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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31화 (31/128)

31화

아침이 되고 먼저 눈을 뜬 것은 카일러였다.

전날, 좋아한다는 말만 남기고 방을 나섰던 사샤를 보내고 겨우 잠이 들었던 그는 귀를 괴롭히는 소음에 잠이 확 달아나 버렸다.

하지만 이번 소리는 단순히 그를 건드리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냥 신경 쓰이는 정도가 아니라 머리를 갈퀴로 긁어 대는 것 같은 그런 고통이었다.

식은땀이 마구 쏟아질 정도였고 소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호흡 몰아쉬며, 카일러는 자신을 이 고통에서 구해 줄 사람을 찾아 나섰다. 그녀는 다행히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까.

그녀는 처음 보는 자신의 모습에 당황한 듯이 보였다. 게다가 앞서 애매한 상황에서 방을 나섰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이 들지도…….

하지만 그녀는 먼저 그의 팔을 붙들어 주었다. 그 순간 귀를 갈퀴로 긁어 대던 고통스러운 소음이 싹 사라졌다. 정말 거짓말 같은 변화에 오히려 넋을 놓아 버렸다.

그녀가 간절해졌기 때문에, 내게 있어서 그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심지어 소음이 지워진 자리에 달콤한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땐 이건 정말 쾌락에 가까운 자극이었다. 참을 수가 없어 그녀를 탐하기 시작했지만…… 이제까지와 다르게 마냥 좋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분명 제게 좋아한다 했는데…… 그게 진짜 남녀 사이에 오가는 그것이든, 아니면 순수한 마음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런 그녀에게 자신은 ‘필요성’을 논하고 있으니 자신이 쓰레기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내게도 간절한 것을…….”

그녀가 절실했다. 이 고통을 어느 누구도 알아 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데려가 달라는 그녀의 사정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당장에 그녀를 제 결혼 상대로 정해서 후작저에서 데리고 나갈 생각을 했었던 것이고, 그녀가 제안하던 계약에 대해서도 모두 수락해 주었다.

그녀가 제게 오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 제게 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으니까.

이런 여자가 다시 있을까. 절대 없을 것이었다.

“너를 안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겠는가.”

황제가 제안한 것 중 하나가 그것이었다. 온전한 부부로 살 것. 그것은 부부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로 ‘그녀’가 포기할 거 같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가 ‘그녀’를 피하기 위해서 위장 결혼 같은 걸 했다는 의혹은 벗어나야 했었다.

“괜찮아요. 그렇게 해서 절 곁에 묶어 주세요. 다신 후작저에서 데려갈 수 없게…… 공작님께서도 쉽게 절 버릴 수 없게…….”

그녀는 진심으로 후작저를 떠나고 싶어 했다. 이쪽에서 무엇을 요구하든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매달렸고, 그만큼 내게도 귀를 잔잔하게 해 주는 그녀가 간절하게 필요했다.

“으응…….”

그녀는 작은 소리를 내며 카일러의 품 안으로 더 파고들었다. 작은 몸이 그 뜨거운 품 안에서 얼마나 강렬한 것을 느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샤는 그를 밀어내지 않아 주었다.

아무리 격정을 쏟아 낸 다음 날 아침이어도 그녀는 항상 잠결에나마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작은 동물이 꼬물대며 자신의 온기를 찾아 파고드는 느낌은 정말 등줄기가 짜릿해질 정도의 쾌감 같은 게 있었다.

그 와중에 다른 것은 정작 그 주인공……이었다.

어느 순간 예전의 비관적이던 그녀와는 굉장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결혼을 다짐하는 순간 성격이 바뀌었다……? 그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바뀐 사샤는 훨씬 더 적극적이고 생기가 넘치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닿아 있기만 하면 그의 귀를 괴롭히는 소음들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그것은 유지된 채였다.

신을 찾게 되는 순간이 제게도 생길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땐 정말 가슴이 녹아내려 순간적으로 신을 향해 맞잡은 두 손을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해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해서…… 그대를 지켜 내겠다.”

그것이 결국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 나는 거의 목숨을 바쳐 그녀를 구해 내야만 한다.

“……공작님……?”

그사이에 그녀가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그녀는 잘 안 떠지는 눈을 반만 뜬 채로 그의 목에 팔을 둘러 안겼다. 정정. 그녀는 잠에서 반만 깬 모양이었다.

아직 옷을 입히지 못해 나신이 그의 몸에 착 감겨 왔다. 밤새 탐하였어도, 그 짧은 시간 안에 몇 번의 밤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와 닿아 있으면 참 여러 가지 감각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녀가 파고드는 대로 안겨 있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이제…… 일어나는 게 좋겠다.”

하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소리를 못 들은 것은 아니었다. ‘이제’ 하고 말을 꺼내는 순간 어깨가 놀라는 것을 분명 확인했으니까.

