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카일러는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분명 오른쪽 팔에 옆에 앉은 이의 체온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는 입도 열지 않고 이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아차, 실수한 건가.
사샤는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입술을 콱 깨물었다. 쓸데없는 감정을 품은 거구나. 그가 원하지 않던 감정을 품고 그것도 모자라 입 밖으로 낸 거였구나.
두 눈을 빠르게 깜빡인 사샤는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노, 노, 농담인 거 아시죠? 저는 할 말 다 했으니 돌아가겠습니다. 쉬세요.”
사샤는 얼른 일어나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자신을 잡지 않는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로 방을 나섰다. 자신의 방은 그의 방 바로 옆인데 아무리 발을 움직여도 입구에 당도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걱정했던 사교 모임은 잘 끝내고 돌아와 놓고 그 신경질적인 황후의 말과 어이가 없는 동생까지 전부 누르고 돌아와 놓고…….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그의 곁에서 도움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그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이런 일들을 해결할 수 있음을.
내 마음을 이야기하는 건 그 뒤다. 지금이 아니라…….
그녀의 고민이 깊어졌다. 이건 마치 이베른 후작부인과 엘리나가 저택을 다녀간 이후 점차 깊은 수렁에 빠졌던 때의 전초전과 얼마간 비슷한 느낌이었다.
침대 한가운데 쪼그리고 앉아 생각과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도움 없이도 내 힘으로 해낼 수 있는 방법. 그의 뒤에…… 숨지 않는 방법.
시간이 얼마나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사위가 고요에 빠진 것은 벌써 오래라 문득 정신이 들어 창문을 내다봤을 때 벌써 새벽의 하늘이 되어 있었다.
“하…… 피곤은 한데 모아서 어디다 넣어 두고 싶어…….”
그런데 그 새벽의 고요를 깨고 무언가 격렬한 기척이 느껴졌다. 문밖이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남자의 기척이 서서히 그녀의 방문 쪽으로 향했다.
그대로 지나쳐 아래로 내려가든 위로 올라가겠지 하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기척 은 그녀의 방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설마 하고 생각했지만 곧 문이 열렸다. 그리고 거기에 나타난 것은…… 카일러였다.
밤에 있었던 일을 추궁하러 온 것일까. 그걸…… 굳이 이 새벽에 다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일까.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게 덧날까 봐 걱정을 하고 있었다.
“후윽…… 훅…….”
그가 힘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사샤는 금방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챘다. 침대에 녹아들 것처럼 앉아 있던 몸을 바로 일으켜서 그에게로 달려갔다. 문을 닫고 안으로 한 발짝 두 발짝 걸어 들어오면 그의 그림자가 뭔가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그가 두 손을 들어 자신의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공작님? 무슨 일이에요? 어디 아파요? 예?”
그의 앞에 서서 다급히 물었지만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통을 참는 듯이 보였다. 식은땀이 주륵 흐르는 것까지 확인한 사샤는 화들짝 놀라 그의 팔을 붙들었다.
“공작님!”
그때였다. 혼이 나간 듯 초점을 잃고 식은땀을 흘리던 그가 번뜩 눈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훅, 후욱 그의 거친 숨소리는 계속해서 방 안을 울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붙든 그녀의 팔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정면으로 마주 보아도 역시나 그의 얼굴이 좋지가 않았다. 뭐지 어니…… 아픈 건가.
그때 카일러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꺅 하는 비명을 지르는 사이 그는 성큼성큼 걸어서 그녀를 침대에 털썩 내려놓았다.
“고, 공작님. 뭐 하시는 거예요? 괜찮으신 거예요?”
누워 있는 그녀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는 그녀를 보고 있었다. 초점 있는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고도…… 무서워지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잠시 사샤의 얼굴을 살피는 듯하던 그의 얼굴이 더 다가와 입술이 닿았다. 차갑게 닿은 마른 입술이 폭신하게 사샤의 입술을 감싸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핥고 빠는 것을 반복하는 사이 뜨겁고 촉촉해진 그의 입술이 열리고 뜨거운 혀가 사샤를 비집고 들어왔다. 사샤의 혀를 얽고 비벼 오는 키스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키스가 깊어지자 온몸을 내리누르는 무게가 더해졌다. 그가 마치 이불처럼 사샤를 덮고 끌어안았다. 푹신한 침대 덕에 아프거나 힘들진 않았지만 무게감과 온기는 여실히 느껴졌다.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고 혀가 오가며 질척한 소리가 침실을 울렸다.
내리누르기만 하던 그의 단단한 몸이 살짝 움직여 온다고 느낀 순간 그가 입술을 뗐다. 밀착했던 입술이 떨어지자 두 사람의 입에서 격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필 고백 아닌 고백을 하고 난 이후라 그런지 이런 마찰마저 애틋하게 느껴지려고 했다. 평소보다 더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사샤의 허리를 양손으로 붙든 채 그녀의 얼굴 옆에 고개를 박고 호흡을 진정시켰다.
