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도서관은 역시 그녀가 오랫동안 동경하기도 하고 오랜 시간을 보낸 익숙한 공간이었기 때문인지 금방 이곳에서 익숙해져 버렸다.
로제가 도서관을 안내해 준 지 이틀째, 오늘도 사샤는 도서관에 앉아 책을 내리 읽고 있었다.
“이곳 문자 읽을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이곳에 와서 걱정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글이었다. 말은 통해서 좋은데…… 설마 글자를 읽을 수 없었다면 정말 너무너무 큰일인 것이었다. 글자부터 차근차근 끝내야만 하는 엄청난 숙제가 던져진 셈이니까.
하지만 처음 그들의 문자를 접했을 때 참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던 그녀의 모습을 보던 로제도 눈을 가늘게 뜨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샤는 지금 지식의 습득과 더불어 그녀의 눈물샘을 자극해 버린 것 같았다.
시간을 유용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에 대해 감탄하며 계속해서 시간을 보냈다.
“아가씨? 그래도요…… 드레스는 또 맞추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오늘도 영락없는 로제가 나타나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드레스 마니아인 로제는 사샤가 며칠 뒤의 파티를 위해 어울릴 만한 드레스가 필요하다면서 전전긍긍 매달리고 있었다.
“드레스가 뭐가 그렇게 필요해. 저번에 입었던 것도 예뻤고, 그 외에도 집에 있던 거 되게 많았는데? 주인이 따로 있어서 입으면 안 되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됐네?”
드레스를 설득할 수가 없다면 하나를 고르는 최종만 하겠다고 그녀를 부른 것이었다.
로제는 여전히 책에 파묻혀 있는 그녀의 뒷모습에 인사를 건네고는 바로 실력 있는 자들이 가장 보았다는 기본 검술 입문서를 꺼내는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사샤 님, 이제 파티를 위해 실제로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지는 시일입니다. 아마 내일부터 이틀 동안은 그 부분 최종 점검이 필요할 것입니다.”
도대체 무얼 어떻게 준비했기에 확인만 이틀이라는 말일까. 사샤는 놀란 얼굴로 그것을 들여다보기로 결정했다.
“초대장에 대한 답장은?”
“물론 모두에게서 돌아왔습니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로제는 단호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 단호함이 마치 자신의 파티를 성공적으로 열 수 있도록 그녀들이 한데 모여 힘을 합친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조금,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드레스는…… 평소 즐겨 입으시는 걸로 준비했습니다.”
“잘했어. ……쿡, 드레스 정말 좋아하는구나.”
로제를 바라보면서 역시 인생, 혼자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살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부디 얻을 수 있는 게 많은 모임이기를……. 그녀는 그러게 말하며 드레스의 ‘드’만 나올 때마다 이렇게 아쉬운 표정을 감추질 못하는 것이었다.
“이번 파티 끝나면 보답할게. 다들 애써 준 거니까 자그마한 실수도 없이 잘 해냈으면 좋겠어. 끝까지 잘 부탁할게.”
드레스로 침울해 있는 로제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에게 예쁜 외출복을 선물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로제도 기쁘게 받아 줄까?
“예, 그럼. 이따 점심시간 때는 꼭 내려오십시오. 이러다 몸에 살이라도 내리면 안 되는 거 아시죠? 눈에 띄게 핼쑥해지시는 순간 저희는 모두 드레스 수선에 매달려야만 합니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로제가 안심한 얼굴로 사라졌다. 애초에 밥 굶는 건 내가 싫어해서 살찔 걸 조심해야 할 텐데…….
준비는 순조로웠다. 시간은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지나갔다.
*
일주일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 탓에 사샤는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편지 복습할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그사이 파티 준비는 원활하게 진행이 되었다. 그동안 파티를 하고 싶어 했던 하녀들의 염원(?)이 담긴지라 작은 모임 정도를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본격적인 파티가 되고 말았다.
드디어 파티 당일이 다가왔다.
영애들은 지금 진짜 애정을 담은 눈으로 사샤가 들인 테이블과 의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 정말~ 이 의자 좀 보세요! 요즘 유행하는 유니의 스타일이에요!”
“어머, 나도 그거부터 봐 버렸잖아. 세상에 영롱하여라……. 색감 이번에도 너무 예쁘게 나오지 않았니?”
“그게 유니의 핵심이잖아. 이번 색감에 자부심 느낀다 하더니만 역시나 결과물이 말해 주네.”
파티 당일, 응접실로 모인 이들은, 소파 공간 너머 별도로 마련된 회의 테이블에 제일 먼저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보통 남자들의 회의 테이블이라고 하면 장식이 화려하지만 원형 혹은 정사각형, 같은 정형화된 모양이 있었지만 지금 이곳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디자인의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확 눈에 보이는 것으로 앞도하기 위해 사샤가 며칠의 고심 끝에 결정한 물건이었다. 다행히 그녀가 준비한 것들이 그녀들을 고양시켰다. 어딜 가나 어린 영애들은 눈에 화려한 것이 예뻐 보이니까.
