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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28화 (28/128)

28화

편하게 다가와 말을 걸어 주던 것처럼 이들은 수다쟁이였다. 거기에 약간의 정의감을 가지고 있는 듯한 아가씨들은 사샤의 약간 주저하는 모습에 불타올랐는지 속삭이는 데시벨로 분노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황후가 되셨으면 자리도 있겠다 보는 눈도 있겠다 감춰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마음을 직접 전하지 않았다는 걸 이유로 본인은 감춘다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옆에서 보기엔 그냥 보여 주고 싶은 걸로밖에 안 보인다고.”

“게다가 이제 공작님께서도 배필을 찾아 결혼하셨는데, 아까 봤지? 이건 누가 봐도 이그노트 공작부인에게 질투한다고 온 귀족 여인들에게 알리는 거잖아요.”

음, 우선 그녀가 저렇게 구는 게 꼭 자기 앞에서만은 아니라는 얘기고…… 그게 사람들이 보기에 안타까움보단 분노를 자아내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아직 함부로 말을 얹을 타이밍은 아닌 것 같아 사샤는 말을 하려는 듯 벌어졌던 입술을 다물고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마치 막을 꺼내려다 참는 듯한 그녀의 모습이 불타고 있는 라다와 로즈힐에게 잘 마른 장작이 되어 주었다.

“이거이거, 모르는 사람이 이 상황 봐 봐요. 마지 절절히 사랑하는 연인을 황제 폐하가 갈라놓은 것처럼 보이잖아요.”

드디어, 그녀가 원하는 말이 나왔다.

라다는 친화력과 수다로 정보를 모으고 다니는 사람인 걸까. 아니면 쉬쉬하고 있지만 고위 귀족 정도 되면 알음알음 다 알고 있는 내용인 것일까.

하긴 황후가 저런 식으로 티를 내고 다녔다면 눈치 좀 없는 사샤라도 알아챘을 것 같았다.

“그러니 카일러 공작님께선 얼마나 난감하셨겠냐고요. 그렇게 인기가 많았는데도, 영애들이 혼담 얘기를 꺼내지 않은 것도 그 탓 아닐까요?”

“그래서 공작님께서 결혼을 서두르셨다는 얘기도 있어요.”

로즈힐은 그렇게 얘기를 하고는 슬쩍 사샤의 눈치를 보았다. 마지막 말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에. 뭐…… 급하게 했는지 어쨌는지, 사랑하는 사람과 보통의 결혼을 한 건 아닌 듯하니 대략 저 말도 틀린 건 아닐 테다.

하지만 역시 그 부분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사샤는 미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부인. 제국에서 이 일의 진실을 모르는 이는 없답니다. 아마 황후께서도…… 오해하는 사람은 없다는 핑계로 마음을 잘 안 숨기는 걸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예요.”

“혹시나 했지만…… 아까 그렇게 저를 차갑게 대하시는 걸 보니 조금…… 걱정은 되네요.”

사샤는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린 채 처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들에게 난 황후에게 부당한 질투를 받는 안타까운 영애인 거니까. 대놓고 그녀에게 대항할 수 없다면, 여론을 이용해서 내가 정당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는 것도 좋겠다.

황후가 날 괴롭힐수록…… 나는 정당해지는 것이니까.

“저번에 공작님 마주쳤을 때 본 적 있어요? 세상에 그렇게 가련할 수가 없더라고요.”

“황제 폐하는 어떻게 보고 사시나 몰라요…….”

황후는 아직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그녀가 없는 다른 테이블은 여기처럼 각각의 대화를 나누기에 바빴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그녀는 수시로 다른 이들과 눈이 마주치는 것을 느꼈다. 저 눈빛이 경계인지, 호감인지, 불호인지는 잘 모르겠다.

황후의 편이거나 카일러를 흠모하는 이라면 불호겠고, 눈앞의 영애들처럼 황후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불호까지는 아니겠지. 이들은 내게 호감인가, 아니면 단순히 불쌍해하는 느낌일까.

