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악마요?”
에이, 그렇게까지…… 하고 말하려던 사샤는 다른 영애들이 누구도 거기에 반박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조심하던 그녀들의 분위기가 생각보다 진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분이 정말 제일 무서운 분이에요. 평소에는 굉장히 사람도 좋고 웃는 얼굴도 멋있으시고, 제국에서 두 번째로 인기 많은 분이시지만요…… 정치를 하는 황제 폐하는 완벽하게 무서운 분이에요. 반란의 시초까지 뿌리 뽑기 위해서 백방으로 기사단을 보내 반란의 기색만 있으면 모두 처단해 버려요. 일으킨 것만 죄로 묻지 않거든요.”
어쩌면 그게 당연한 것임에도 그는 그게 끝이 아닌 듯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저희가 느끼기에 제일 무섭다 했던 것은…… 위협은 되지만 함부로 없앨 수 없는 메딜란 공작 가문을 손안에 두기 위해 그 딸을 황후로 들였다는 거였어요. 그 메딜란 공작의 고집에…… 모친을 잃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의 무리가 메딜란 공작의 영지를 지나 수도로 쳐들어올 때의 일이었다. 선대가 메딜란에게 지원을 먼저 보내 주면 후에 무역협정에 대해 재고하겠다, 제안했던 것을 메딜란은 무시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반란 무리들과의 싸움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그 틈에 활을 맞은 전 황후께서 돌아가셨다고…….
남자들이야 그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하는 면이 컸지만, 여인들은 원수 집안의 딸을 정치적인 이유로 황후로 들인 것을 안타까워하는 한편 무서워했다.
황후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라다 영애가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녀는 사샤의 얼굴을 살피며 로즈힐의 말을 이어받았다.
“심지어 황후가 다른 마음을 품어 버린 거예요. 그것도 제국 최고의 가문 이그노트의 공작님에게요. 사실 그렇게 되면 황후든 공작님이든 큰 벌을 받거나 쫓겨나야 하는 것인데 그것을 황후에게 지울 수도, 공작님에게 지울 수도 없었던 황제 폐하께선 공작님에게 결혼을 명령하셨어요.”
아아…… 그에게도 급히 결혼해야 하는 배경 같은 게 있었구나. 하지만 그게 계약을 걸 정도의 일은 아닐 것이었다. 단순히 그녀의 안전을 위한 것이었을까. 살짝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 같은 피로감에 부딪쳤다.
“그거 정말 너무하신 것 같아요. 다른 가문도 아니고 이그노트에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죠.”
“이그노트에요? 뭐 큰 빚을 졌나요?”
라다와 로즈힐은 역시나 기대했던 대로 엄청난 정보통이었다. 어디에서 저런 이야기들을 듣고 오는지를 모르겠지만 사샤가 원했던 딱 그만큼의 역할을 잘해 주고 있었다.
“이그노트는 오랜 역사 동안 황가의 사람들과 굉장히 친밀하게 지내온 가문이었어요. 동성끼리는 우정을, 이성끼리는 내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는 가문이었는데……. 특히 최근 공작님께선 나서서 반란군도 처리해 주시고 마물도 처리해 주시는 걸요.”
“리디안 황제 폐하와 카일러 공작님도 마찬가지였어요. 두 분 나이도 비슷하셔서 엄청 막역지우로 자라셨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공작님께 강제로 결혼을 하도록 종용하시나니 정말 너무하셨어요.”
“그건 온 제국의 영애들에게도 엄청난 손실이거든요.”
그녀들은 제 것이 아니었음에도 진심으로 슬퍼했다. 뭐라더라…… 이럴 때 쓰는 말이 있었는데, 공공재? 아무래도 카일러는 이곳에서 공공재 같은 남자였던 모양이다.
황제와 카일러가 쌓아 온 지난날들이 여자 하나로 한순간에 무너질 뻔했다. 하지만 카일러는 황제의 요구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강제 결혼이라니…… 정략결혼은 적어도 누구랑 결혼하게 된다는 걸 알고 자라기라도 하지, 마른하늘의 날벼락 아니었을까요?”
피콜라 영애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탄식하자 모든 이들이 고개를 막 끄덕여 대며 공감해 주었다.
미디에나의 입장에서는 혼자 있는 그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던 걸 텐데, 갑자기 부인이라고 나타난 날 눈엣가시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럼 내가 많은 미움을 받고 있겠네요.”
사샤는 멋쩍은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영애들은 또 특유의 멋쩍은 웃음소리를 내며 급기야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엄…… 좀 더 여러 가지 반응이 있게 마련인데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무턱대고 싫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더라고요. 결국은 공작님께서 선택한 사람이라는 뜻이니까요.”
결국은 공작님이 선택한 사람.
다행히 영애들에게 카일러는 애정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연예인처럼, 온갖 애정을 쏟고는 있지만, 결국 곁에 올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는 그런 존재 말이다.
이야기가 사샤에게로까지 이어지자 앞에 앉은 영애들은 멋쩍게 웃으면서 대답하느라 바빴다.
점차 황태자와 저에 대한 이야기가 돌아가고 카일러와 관련해서도 소문이 무성하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제가 있기에는 많이 버거운 자리라는 거 들어서 알고 있어요. 너무 완벽한 카일러 공작님을 보필하기에 부족한 사람일지는 모르겠지만…… 공작부인으로 서 부끄럽지 않게 잘해 보려고 해요.”
“저희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로즈힐이 은근슬쩍 걱정을 내밀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내놓았던 걱정들을 맘씨 고운 영애들은 예쁜 말들로 감싸 주었다.
“카일러 공작님은 원래 사샤 부인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렇게 흠모해 마지않는 황후 폐하가 그냥 메딜란의 공작 영애가 되신다 하더라도 공작부인의 자리를 꿰찰 수 있었을까요?”