대화가 즐겁게 오가자 이그노트 공작저에 왔다는 긴장감을 떨치고 잘 따라오는 그네들을 데리고 먼저 식당으로 향했다.
“맛있게 많이들 먹어요.”
수줍은 듯이 웃으며 그렇게 말을 하자 자리에 모인 영애들은 그녀를 따라 볼을 씰룩 올린 채로 걸어갔다. 음식이 모두 서빙되자 사샤는 웃으면서 그녀들을 둘러보았다.
“정말! 음식도 어쩜 이렇게 맛있나요? 호호.”
대화는 역시 라다와 로즈힐이 이어 가고 있었다. 다른 영애들은 맞아요, 맞아요, 한다거나 다 함께 꺄르르 웃는 것으로 대화에 참여하면서 사샤의 눈에 들기를 바라는 듯이 보였다.
“다들 편안하게 즐겨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공작저는 오랫동안 파티를 연 적이 없어서 모두들 손님을 접대하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영 초조해 가지고요. 아직 시작이지만…… 계속해서 만족해 주시는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에요.”
사샤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우선 호의적인 사람들만 모여 있는 자리라 먼저 그녀는 웃으면서 그녀들을 관찰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언제는 쉬운 일이 있었던가.
“사교 모임 때 부인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야기한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분이시라고요.”
그렇지그렇지, 로즈힐의 말에 모두들 감탄하듯이 그렇게 동조의 말을 꺼냈다. 사샤는 그네들을 냉철하게 살펴보던 중이었지만 그런 말에 볼을 붉히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요. 보니까 정말 아름다운 분들이 많이 계시던걸요. 지금 여기 오신 여러분들도 정말…… 뭔가 특별히 관리라도 받으시는 건가요? 저도 좀 알고 싶어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들에게 하나하나 눈을 맞추자 요란스럽게 그녀를 칭찬하던 이들도 볼을 붉히며 수줍어했다. 예쁘다는 말에 역시 장사 없는 법인가 보다.
손부채질을 하며 그런 거 없다고 손을 내젓는 소녀들이 귀여워 보였다.
“이런 자리가 생길 거라고 예상들은 했지만 이렇게 빠를 줄도 몰랐고…… 제가 올지도 몰랐어요.”
아이시 영애는 옅은 밀색 머리카락을 살짝살짝 잡아당기며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이 영애는 말이 많지 않고 매우 수줍어 보였지만 행동거지가 너무 얌전하고 예뻐서 눈여겨보았던 친구였다.
“아이시 영애께서 제가 길을 몰라 헤매고 있을 때 안내해 주셨잖아요. 그때 너무 감사했어요. 저 말고도 몇 명 영애의 도움을 받는 걸 보았답니다.”
그녀는 나이가 살짝 있는 편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주변을 잘 챙기는 편이었다. 어째서 혼인을 못 하고 아직 영애인 채인지 잘 모를 정도로 심성이 고와 보였기 때문에 기억에 남아 있었다.
“정말! 그걸 어떻게 보고 계셨어요? 아이시 영애 착한 건 정말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가지고 이용하는 나쁜 사람들이 있는 게 문제죠!”
라다가 제 일인 양 격하게 공감하며 말을 꺼냈다. 아이시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지만 옆에서 그녀를 계속해서 칭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호호호 하는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식당에서 식사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제가 굳이 끼어들지 않아도 라다와 로즈힐의 주도하에 수다가 완벽하게 무르익었다.
밥 먹으면서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운 아가씨들이었다. 밥 먹는 도중이라 그런지 주로 기분 좋은 칭찬이나 축하할 만한 경사가 있는 집안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수다였다.
심지어 이런 쪽에서는 예상할 수 없었을 만큼 좋은 정보들도 얻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카일러에 굉장히 우호적인 가문이 어디어디인지, 황제 폐하가 어떤 분이신지.
“꺄아, 정말. 황제 폐하는 어쩜 그렇게 웃는 모습이 멋있으신지 모르겠어요.”
“맞아! 세상에 그렇게 무서운 분이 없는데, 미소는 진짜…… 카일러 공작님만큼이나 너무 멋있으시지…….”
사샤는 그녀가 만나고 온 황제를 떠올렸다. 항상 웃고 있는 얼굴에 카일러에게도 무척이나 호의적인 사람이었다.
카일러도 자신의 보고를 위해 입궁하면서도 그녀를 데리고 들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소개해 줄 만큼이었기 때문에 그가 무서운 사람일 거라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황후를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은 잠깐 했었지만.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무서운 분인가요?”
사샤가 조심스럽게 그 부분을 짚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제국의 황제이면서 유일하게 카일러의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질문에 네 명의 영애는 서로 눈치를 보았다. 좋은 이야기를 해야 할지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도 될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그때 아까 무섭다는 말을 무심코 꺼낸 로즈힐이 책임이라도 지겠다는 양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분의 미소에 속으면 안 돼요. 그 안에는 엄청난…… 악마가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