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어…… 로제? 그렇게 막 본격적일 필요는 없는데……?
“음, 아직 그렇게 본격적이면 안 될…… 것 같은데?”
불타오르던 로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사샤를 바라보았다. 공작부인의 주최로 파티를 여는데 그 정도도 안 한다는 건가? 하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누구를 가까이하고 누구를 멀리할지 판단하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대대적으로 알려 버리면, 이그노트 공작부인의 첫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들이라고 으스대고 다니지 않겠어?”
이 이름은 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이그노트를 걸 때엔 그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이어야만 했다.
그녀의 조심성 있는 태도에 로제는 입술을 알게 모르게 씰룩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밖으로 소문이 새는 것은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 알고 있지. 아주 간단하게 사교 모임 때 이야기 나눴던 영애들만 몇 초대할 거야. 사교 모임 끝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담소나 나누자는 식으로.”
“예, 지금 초대장 작성하실 거 준비할까요?”
로제도 생각보다 굉장히 저돌적인 사람이었다. 혹은 다른 어린 하녀들처럼 파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세계 여인들은 주최하는 측이든 준비하는 측이든 파티를 이렇게나 좋아하는 것일까. 세상 피곤해 보이던 일인데, 그래도 흔쾌히 준비를 도와주겠다니 다행한 일이었다.
“파티도 크게 준비할 거 없어. 공작님 안 계신 틈에 빠르게 해치워 버리자고.”
파티를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성대하게 할 것도 없었다.
“조금씩 데려와서 제대로 확인을 해 보는 자리로 활용하시겠다는 거죠? 잘 이해했습니다.”
“음. 아주 정확해요. 너무 호화롭게 잘 준비하면 대접해 준다는 느낌 들 거 같으니까…… 어렵겠지만 적당히 준비해 줘야겠어.”
다시 눈을 지그시 감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샤를 보며 로제는 솔직히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어떤 가문이 득이 될지, 어느 영애, 혹은 부인이 도움을 줄지에 대해서는 모임 전에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 전부였다. 그것도 대략적인 가문의 분위기를 말했을 뿐이었기 때문에 그 안의 여인들이 어떤지는 별도의 판단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모르는 게 많은 영애니까 도움을 많이 줘야 한다는 카일러 공작의 말대로 그녀는 예법이나 주요 고위 귀족들의 이름 심지어 황제 폐하도 잘 모르는 여인이었다.
사실 그걸 알았을 때만 해도 완전히 아이를 가르치는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해 로제는 피곤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생각 이상의 지성을 보여 주었다.
눈치가 좋은 것일까.
스콘을 한입 물고는 눈을 감고 씹고 있는 모습만 봐서는 평온하기만 한데, 어쩌면 저 안에서는 치열한 몸부림이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닐까.
보이는 만큼 생각 없이 유유자적하는 한량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로제였다. 아마 그걸 눈치챈 것은 카일러와 로제 정도일 것이다.
“그럼 지금 바로 가서 초대장 작성 준비를 하겠습니다.”
“아아, 가는 길에 같이 가.”
한껏 기대 있던 몸을 일으키고는 사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냥 같이 가려나 보다 하고 기다리고 있던 로제는 트레이에 찻잔과 주전자, 스콘을 담았던 접시 등등을 챙기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 그, 그건 두세요. 제가 들고 나가겠습니다.”
“거기 남아 있는 거 들고 와. 이거 무겁지도 않아.”
“아니, 아닙니다, 그걸 제가…….”
당황한 로제가 테이블과 사샤의 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사샤는 쌩하니 저택으로 걸어가 버렸다. 가벼운 옷에 발걸음도 가벼우니 타이밍을 놓친 로제가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가끔 저렇게…… 계급을 신경 쓰지 않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한미한 가문이라 일을 하며 산 영애도 아니고, 이베른 후작가의 영애인데, 정말 어느 산속에서 살다 온 사람인 것처럼…….
“기다리세요, 사샤 님!”
테이블 위에 남은 것이 없는 걸 뒤늦게 확인한 로제가 서둘러 그녀의 뒤를 쫓았다.
*
파티는 딱 일주일 뒤에 열기로 정했다. 카일러가 저택에 없는 동안 해치우고 싶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빠른 일정으로 정했다.
“라다와 로즈힐, 그리고 아이시, 피콜라 영애. 이렇게 네 명만 초대했어.”
이름으로만 불러서 로제가 바로 알아차리진 못했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가문의 조합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 사교 모임에서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런 초대의 조합을 찾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처음부터 괜찮은 인물들로 시작되는 이 모임이 앞으로도 유지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작님은…… 한 번 나가시면 얼마나 걸릴지 예측할 수는 없는 거지?”
초대장을 보내고 난 다음 날, 역시 카일러에게서는 소식 한 자락도 오지 않는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공작저의 고용인들에게는 익숙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 부분인 모양이었다.
“사샤 님 처음 오셨을 때는 자주 돌아오시는 편이었습니다. 보통 한 번 나가시면 2~3주 동안 안 계시고, 길 때는 한 달도 걸립니다.”
