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점심때까지 사샤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카일러는 다녀와야 한다는 말만을 남기고는 훌쩍 침대를 떠났다.
한번 나가면 짧게는 사흘, 길게는 2주 동안이나 집을 비우면서 어디로 간다거나 얼마나 걸릴 거라는 말 같은 건 전혀 없었다.
혹시나 싶지만, 그런 걸 말해 주는 게 기다리는 사람에게 좋다는 걸…… 모르는 것일까.
몸도 힘들었기 때문에 그가 떠나고도 침대에서 1시간은 더 멍 때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씻으러 들어갈 때, 움직이는 몸을 따라 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거의 반나절의 시간 동안 얽혀 있던 카일러였다. 따뜻한 물을 받아 그 안에 몸을 담그려다가 얼굴이 너무 화끈거리는 게 까딱하단 기절하겠다 싶어서 얼른 밖으로 나왔다.
미지근한 물로 씻으면서 격정적이던 시간에 대한 회상이 지나가고 그 바로 전, 침실로 들어서던 카일러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샤 님, 씻으시고 나면 늦었지만 식사하시겠어요?”
“그래. 식사를 준비해 줘.”
욕실 바깥에서 로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몸을 닦고 있던 사샤는 대답을 하고 얇은 실내용 드레스에 가운 하나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자꾸 나른해지려는 정신을 붙잡으려 하자 숨을 헐떡이며 다가오던 그가 또다시 떠올랐다.
괴로운 듯 짧은 숨을 몰아쉬며 귀를 막고 있던 그의 모습이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었다.
뭔가 괴로운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어디 아픈 곳이 있는 걸까. 그는 언제나 고독해 보였다. 저택에서야 물론 이그노트의 성을 가진 이가 혼자뿐이라 그렇다 치지만 밖으로도 봤을 때 그는 일만 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든든하게 드셔야 할 거 같아서 점심이지만 이것저것 준비해 봤어요. 많이 드세요.”
로제는 사교 모임 준비 이후 딱딱하던 말투가 꽤나 느슨해져 있었다.
공작 하나만 있는 거대 가문에서 모든 것을 통솔하기 위해서인지 로제와 집사장 파반은 연륜에서 나오는 냉철함을 항상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마 사샤에게도 처음에는 그렇게 딱딱하게 대한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공작이 직접 데려온 사람이었지만 온전히 이그노트 가문의 사람으로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었을 테니까.
“로제는 점심 먹었어?”
사샤는 빛깔 좋게 익은 소고기를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가며 그녀에게 물었다. 옆에 서서 시중 들 것이 생길까 지켜보고 있던 로제는 그녀의 말에 두 눈을 깜빡거렸다.
“아, 저 아직 점심 전입니다.”
카일러가 출타를 하는 바람에 이거저거 정비할 것이 많은 파반을 도와 일하느라고 시간을 보내 버렸다.
점심도 먹지 않고 떠난 그를 걱정하고 있던 차였는데 정작 자신도 밥을 먹지 않았다는 것은 잊고 있었다.
“내 체력 보충도 좋지만 음식 양이 많아. 와서 같이 먹어 줘.”
사샤는 눈짓으로 식탁 위를 가리켰다. 스테이크에 샐러드에 면까지 더해져 있는 식탁에는 접시만 해도 여섯 개는 돼 보였다. 은근 식탐이 있는 편이라 다 맛은 보고 싶지만 이 많은 양을 다 먹을 만큼 대식가는 아니었다.
“아닙니다, 사샤 님. 제가 어찌 감히 겸상을…….”
“내가 뭐라고, 단지 공작님의 선택으로 공작부인이 되었을 뿐인걸. 귀족이라고 같이 밥도 못 먹을 건 뭔데?”
한껏 하녀의 면모를 보이는 그녀에게 사샤는 가볍게 받아쳤다. 살짝 엄마 혹은 이모 같은 느낌이 드는 로제와 함께 밥을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먹는 밥은 언제나 좀…… 심심했으니까.
카일러와도 자주 밥을 먹는 것은 아니어서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었다. 그와 항상 붙어 있을 순 없는 일이니까 그러려니 했는데, 문득 많은 음식을 앞에 두고 혼자 먹으려니 꾸물꾸물한 기분이 되었다.
로제는 그 앞에서 많이 망설이는 듯이 보였다. 이 식탁이 2인 이상으로 채워지는 걸 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생각이 드는 순간, 그녀는 주방으로 가 자신의 몫의 접시와 포크를 들고 돌아왔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사샤는 맞은편에 자리하고 앉는 그녀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제 몫의 고기를 던 뒤 그 접시를 로제 쪽으로 내밀고, 또 샐러드 또한 제 몫만 덜고 나선 접시를 그녀에게로 밀었다.
로제는 조금 어색한 듯 조금 불편한 듯 사샤가 건넨 것들을 차곡차곡 먹기 시작했다. 살가운 대화가 오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앞에 같은 음식을 먹는 사람이 앉아 있다는 것에 사샤는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밥을 다 먹어 갈 즈음 사샤는 겨우 처음보다 안정적으로 음식을 씹으며 앉아 있는 로제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궁금했던 걸 이제 물어볼 타이밍이었다.
“혹시…… 공작님 어디 아프신 데가 있나……? 호흡이 가빠지고…… 귀가 아프신 것 같던데…….”
