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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29화 (29/128)

29화

“남의 거 그렇게 뺏어 가 놓고 언제까지 뻔뻔한지 보자고.”

“……아직도 그 얘기니?”

엘리나가 이렇게나 끈질긴 사람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그리고 어리둥절해질 정도로 저 말에 집착하고 있었다.

지금도 태연한 사샤의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그녀는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비를 해 두어야 할 거 같기는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뺏은 거 아니니까 네 입장에선 언제까지고 뻔뻔할 예정이야. 함부로 덤비지 마. 공작님을 난감하게 만들 일은 하지 말라는 말이야. 내가…… 가만 안 있을 테니까.”

그녀가 하려는 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이든 이 관계를 헤집으려고 나서는 순간, 그 자체로 이미 카일러가 신경 써야 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얘기를 꺼냈을 때 진정을 시켜 놓는 게 여러모로 좋았다.

“가만 안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겨우 공작저에 살고 있다고 너무 기고만장해진 거 같아서 얘기하려고 왔어. 흥.”

카일러가 그녀의 편이 아니라면 엘리나의 말대로 사샤는 기댈 곳 하나 없는 외톨이여야 했다. 사교계는 발치도 들여다본 적 없고, 귀족들과의 연계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더욱 강력한 카일러라는 남자가 그녀의 편이었다. 아무래도 이 아이는 그걸 아직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저 공작저에서 잠만 자고 밥만 먹고 있는 게 아니야. 나는 이그노트 공작부인이야. 그 집안사람들이 모두 인정해 준.”

붙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과연 시간 낭비가 아닌가 싶은 생각은 들었지만 우선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아이가 좀 믿어 주고 얌전히 있어 주면 좋겠는데…….

“그건 언니, 네가 착각하는 거지, 그게 어떻게 가능하냔 말이야. 귀족으로 교육을 받길 했어, 아님 우리 가문에서 딸이라고 인정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너를 왜.”

한숨이 제어가 안 된 채 푹 나와 버렸다. 카일러한테만 기대지 말고 내 스스로 쓸 수 있는 힘을 좀 찾아봐야겠다. 이런 아이쯤은 내가 알아서 해결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나는 너에게 거짓을 말한 적이 없어, 엘리나. 결국 나를…… 두루뭉술한 이베른의 영애가 아닌, 사샤 이베른을 데리고 가겠다 한 건 공작님이었어. 너도 아니고 내가 아닌 다른 누구를 입에 올린 적 없어.”

힘 있게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 앞에 기세등등하던 엘리나도 기가 훅 꺾여 버렸다.

이를 꾹 물고 있는 탓에 턱이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애가 세긴 한데 제가 더 기가 센 모양이었다. 그건 다행이군.

“난 먼저 가 볼게. 공작님께서 기사님을 붙여 주셨는데…… 내 호위하느라 시간 버리기엔 너무 공작님께 중요한 분이시라서.”

사샤는 그녀를 지나쳐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다음에 또 저러고 나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은 채로 누르려고 하니까 자꾸 튀어나오려는 것일까. 인정하기 싫을 테니까.

“하여간…… 자꾸 귀찮게 만드네.”

“누굽니까, 그게. 제가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엄마야!”

생각보다 내 발걸음이 너무나도 빨랐던 모양이다. 어느새 황후전 뒷마당 잔디밭을 지나 진입로에까지 걸어 나왔던 것이다. 그녀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딜런이 냉큼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명령을 받을 기세라서 사샤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딜런은 커다란 몸을 한껏 수그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새로 추가된 주인에 대한 관찰 같은 것인가.

“정말 괜찮아, 딜런. 나 때문에 시간 많이 보냈으니까 얼른 돌아가요.”

사샤는 얼른 서둘러 걸어갔다. 그녀가 가야 딜런도 얼른 따라올 것이기 때문에.

어느새 해가 져 가고 있는 시간에 황궁을 나서는 마차 안에서 사샤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냥 이쯤 되면 살 길도 찾았겠다. 그냥 공작저에서 카일러의 그림자 뒤에 숨어, 공작부인 자리만 채운 채로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본래 사샤가 어떤 아이였는지를 생각한다면…… 카일러가 그녀를 데려오면서 기대했던 것도 그런 역할이지 않았을까.

덜컹, 돌부리에 걸렸는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사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난 삶에서는 쉴 수 있으면 쉬고 놀 수 있으면 놀겠다고 그렇게나 생각했었는데…… 어째서 정작 걱정 없이 쉬고 마음껏 놀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그 다짐을 실현하지는 못하는 것일까.

라다나 로즈힐과 대화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왠지 모르게 넘쳤던 의욕이 파스스 사그라지고 사샤는 한없이 내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커다란 마차 안에서, 돌부리가 정확히 마차 바퀴에 걸리지 않으면 덜컹거리는 흔들림도 잘 안 느껴지는 커다랗고 안정적인 마차 안에서 사샤는 그렇게 파고들 생각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사샤 님, 도착하셨습니다.”

