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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33화 (33/128)

33화

“아, 의욕 떨어져.”

이곳에서 힘을 낸 이유가…… 처음엔 분명 내가 살기 위한 것이었는데, 왜 힘이 이렇게 빠지는 것일까.

그 남자가 제대로 살지 않으면 내가 살 수가 없으니까?

그런 이유는 또 달갑지가 안다. 진짜로 그날 밤의 그 남자가 걱정이 됐으니까,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막상 그의 가장 최측근 중 하나인 로제와 파반이 그의 일에 대해 이렇게 딱 잘라 버리고 나오자 순간적으로 뭔가 하고 싶어서 올라왔던 의욕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저, 사샤 님. 모임은…… 재밌으셨어요?”

사람들을 피해 있듯이 뒤 정원 회양목 뒤 벤치에 앉아서 하늘을 보고 있는데,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회양목을 빼꼼히 넘어왔다. 돌아보니 코니가 손에 간단한 티 세트를 들고는 와도 될지 어떨지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응, 별거 없었어.”

그런 그녀를 향해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함으로써 그녀가 들어올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

코니는 그런 뜻을 알았는지 살짝 수줍게 웃고는 회양목 벽을 넘어와 테이블 위에 티포트와 찻잔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 작고 부지런한 움직임을 보고 있던 사샤는 턱을 괸 채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사교 모임이 궁금했던 거니?”

차를 찻잔에 따르는 것에 집중하고 있던 코니는 질문이 들어오자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럼요. 사교 모임 가시는 주인님을 모셔 본 적이 없어서 다들 그런 거에 대해 동경을 가지고 있었어요. 혹시…… 다음 번 모임 나가실 때 저희 돌아가면서 한 명씩 데려가 주실 수 있으세요?”

코니는 정말로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데려가는 것이야 문제가 없다. 어차피 사람들과 잘 지내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참이니까.

아이가 따라 준 찻잔을 들어 올려 향을 맡는 사이에도 코니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샤는 그런 아이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향이 참 좋았다. 항상 찻잎을 적당하게 넣어 주는 거 같아 신기할 만큼 깔끔한 맛이었다.

“당분간은 사교 모임이 없을 텐데……. 음, 다른 영애를 초대하는 건, 너희들이 힘들겠지?”

왠지 영애들이 모여서 수다를 떠는 그런 모습에 로망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물어보았다.

라다와 로즈힐 외에도 그녀에게 말을 걸어 왔던 이들이 몇몇 있었다. 모두가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경계하거나 배척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들을 잘 회유해 가까운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면…… 아마 좋은 전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이 정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될지 어쩔지까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작은 도움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연회요? 공작저에서요? 우와아…….”

이 아이가 사교 모임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대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결정을 지으려면 이 아이의 말만 들어선 안 될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사실 정말로 영애들을 초대할 생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 준비를 위해 죽어날 하녀들을 위해서 그녀들에게도 의견을 물어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냉큼 대답해도 되는 거야? 준비는 너희가 다 해야 해.”

약간 미소를 짓고 그렇게 얘기를 하자 코니가 기대에 가득 찼던 얼굴을 점점 굳혔다. 하하, 하…… 웃음소리마저 사그러드는 것이, 아무래도 하녀 언니들의 반응을 예측한 듯이 보였다.

“그럼, 코니. 이렇게 하자. 정말 사교 모임을 열었으면 좋겠다 하는 거면, 새라를 데리고 와 줄래? 주방장도 함께 오면 더 좋겠다.”

“에? 네! 알겠습니다.”

특명을 들은 듯이 우렁차게 대답한 코니는 발 빠르게 뒷마당의 잔디밭을 가로질러 갔다.

통증과 잠도 못 자 몽롱했던 머리로 들은 충격적인 로제와 파반의 반응 때문에 살짝 부정적 성격이 스멀스멀 올라왔었지만, 코니를 보자 또 슬쩍 눌러졌다.

그녀들이 황후의 험담을 하기 위해 자신에게 인사를 한 것인지 아니면 그런 황후의 태도 때문에 제가 걱정이 되어 온 것인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녀들이 꽤나 정보통이고 수다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우선 지금 당장 곁에 두어도 문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내가 흘리는 이야기도 잘 전해 줄 테니까, 조심할 건 조심해야겠지.

곧 코니와 함께 새라와 주방장이 함께 이곳으로 올 터였다. 주방장은 마침 차를 즐기고 있는 공작부인에게 가져다줄 스콘을 구웠는지 그걸 한 손에 든 채로 오고 있었다.

“아, 둘 다 바쁠 텐데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해.”

그들이 가까이 와 인사를 하자 사샤가 우선 운을 뗐다. 주방장 제프는 그녀에게 눈웃음으로 인사를 하고는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정중하게 테이블로 내려놓았다.

“바쁘긴요. 사샤 님께서 자주 티타임을 가져 주셔서 제가 요즘 디저트 만드는 재미에 푹 빠졌습니다.”

제프는 약간 느끼한 듯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쌍꺼풀이 짙은 눈으로 그녀를 그윽하게 내려다보았다.

새라는 그의 인사를 지켜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코니가 말을 해 주지 않던데, 무엇 때문에 저희를 부르셨나요?”