그게 자주 돌아오는 것이었다니…….
그러고 보니 그땐 돌아올 때마다 그녀를 안고 바로 다음 날이면 사라져서, 제가 그런 관계만을 위해 팔려 온 느낌을 받았었다. 결혼식 날에 계약이라는 단어를 듣고 그와 제가 마주 보는 유일한 시간이 어둠 속 침대 위였으니까……. 혼돈 속의 사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오해였다.
“공작님 안 계실 때 해치우면 좋겠다 생각하기는 했지만…… 집을 두고 바깥으로 돌아다니면서 일하는 게 정말 힘들겠네.”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기에……. 온 대륙을 누비면서 다니는 것일까. 그럼 그땐 어떻게 사흘마다 한 번씩 왔던 걸까.
그에 대한 걱정을 쌓기 시작하자 난데없이 그가 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무심하고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도 제게 다정한 남자로 기억된 희한한 사람. 사샤는 그를 생각하다가 문득 소파에서 일어났다.
응접실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과일을 깎아 내온 채 대화를 나누고 있던 로제는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제. 공작저에도 도서관이 있나? 음…… 서재라고 해야 하나, 책이 많이 있어서 읽을 수 있는 곳.”
“도서관…… 있습니다. 서재는 공작님의 개인 공간이라, 도서관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사샤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제는 바로 그녀의 앞에 서서 그녀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코니가 아까 응접실에 있던 과일을 들고 제일 뒤에서 따라왔다.
그 영애들을 만나는 것도 정보를 알기 위해서였지만 그렇게 받아들이는 정보들은 기반이 없으면 휩쓸려 다니기 일쑤니까. 적어도 기본이 되는 건 필요했다.
로제가 사교 모임 전 알려 줬던 내용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로제를 계속 붙들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때마다 책을 좀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이그노트 공작 가문은 역사가 있다고 하더니 역시나 어마어마한 장서를 가지고 있었다. 커다란 양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복층으로 이루어진 공간이 나타났다.
여기는 그의 침실보다도 크고, 다른 이들이 모여 회의가 이루어지는 집무실보다도 훨씬 그 크기가 큰 것 같았다.
“와…….”
주변을 돌아보는 사샤의 다갈색 눈동자가 마치 빛을 받은 듯이 반짝였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던 로제와 코니가 서로 눈길을 주고받을 만큼 그녀는 도서관에 진심으로 감동이라도 받은 듯했다.
“아, 큼,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볼 수 있으니까 나가서 일 봐도 돼.”
눈을 떼지 못할 정도인지 사샤가 도서관의 높은 서가를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럼, 사샤 님.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저희는 먼저 나가 있겠습니다.”
“이런 걸 좋아하시는 줄 몰랐어요! 진작 알려 드릴걸! 저기 저쪽에 보시면 문학 작품이 있거든요 거기 소설에…….”
“자, 자, 코니. 사샤 님, 그럼 저흰 나가겠습니다.”
“응.”
이쪽을 돌아보지 않는 사샤의 뒷모습에 대고 두 여인은 인사를 깍듯하게 남긴 뒤에 도서관을 나섰다.
“저기가 엄청 좋으신가 봐요. ……책이 왜 좋지?”
코니가 알 수 없다는 듯이 말하는 것을 들으며 로제는 살짝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배움에 목이 말랐던 아이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로제의 걱정대로 사샤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사실 그녀도 잘 몰랐다. 제 안에 이렇게 배움에 대한 열정 같은 게 있었는지도 몰랐다. 다만 책을 읽는 것은 조금…… 아주 조금 좋아하던 소녀였다.
학교에 가서 저 맥베스를 가지고 읽고 또 읽었던 때가 있었다. 학교에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 있어서 그거 하나는 행복했었다.
공부에 대한 욕심이 꽤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발목을 잡는 것은 다른 아이들처럼 연예인이나 게임 같은 것이 아닌 돈이었다. 특히나 공부에 집중을 해야 하는 고등학생은, 돈을 벌 수 있는 나이이기도 했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싶은 그 시간에 나가서 일을 해야 했다. 저 살 돈을 마련해 두지 못하면 공부고 학원이고……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니까.
그녀의 삶에서 언제나 최우선은 돈이었다. 저 먹을 라면 하나 끓일 수 있도록, 그리고 눈 붙일 집을 놓치지 않도록 열심히 돈을 벌었다.
어른이 되면 그나마도 유지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지금부터 외쳐야 했었다.
그 모든 상황을 두고 몸 하나만 덜렁 알 수 없는 세계에 오게 됐는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책들을 보니까 다시금 그때의 생각이 났다.
“안타깝지만 재미 위주로 볼 때는 아니지. 어디…… 역사 쪽으로 갈까.”
집안에 마련된 장서 창고쯤 돼 보이는 곳이었지만 나름 장르별로 구분이 돼 있었다. 그래서 제국의 역사에 대해 알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이다. 최신 정보다 아닌 확실하고 정확한 정보는 역시 준비된 것 읽는 것이 중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