 준비에 도움을 주지 못했군.”
“아, 그…… 공작님께선 바쁘시니까 괜찮아요.”
그래도 왜 함부로 파티를 여는지, 저들은 믿을 만한 가문의 믿을 만한 영애들인지 따지지 않아서 속으로 안도했다. 열심히 만들어 낸 자연스러운 미소에 저들이 속아 주길 바라며, 이 남자를 바깥으로 끌어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카일러.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잖나.”
이번만큼은 사샤도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입이 떡 벌어져 어버버 하는 사샤를 그는 그윽한 눈으로 내려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보여도 괜찮은 건가? 아, 자신이 선택한 결혼이라는 것을 보여야 하는 거구나!
사샤는 아까 획득한 정보를 통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좋지도 않은 머리 회전시키려니 살짝 뻐근해지는 느낌이었다.
“그건 시간을 좀 주세요, 카일러…… 공작님.”
하지만 그에 대해 반응하는 것은 굳이 꾸밀 필요가 없었다. 그가 이름으로 부르라고 한 것도 진실이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기가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진 것도 사실이니까.
영애들은 이제 약간 충격을 받은 것 같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걸지 못하고 그렇게 보고만 있으려니 카일러가 슥 시선을 돌려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와서 부인의 말동무를 해 주어서 고맙다. 부족한 게 있으면 말하라.”
딱딱하기 그지없는 말인데도 영애들은 네, 네! 하며 환하게 대답했다.
발랄한 그녀들을 두고 카일러는 유유히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 영애들이 움찔움찔했지만 일어나지는 못하고, 아주 적당히 보이지 않는 높이까지 자란 회양목 너머만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공작부인께선 아팠던 건 이제 다 나으신 거예요?”
그때 피콜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샤는 순간 엘리나와 그녀를 감싸던 후작부인이 떠올라 눈매가 날카롭게 굳어 버렸다. 질문을 한 피콜라가 흠칫 놀랄 만한 얼굴이었다.
“아프지 않아요. 여러분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어요.”
예전부터 그랬다는 말을 하고 싶은 마음에 말이 묘하게 나가 버렸다. 하지만 너무 아파서 알리지도 못 했다는 이베른 후작의 주장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말이었다.
순간적으로 지나간 그녀의 표정 또한 영애의 기억에서 자연스럽게 밀려났다.
“이젠 다 나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저희랑 번화가에도 나가 보고 해요!”
“다음엔 저희 집으로 초대해도 될까요? 저희 부모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해맑은 영애들은 그저 그녀가 아프지 않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참 성심이 좋은 영애들인 것 같았다.
“자,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볼까요? 아무리 다 나으셨다지만, 그래도 체력이 그만큼 좋으시진 않을 거예요.”
로즈힐이 꺼낸 말에 또 다들 종알종알 동조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또래들과의 평온한 수다는 원래도 익숙지 않았던 부분이라 조금 피곤한 감이 있었다.
“오늘 이렇게 와 주어서 고마워요. 부족한 부분이 많았을 텐데.”
마차들이 줄지어 선 공작저의 정문 앞에서 사샤는 영애들을 앞에 두고 배웅하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 집사와 하녀장, 그리고 하녀들이 모두 나와 정렬하여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이그노트의 위엄 있는 배웅을 받는 듯한 느낌이 나서 영애들은 그것에 또 가슴이 두근거렸다. 몇 안 되는 고용인들이었지만 그 배경이 배경인 데다 하녀장과 집사까지 거의 귀족처럼 기품이 있어서 더더욱 그 위엄이 더해졌다.
“아니에요!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그노트에 초대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영광이에요.”
“다음……에도 함께하면 좋겠어요.”
수줍게 각자의 인사를 더한 영애들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마차에 올랐다. 그들이 모두 떠나갈 때까지 자리를 지킨 사샤는 그제야 꼿꼿하게 유지하던 어깨를 훅 떨어뜨리며 땅이 꺼져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하셨어요, 사샤 님.”
“흐아…… 영애들은 초대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네요.”
예쁘게 웃으려 노력하고 최대한 차분하게 대처하려 애쓰던 사샤의 풀어진 모습에 로제가 약간의 미소를 비쳤다.