들썩이는 그의 몸이 온전히 전해지고 있어서 이쪽은 진정은커녕 심장이 더 세차게 뛰는 것 같았지만 그는 점점 평온하게 숨을 쉬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신음하고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괴로워하고 있었을까. 그 생각을 하려는 찰나, 목덜미와 어깨 언저리에서 간질간질한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나직하게 그가 입을 열었다.
“흣, 아…… 공작님, 공작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잠깐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에 대한 반응인가 싶어서 한 번 더 그를 불러 보았다.
“카일러…….”
그녀의 얼굴 아래쪽을 보고 있던 시선이 슬쩍 위로 올라왔다. 그녀의 부름에 반응해 준 듯한 느낌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이름으로 불러라.”
어디에도 반응하지 않을 것 같던 그가 자신을 부르는 이름에 나직하게 말했다. 자신에게 닿아 있는 것이 간절한 듯 움직이는 그의 몸짓에 더해 너무도 애틋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어떻게 그래요…….”
“사샤…….”
팔을 조심조심 꺼내 그의 목에 둘러 보았다. 자신의 목에 사샤의 가녀린 팔이 감기는 것을 느꼈는지, 카일러가 빈틈없이 밀착해 들어온다.
“읏.”
그리고 그의 얼굴이 목덜미에 닿는다 했더니 따뜻하고 말캉한 것이 느껴졌다. 말캉함이 떨어지자 축축한 게 살을 훑었다. 가슴을 짓누른 그의 심장은 아까처럼 불규칙하게 뛰어 댔다.
아, 하는 그녀의 소리에 그의 입술이 내려가 쇄골을 훑었다. 등허리를 훑어 내리던 손이 허리선을 따라 점차 위로 올라오더니 소담한 살덩이를 살짝 쥐었다.
“읏. 아…….”
카일러는 그녀의 고민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의 움직임이 더 따뜻한 곳을 파고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를 밀어내야 하는 건가 싶었다. 아까 제 고백에는 대답도 안 해 줬으면서 그냥 계약을 이행하는 생각만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빈정이 상한 것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것 그거고…… 방금 방에 들어올 때만 해도 힘들어하던 그가 제가 닿는 순간 호흡이 안정되었던 것이 떠올라서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부를 때마다 그는 차츰 안정을 찾았다.
그러므로 지금 이건…… 혼란한 상태에서 덮치려는 게 아니라…… 정신을 차렸기 때문에 제게 몸을 맡겨 오는 것이었다.
사샤는 쇄골에 입술을 댄 채 옷을 벗기려 하는 카일러를 꼭 끌어안았다. 그 움직임의 의미를 알았는지 카일러 고개를 들고 씨익 웃더니 거침없이 옷을 벗겼다.
내려가려던 고개가 다시 위로 올라와 이마에 촉, 소리를 내며 입을 맞췄다. 사샤는 순간 너무 심장이 떨려서 남아 있던 걱정이 싹 잊히고 말았다.
“내가 당신이 안을 수 있는 유일한 여자인가요…….”
제발 그러기를 바랐다. 이제까지도 앞으로도…… 그렇다고 하면 지금 이 순간이 배로 행복할 텐데…….
순식간에 나신이 된 사샤의 몸 위로 그의 커다란 손이 덮여 곳곳을 훑기 시작했다. 말랑한 살을 쥐고 주무를 때, 평소 꼭 끌어안고 손바닥으로 등허리만 계속해서 매만지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이렇게 온몸을 거침없이 만지려는 손을 막기 위해서……!
“아…….”
어떤 곳에 어떤 압박을 주는지에 따라 몸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생각은 끊겼고 입에서 흐르는 소리를 참기가 어려웠다.
“넌 내게 유일한 ‘여자’다. ……사샤.”
온전한 이름으로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에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의 목소리가 닿은 가슴 언저리가 간질거렸다.
그의 얼굴이 목에서 쇄골로 그리고 그 아래로 내려갈수록 온몸이 달아오르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차갑기만 하던 그의 목소리마저 뜨겁게 타오르는 순간 눈앞이 번쩍이며 극심한 통증이 온몸을 내달렸다.
“아읏! 아……!”
순식간에 그녀의 온몸을 점령한 카일러는 사샤의 반응에도 멈칫하는 기색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끌어안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는 듯이, 연결이 된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듯이.
오히려 사샤가 내는 소리들이 기폭제가 되는 것 같았다.
사샤는 그저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목을 놓치지 않기 위해 두 팔에 힘을 주면서.
아무래도 좋았다.
첫날밤에도 그랬고…… 그의 품에 안기면, 그의 손이 닿으면, 그리고 그의 몸이…… 밀착해 오면 그녀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것이 고통이었다면 매번 그를 밀어내느라 힘들었을 텐데…… 그게 아니라 처음부터 사샤는 그의 품 안에서 너무 많은 것을 느꼈었다. 한번 시작되면 그녀 또한 그를…… 놓기가 어려울 만큼.
신음이 높아지고 그 또한 호흡이 빨라지며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었다.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런 것도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품에서 흔들리며 신음하는 게 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