로제를 통해 말을 전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두 사람을 부른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태연한 척하지만 새라도 제프도 그녀를 살짝 무서워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음……. 내가 이번에 사교 모임을 갔다가 말도 걸어 주고 잘해 준 영애들 생각이 나서…… 공작저에서 몇 명만 초대해 모임을 가져 볼까 하는데.”

거기까지 말하는 걸 들은 두 사람은 살짝 눈빛이 반짝였다. 어째 반응이 코니 때와 같아서 사샤는 웃음으로 어깨가 들썩였다.

“그런데 사람을 초대하면 힘들어질 거 같으니까 의견을 좀 들어 보려고 불렀어. 안 그래도 큰 공작저에 일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말이야.”

“어머! 아니에요, 사샤 님!”

사샤는 더 말을 하려던 것을 멈추고 크게 외치는 새라를 바라보았다. 다급한 그녀의 말에 어리둥절해지려는 찰나 주방장 제프가 허허 웃으면서 대답했다.

“확실히 사람을 초대한다는 것이 버거운 일이기는 하지만, 저희는 저택에 주인이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던 사람들입니다. 그나마 최근 사샤 님이 오셔서 매일매일 할 일들이 생겼습니다만…….”

“맞아요! 맨날 먼지 쌓이지도 않고 물건도 움직인 적 없는 방 쓸고 닦는 것도 재미없어요. 물론 가끔 그렇게 편하게 일하는 게 좋기도 하지만…….”

새라가 혀를 쏙 내밀며 장난스럽게 이야기하자 옆에서 코니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공작저의 크기에 비해 일하는 사람이 적어서 다들 바쁠 거라고 생각했는데, 썩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큰 가문일수록 그러한 사교 모임이나 파티까지 여는 곳들이 많은데 제국 중에서도 가장 유구한 역사와 힘을 가진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경우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주방장님께서도 아마 해 본 적 없으실걸요? 로제 님이라면 모르겠지만 저희는 전혀 구경도 해 본 적 없어요.”

새라는 이제 꼭 하고 싶다는 얼굴이 되어서 사샤를 올려다보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을 이야기해 준 그녀에게 응원의 눈빛을 보내는 듯이.

오히려 하녀들이 더 그녀에게 진행해 달라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주방장도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럼 걱정할 거 없다는 이야기지?”

“그럼요!”

“큼, 좋아. 연회 음식을 한 번씩 연습을 좀 해 봐야겠습니다.”

의욕이 넘치는 이들이 돌아가고 나자 작은 분수대 옆에서 사샤는 남은 차와 제프가 가져다준 스콘을 입에 물었다. 해 볼 만한 건 다 해 보자. 좀 더 유용한 사람이 된다면, 좀 더 믿음직한 사람이 된다면 그땐 말해 주지 않은 것도 알게 되지 않을까.

나른한 몸을 의자에 묻은 채로 스콘과 차를 번갈아 먹고 있자니 몸이 좀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한참 물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있는 사이 사박사박 잔디 밟는 소리가 뭐 굳이 귀가 밝은 기사들이 아니더라도 이 정도 발소리는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로제? 무슨 일 있어?”

근처로 걸어와 사샤가 잠이 들었는지 아닌지를 살피고 있는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흡, 하고 놀라 숨을 들이켠 그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한 템포 쉬고 나서 겨우 입을 열었다.

“사샤 님, 바깥에 오래 계신 것 같아서 걱정이 돼서 나와 봤습니다.”

“추운 날도 아닌 데, 뭐.”

“춥지는 않지만…… 햇빛이 강해서 피부 상하십니다.”

걱정된다는 듯이 말을 꺼내는 그녀의 목소리가 매우 조심스러웠다. 으음, 아까 자신의 질문에 딱 잘라 모른 척했던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로제.”

“예? 예, 사샤 님.”

역시. 이름 한번 불렀다고 당황하는 것을 보니 제가 화가 난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차가워 보여도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 작은 모임을 좀 열어 볼까 해. 사교 모임에서 만났던 영애 몇 명만 초대해 보려고.”

“모임……을요?”

로제의 말에 사샤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늘임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햇빛 덕에 부신 눈을 찡그리고는 천천히 적응하면서 눈을 떴다.

로제가 놀란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할 사람이 별로 없어서 부담될까 싶어서 아까 새라와 코니, 제프에겐 확인했는데 다들 환영하는 눈치더라고. 로제는…… 반대하는 거야?”

모임 이야기에 어느새 일하는 로제의 얼굴로 돌아온 그녀는 하녀들과 주방장에게 이미 확인을 해 보았다는 말에 살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일하는 사람을 고려해서 모임을 열 생각을 하시다니 놀랍군요.”

“고생시키면서 할 일은 아닌 거 같아서. 여기서 안 열고 내가 다니면 되니까.”

“그건 아니죠. 하려면 역시 모임을 주최하는 측이 되는 것이 좋습니다. 이그노트가 주최하는 모임이라니, 더더욱 제대로 준비해야죠.”

아까 그 하녀들의 반응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아니 오히려 더 강력한 반응을 보이는 로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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