이그노트 공작저에 초대받았다는 걸로 들떠서 새들처럼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기 바쁜 영애들과 별다를 것 없는 나이의 영애처럼 보이는 자신들의 주인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진 것이다.
“실수한 거는 없었나요?”
“아니요. 없었습니다. 잘하셨어요. 음…….”
다음에는 좀 더 그 또래처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어도 된다고 말하려다가 그것은 다시 속으로 삼켜 버렸다. 그들의 진짜 주인, 카일러의 입장이 어떠한지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기 때문에.
로제가 보기에 그들의 주인은 이 안주인에게 꽤나 애정을 보이고 있었다.
전 공작 내외가 그렇게 한꺼번에 돌아가시고 나서는, 본래도 사교적이지 못했던 성격에 더더욱 제 안으로 파고들어 버렸다.
그나마 그런 그를 끌어 올린 것은, 그들의 주인은 내면으로 파고들게 만든 그 ‘특이한 점’을 ‘장점’으로 만들어 준 황제였다.
그렇다고 그가 바로 외향적인 사람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특이한 부분을 능력으로써 쓸 수 있다는 점이 그를 버티게 했다고 느꼈다.
그 부분은 파반도 공감하는 것이었다.
“사샤 님, 들어가시죠. 공작님께서 저녁을 함께할 수 있는지 여쭤 보셨습니다.”
파반의 부드러운 안내에 사샤는 다시 몸을 세워 똑바르게 걷기 시작했다.
“공작님 오셨으니 당연히 함께 먹어야죠. 점심 생각보다 많이 못 먹어서 금방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마구 재잘대거나 밝은 톤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분명히 이 사람이 공작저에 들어온 이후로 서서히, 그러나 명확하게 변화가 시작된 것 같았다.
처음 마차를 타고 그들의 주인과 함께 공작저에 도착했을 때의 그녀를 회상해 보자면 지금의 모습은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파서 그동안 바깥에 내보이지도 못하고 심지어 첫째 딸이 따로 있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는 후작의 변명을 전해 들었을 때는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다른 데가 아픈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주변의 눈치를 보며 작은 기척에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아, 정신적인 문제 다음으로 혹시 학대를 받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었다.
아무튼 무언가 문제가 있어도 분명히 있을 것 같은 음울하고, 심각할 때의 주인보다도 더 심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좋아 보이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순간적으로 다른 사람처럼 확 변화했다.
결혼식 날 도망가겠다고 열심히 달리다 잡혀 왔다는 그녀를 보는데, 그 눈빛에서 뭔가가 달라졌다는 게 느껴졌다.
변화한 그녀는 바깥에 한번 일하러 나가면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주인을 사흘에 한 번씩 집으로 돌아오게 만들었고, 카일러에게서 다정하게 여자를 대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 주게 했다.
존재만으로도 이미 온 저택을 휘젓고 다녀 고용인들에게 일할 거리를 주었고, 그래 놓고 그들을 아래에 두고 부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샤 님! 정리는 저희들이 할 테니 공작님께로……!”
“어? 너희 네 명이니까 나까지 하면 한 번에 들고 들어올 수 있는데, 왜?”
……부려야 할 때는 부릴 줄도 알아야 하는데.
아무튼 아직까지는 그녀가 공작저에 아주 긍정적인 것들만 가져온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분명히 앞으로도 많은 것을 바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샤 님, 정리는 제게 맡기시고 공작님께로 가 보세요. 기다리고 계시지 않을까요?”
사샤는 티 테이블로 가는 하녀들을 굳이 따라가서는 제몫의 찻잔들을 챙겨 들고 있었다. 그냥 다른 하녀들이 하게 두면 되는데 간혹 저렇게 할 일이 없다는 핑계로 하녀들의 손을 거들어 준다고 나서기도 했다.
서둘러 그녀의 곁으로 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뺏어 오자 그녀는 약간 붉어진 볼로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도 주인의 앞에서 꽤나 달라지는 모습을 보였다.
처음엔 아까 그 영애들처럼 잘생긴 주인을 보고 놀라고 넋을 놓고 보곤 했지만 갈수록 미묘해지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었다.
흐뭇하게 바라보는 로제의 뒤로 하녀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