제가 본 게 있으니 발 뺄 생각을 하지 말라는 압박이었다. 실제로 전날 그렇게 괴로워하면서 들어오던 카일러는 그래 보였다.
그리고 로제는 그녀의 질문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안 좋은 모습을 보이시고 만 듯했다.
로제는 입 안의 것을 씹으며 천천히 생각을 마치고, 그것을 삼키고 난 뒤에 사샤를 바라보았다.
“공작님께선 아프신 곳은 없습니다. 몸이 워낙 튼튼하고 강건하셔서 몇 날 며칠을 일하러 바깥으로 돌아다니시고 계십니다.”
로제가 딱 잘라 하는 말에 사샤는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순간 카일러의 어제와 같은 모습을, 설마 로제마저도 모르는 일인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왠지 대답을 하는 그녀의 표정이 비장한 거 같다면…… 그건 너무 기분 탓인 걸까.
“어제, 공작님께서…… 아픈 듯이 낮은 신음을 계속 흘리면서 귀를 붙들고 계시더라고. 나를 안아 주시면서부터는 그게 좀 잦아들기는 했는데…… 그래도 역시 아프셨던 게 아닌가 해서, 그런 거 공작부인으로서 알아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어.”
사샤는 어제 제가 본 것을 아예 그대로 전달했다. 사실 뭔가를 의심할 수밖에 없을 만큼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가 있다면…… 병이든 뭐든 있다면, 이렇게 대놓고 물어볼 땐 대답을 해 줘야 하는 게 맞으니까.
“그러셨군요. 의사를 한번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픈 곳이 있으시다면 치료를 빨리 받으셔야 하니까요.”
하지만 로제는 결국 그렇게 대답했다. 제가 알지 말아야 할 무언가가 있는 듯이.
어쩌면…… 단순히 아픈 게 아니라 다른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냥 아픈 것이었다면 말을 안 해 줄 이유가 없었으니까.
소속감을 가지려던 차에 차가운 그녀의 대답에 기운이 좀 빠졌다.
이제 한 발짝 정도 남았다 생각하고 있던 차였는데, 그 멀지 않은 간격 한중간에 불투명한 담이 쌓여 있단 걸 이제야 알아챈 느낌이었다.
“덕분에 점심 너무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다 드셨으면 제가 정리할 테니 먼저 올라가세요.”
로제는 입을 다무는 사샤 대신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자신을 빤히 보는 눈길에 사샤는 눈을 한 번 지그시 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녀를 설득한다고 해서 답을 들을 수 있을 거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식탁을 정리하는 로제를 두고 나오던 사샤는 그길로 1층을 전부 들여다보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카일러가 없으면 대부분의 시간을 저택의 정비에 시간을 들인다던 파반을 찾기 위해서였다.
엇갈리기라도 하면 한참을 돌아다녀야 할 거라고 각오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그를 찾을 수 있었다.
“아, 사샤 님. 어떻게 여기까지…….”
그는 저택의 서쪽으로 나가면 저 멀리 보이는 마구간에 있었다.
다행이랄까, 뒷문을 열고 멀리 내다보던 사샤의 눈에 마구간에서 짚풀 더미를 들고 들어가는 파반이 보였던 것이다. 아니었으면 온종일 저택 건물만 들여다보고 다녔을 것이다.
“말 돌보는 것은 집사의 몫인가?”
마차엔 마부도 있었고, 기사가 있으면 말 관리하는 이가 따로 있을 텐데, 이 많은 말들까지 혼자 감당해야 하다니,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평소엔 제가 관리하지 않습니다. 기사님들이 사용하는 말은 기사님들이 알아서 도맡아 하고 있고요. 공작님께서 출타하시면 남은 말들을 제가 돌보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말들이 전부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 공간이 비어 있는 게 보였다. 이번에 나갈 때 저 공간을 쓰는 말을 데리고 나간 모양이었다.
“저, 파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건초 더미를 날라다 쌓아 두고 이제 말들이 먹을 물을 깨끗한 걸로 바꾸어 주기 시작했다. 옷이 좀 괜찮았다면 그를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물론 그녀가 양동이를 집어 드는 순간 파반이 사색이 되어 그녀를 말렸겠지만 말이다.
들고 온 양동이를 기울여 한 말의 물통을 채워 준 그는 사샤가 말을 걸자 곧바로 양동이를 내려 두고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나이가 지긋함에도 불구하고 키가 크고 풍채가 좋은 파반은 그녀의 앞에 서서는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제도 해 주지 않은 것을…… 파반이 내게 해 줄까. 로제와 함께 그녀가 처음 저택으로 들어올 때부터 저를 보고 , 저와 관련된 일들을 처리해 왔을 그였지만 그걸로 인해 제게 뭔가 감정이나 충성심 같은 걸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젯밤에 공작님께서 아파하시는 걸 봤어. 짧고 굵은 신음을 몰아쉬면서 귀를 막고 괴로워하시더라고. 혹시…… 공작님께서 어디 아프시거나…… 그런 게 있나 해서. 공작부인이니까 이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자 파반 또한 마찬가지로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대답하기 위해 생각에 잠긴 것이 아니라, 대답해 주지 않으려는 침묵이라는 게……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사샤 님. 저는 모르는 일이군요.”
파반도 난감한 듯 웃으면서 그러게 말했다. 사샤는 그냥 마주 웃어 주었다. 그러고는 말을 더 붙이는 대신 공작저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