창피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밝은데 이렇게 나신으로 있다니 말이다.

하지만 카일러로서도 이제 좀 무리가 있었다. 한참 동안 안고 있었더니 슬슬 그녀의 맨살이 감각적으로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일 치르지 않을 거라면 지금은 분명 일어나야 했다.

그때 사샤가 슬쩍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더니 시트 하나를 뒤집어썼다. 그러고는 그걸로 온몸을 가린 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리고 살짝 갈라지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 또한 사랑스러워서 누운 채로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방을 나서지도 못하고 다시 앉지도 못하는 것을 한탄하다 겨우 입을 연 것이었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무슨…….”

시트를 붙들고 머뭇거리는 그녀를 언제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거의 매일 밤이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부족했다.

“이리 와.”

그가 이불을 열고 그녀에게로 팔을 벌렸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사샤도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이 순식간에 화르륵 타올랐다.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자 눈앞에 나타난 그의 얼굴에 이미 한 번 숨이 멎는 듯한 감각을 경험했다. 그런데 그의 말대로 가까이 갈 생각을 해 보려니…… 부끄러워 얼굴이 화르륵 올라오는 것이다.

저 품으로 지금 들어가면 다시는 못 나올 것이다.

그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저 무심한 얼굴이 얼마나 격정적으로 변하는지…….

결국 사샤는 그의 옆으로 다시 누워 버렸다. 그의 손이 천천히 사샤의 몸을 감고 있는 시트를 걷는 사이에도 전혀 반항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도 황홀하게 만들어 주는데 마다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사샤가 입술을 깨무는 사이 그는 바로 입술을 삼켜 왔다. 이로 씹어 부푼 붉은 입술을 삼키면서 내쉰 숨이 그의 목 안에서 울려 그릉대는 짐승처럼 들렸다.

“하아, 공작님…….”

입술이 놓여나자 그제야 막혔던 숨이 탁 풀리면서 사샤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 움찔한 카일러였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름.”

“……예?”

당황한 사샤는 팔을 뻗어 올려 그의 목을 감싸려다가 멈칫해 버리고 말았다. 이름……이라니 무슨 이름을 말하는 걸……까.

“아, 카, 카…….”

새벽에야 새벽 버프를 맞은 데다가 그가 힘껏 몸을 퍼붓는 바람에 혼미한 나머지 불렀던 것인데 다시 부르려니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다. 워낙 살갑게 대하는 것은 그쪽이나 나나 어려운 일이나까…….

그는 끈질기게 기다렸다, 사샤가 이름을 불러 주기를. 사샤는 점점 창피함과 망설임을 담아 고민만 하고 있다가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다.

“카일러…….”

그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씨익 미소가 지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신호탄이 된 듯 그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하아…….”

“괜찮은가.”

카일러는 침대 아래에 앉아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사샤를 바라보며 걱정을 담아 물었다.

“안 괜찮은 거 같아요…….”

아침에 다시 시작된 관계는 점심이 될 때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 그러는 바람에 사샤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미안하다. 이렇게까지 하다니, 내가…….”

약간의 죄책감이 담긴 목소리를 들으면 굳어 있던 근육이 이완되는 듯한 감각을 느낀다. 사람을 여유롭게 하는 게 있었다.

“음…… 괜찮아요. 나도…… 좋아서 한 거니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샤가 말했을 때 하마터면 그녀를 다시 덮칠 뻔했다. 제가 이렇게나 힘이 넘쳐 주체 못 하고 덤비는 남자였나. 그런 거는 짐승이나 다름없는 게 아닌가. 함께하려고 할 때마다 뭔가 죄목이 추가될 거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좋아한다는 말에 자신은 표현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녀는 먼저 품에 안았고, 더 곁에 두고 싶은 것은 카일러였지만 정작 이게 어떤 감정인지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그였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졌으나 카일러는 더 그녀를 안지 않았다. 다만 손에 부드럽게 감기는 그녀의 등허리를 계속 어루만져 주는 것도 기분이 좋았으니까.

“더 많은 걸 배우고 싶어요……. 내가 무지한 것 때문에 피해 보는 일은 없었으면…….”

사샤는 잠결에 웅얼거리는 듯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작은 세계 안에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높은 열망을 가져 왔을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물론 많은 걸 알았으면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작은 세계 안에 가둬진 채 살아오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걸 혼자서 할 수 없는 나이이기 때문에 후작의 죄가 더 무거운 것일 텐데.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지고 있는 그녀의 말에 카일러는 조용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배우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전부 원하는 만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녀의 말에 카일러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녀가 하고 싶은 감정적인 언어를 이걸 제게로 돌려주고 싶어 한다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걸 제가 전부 받고 싶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자신을 위해 뭔가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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