은근한 질문으로 되돌린 그녀의 말에 아무도 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황후라는 사람은 가문도 좋고 하니까…… 이어질 수도 있었던 거 아닐까?
“황후 폐하는 어째서…….”
“그분이 화려한 걸 싫어하실 거예요. 정확하게는 아무리 꾸민다 한들, 그분 눈에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황후 폐하와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되었는데 전쟁을 완전히 쉽게 생각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대신에 공작님께서는 오히려 평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화려한 것들보다는 오히려 심정이 아름다운 분이 어울릴 거 같다고 생각했었어요.”
식사가 전부 마무리가 되자 하녀들이 들어와 자리를 모두 정리해 주었다. 깨끗해진 테이블 앞에서 각각 입을 다물고 입 주변을 정리하고 있는 사이에 로제가 다가와 사샤에게 귓속말을 하고 옆에서 곧은 자세로 섰다.
로제의 등장에는 확실히 그녀들이 긴장하는 게 있었다. 우아한 귀족 부인 같은 자태와 행동거지에 그녀들은 마치 로제를 자신의 친엄마나 가정 교사 정도로 생각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여러분, 차와 디저트는 저희 뒷마당에 마련해 두었는데, 그쪽으로 가시는 건 어떤가요?”
로제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달하자 모두들 밝게 웃으며 동의해 주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영애들을 데리고 식당을 나서 뒷문으로 향했다.
회양목 울타리 바깥쪽의 아늑한 잔디밭 위로 어여쁜 티 파티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자신이 아끼는 장소에 친구들을 초대했다는 생각에 미묘한 감정이 일었다.
하얀 식탁보가 바람에 너울거리는 테이블 위에는 굉장히 유행하고 있는 꽃무늬의 티 웨어가 자리하고 있었고, 중간중간 무심한 듯 등나무 꽃송이가 마치 테이블 위에서 티 웨어가 된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주변으로도 예쁜 랜턴이나 소품들을 놓아 소녀들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그 공간에서 벌떡 한 인영이 일어났다.
코니는 잠깐 아픈 발을 주무르기 위해서 앉아 있다가 인기척에 화들짝 놀란 참이었다. 실수하지 마, 실수하지 마…….
“어서 오십시오. 맛있는 차를 올려 드리겠습니다.”
코니는 떨리려는 목소리를 부여잡고 가까이에 다가온 영애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어머 목소리가 고운 하녀네.”
“가, 감사합니다.”
가까이에서 있었던 라다의 칭찬에 기어이 말을 더듬고 말았지만 그녀는 얼른 목을 가다듬은 뒤, 사샤가 자리를 잡고 앉자 바로 찻잔에 차를 따라 주기 시작했다.
“어머 이 공간은 뭔가요? 너무 아름답네요!”
푸른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단지 그것뿐인데 너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분명 바로 앞에는 공작저의 건물이 있지만 꼭 멀리 아름다운 풀밭으로 나온 듯했다.
“전 공작부인께서 아끼던 공간이라고 하더라고요. 연회도 자주 열고 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제가…… 아직 많은 영애들을 초대할 만한 깜냥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영애분들과 함께 즐겁고 편안하게 나누는 시간이 많이 있으면 정말 고마울 것 같아서 초대하게 됐어요.”
그녀가 진심을 담아서 이야기하자 또 다들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녀에게 혼이 나가 바라보고 있었다.
“깜냥이 안 되시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이렇게나 아름다우신 데다 성품까지 인자하시니, 공작님께서 반하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아, 어머…… 카일러가 제게 반했다고 소문이라도 났나요?”
사샤는 이때 일부러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직 침대에서만 한번 불러 본 이름이라 그때 이후로는 처음 해 보는 것이었는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튀어나왔지만 막상 말하고 나니 쑥스러운’ 연기는 스스로가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의도대로, 소녀들은 화들짝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 고, 고…… 공작님을 이름으로 부르시나요?”
라다의 직접적인 질문에 사샤는 얼굴에 열이 오른다는 듯이 양손으로 볼을 감쌌다.
“어머…… 제가 그랬나요, 다들 있는 앞에서 창피한 일을 했네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창피라니요! 다들 신기해서 그런 겁니다! 공작께서 사람들과 많이 내외하시는 스타일이다 보니 그분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 있는 사람들이 많이 드물거든요.”
“맞아요. 인사라도 한마디 들어 보고 싶어서 파티장에 도착하면 꼭 그분 앞으로 갔었는데, 아직도…… 아무런 말도 들어 보지 못했어요.”
장난으로 우는 척 눈가를 찍어 내는 라다를 보며 다른 이들이 모두 위로의 한마디씩을 던졌다. 아마 실제로 받은 상처를 이런 식으로 태연하게 모두가 공감하는 일이라는 핑계로 넘기고 있는 거라고 생각되었다.
정말…… 죄 많은 남자가 따로 없다.
이렇게나 인기가 많은 남자를 제가 데리고 살아도 되는 걸까, 좋아해도…… 되는 걸까.
“무섭다는 말을 자주 듣는 모양이던데…… 사실 제게는 너무 다정하신 분이어서요. 이름도 저는 부르지 못하고 있었던 걸 불러 달라고 하셔서 입에 익히는 중이에요.”
어머~ 하는 감탄사가 마구 튀어나왔다.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그녀들의 부러움 속에 부정적인 감정이 없다는 것부터 확인했다. 이런 일에 질투를 보이는 사람이라면 경계를 해야 옳았다.
그나저나 그가 돌아오면 정말로 이름으로 불러 줘야 하는 진지한 고민 하나는 남아 버렸다.
“여기 있었군, 사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녀의 어깨가 움찔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