딜런이 공작저에의 도착을 알렸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고생하셨습니다.”

마차에서 내리는 그녀를 로제가 맞아 주었다. 이렇게 타이밍 좋게 마중을 나와 주었다는 건 계속 기다렸다는 것인가. 주인이 처음 나가는 사교 모임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생은 하나도 안 했어. 로제가 잘 알려 준 덕분에 이름 잘 외워서 불러 주고 왔어.”

“잘하셨습니다. 정말 그걸 다 외우실 줄은 몰랐네요.”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맞아 주는 그녀가…… 마치 엄마처럼 느껴졌다. 진짜 엄마가 있었어도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갑자기 찡해지는 느낌 때문에 억지로 웃어 보인 그녀는 또 성큼성큼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공작님께서는…….”

문득 1층을 지나 위로 올라가려고 계단을 디뎠을 때 그가 생각이 났다. 다녀왔다고 말은 해야 할 거 같은데,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인사를 하러 가겠지?

“공작님께선 지금 2층에…….”

“사샤.”

그런데 로제의 대답이 다 끝나기도 전에 2층 계단 끝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그가 공작저에서 입는 가벼운 옷차림을 한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왠지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사샤는 서둘러 위로 올라갔다.

그는 그곳에 서서 사샤가 계단을 다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임은 어땠나. 무슨 일은 없었나?”

설마…… 카일러도 자신을 기다려 주고 있었던 걸까. 괜히 그런 생각이 드는 통에 다시 얼굴이 발그레해지는 게 느껴졌다.

로제가 자신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문 밖에까지 마중을 나와 준 것처럼 카일러도 방에서 계속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자신을 맞이하러 나와 준 것은…… .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기대하게 되는 마음은…….

뭔지 잘 모르겠다, 이 간질간질한 마음은.

“벼, 별일은 없었어요. 그냥 가서 인사 하고 말 걸면 받아 주고 맛있는 밥 먹고 그러고 돌아왔어요.”

그는 세밀한 눈동자로 사샤를 살펴보는 것 같았다. 허리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던 그와 눈이 마주쳐 흠칫 놀라 버렸다.

그의 얼굴이 걱정을 담고 있었다. 이건 착각도 뭣도 아닌 진짜였다. 엘리나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한 것처럼 내가 그냥 꿔다 놓은 보릿자루고 숨겨 두기만 할 사람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대하지 않을 것이었다.

“황후와 엘리나도 만났는데, 별말 없었어요. 정말로요.”

그녀가 나갔다 오는 동안 걱정을 계속 담고 있었을 그를 생각하자 얼른 안심시켜 주고 싶어졌다. 어깨를 감싸 준 그의 손을 이끌고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를 침대에 앉힌 뒤 자신은 아직 외출 드레스 차림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옷을 갈아입고 와야 하나, 적어도 씻고는 와야 하지 않을까 오만 걱정을 하는 사이 사샤는 앉지도 않은 채 서성이고 있었다.

“앉아라.”

“그치만 아직 외출복이어서요…….”

쭈뼛거리는 그녀를 그가 다시 답이 들렸다. 카일러는 그저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행동과 말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마 뭐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에 대해 모두 알고 싶어 하는 거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리 와서 앉아도 된다. 침대가 걱정이면…… 여기……?”

카일러가 그녀의 망설임을 읽었는지 그가 말을 다시 꺼냈다. 그런데 그 침대가 아닌 다른 예시를 든 것이…… 하필이면 그의 허벅지 위였다.

사샤는 피로마저 싹 잊어버릴 것만 같은 그의 목소리에 잠깐 넋을 놓고 그의 허벅지 위에 앉을 뻔했, 어휴…….

사샤는 서둘러 그의 옆 침대 위에 자리를 잡았다. 잠깐 동안 말을 어떻게 시작할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사이에도 그는 침묵을 일부러 깨려 하지 않고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황후 폐하께서 약간 시비 걸고 여동생이 모임 다 끝나고 쫓아와서…… 그건 좀 문제였었어요. 그 외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습니다.”

“황후랑…… 너의 여동생이란 말이지.”

또또, 당장에라도 처리하러 달려갈 것 같은 느낌이라서 사샤는 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진정시키려는 의도였고…… 실제로 그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있죠, 카일러 공작님.”

그런데 그가 대답 대신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이 나 자신만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안의 무언가까지 보는 거 같았다.

뭐라고 물어야 할까. 내게 마음이 있냐고 물어야 할까……. 아침까지만 해도 그렇게 애틋한 마음이었다가 나중엔 그냥 버리고 나면 편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이 마음만은 놓칠 수 없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인가. 역시 내게 말 안 한 큰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그는 평소보다 제 곁에 있으면 수다쟁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녀는 이 남자의 마음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알기 위해서 그녀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답답함은 해소가 될 리가 만무하고…….

“아니, 제가…… 공작님을 많이 좋아한다고요…….”

기어이 입 밖으로 그 소리를 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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