“그런데, 부인, 굉장히 아름다우시네요! 역시 아름답기로 소문난 이베른 영애의 자매라서 그런가 봐요.”

사교계 사람들은 역시 이런 가십에 굉장히 소식이 빠른 모양이었다. 알려져 있겠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첫날부터 아주 탈탈 털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과찬입니다. 관리라고는 모르고 자라서…… 이베른 영애와 비교할 만한 건 아니에요.”

사샤가 조용히 겸손의 말을 꺼내자 라다와 로즈힐은 대번에 눈물을 글썽일 듯한 얼굴이 되어선 그녀에게 더더욱 집중했다. 가까이에 앉아 있던 로즈힐은 덥석 사샤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

“많이 아프셨다 들었어요……. 세상에, 동생은 저렇게 예쁘게 사랑받으시고 모임 참석하러 나가시는 거 보면서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러게나 말이에요. 세상에, 딸이 있다는 걸 숨길 정도로 아프다는 건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요?”

이야기를 계속 나누다 보니 느낀 건데…… 이 영애들은 공감 능력이 어마어마하게 빠르고 깊은 듯했다.

순식간에 너무나도 아파서 부모님이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키운 딸이 되어 그들의 눈앞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예쁜 동생을 보며 안타까웠을 마음까지 마치 자신들이 느낀 듯 안타까워해 주는 게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날 정도였다.

나쁜 아이들은 아닌 듯한데.

“그래도 지금은 카일론 공작님의 사랑을 받고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아마 그분을 만나기 위해…… 겪어야 했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어쨌든 사샤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말이 옮겨지는 곳에서는 진실을 말하더라도 조심해야 하는 곳이니까. 말을 조절하게 되더라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모두 진실이었다.

아차, 사랑받는다는 것은 아직 사실은 아닌데, 그저…… 내가 느끼고 있는 것 정도.

무섭다로 시작해서 무섭다로 끝나는 카일러 이그노트에 대한 평가 중에서 사샤가 직접 느낀 것은 없었다. 그는 항상 자신을 신경 써 주었고, 부족한 것 없이 챙겨 주었으니까.

계약에 따라 밤을 같이 보내는 때에도 그는 그녀를 함부로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여러 번 하거나 격렬해질 때는 있었지만 그건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 아…….

“앗! 공작부인, 혹시 아픈 거 아니에요? 열이 오르시나 봐요, 볼이 발그레해지셨는데?”

가까이에 있던 로즈힐이 그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채고 걱정 담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샤는 밤을 떠올리다 붉어져 버리는 얼굴 탓에 생각을 멈추고 볼에 차가운 손등을 댔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지금은 전혀 아프지 않아요. 걱정 고마워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살풋 눈웃음을 짓자 두 사람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그녀를 반짝이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아까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한마디를 꺼내는 황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반짝이던 영애들의 눈빛을 본 게 떠올랐다.

그것을 동경의 눈빛이라고 읽었는데…… 내게서 뭘 느낄 리는 없으니 그냥 이 이야기가 그들에게 굉장히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러한 스토리를 가진 사람이 많지 않겠지. 게다가 ‘그 카일러 공작’의 옆자리를 당당히 꿰찬 여자이기도 하고.

사교 모임은 그 이후로도 식사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이어졌다. 여인들은 제일 우선적으로 사샤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해 줄을 섰다. 처음 등장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이 어땠었든 간에 사샤는 지금 유구한 역사의 이그노트, 현재 제국에서 가장 핫한 남자 카일러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사샤는 대부분의 귀족 부인의 이름을 불러 모두를 경악하게 했다. 그녀를 만만하게 보았던 사람들도 슬쩍 경계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새롭게 성인이 되어 처음 참여한 영애들과 영애에서 부인이 된 이들에게도 축하를 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공작인 그분의 위치를 따라 가문과 제국에 누가 되지 않도록 매사 품위 있는 공작부인으로서 사교 모임에도 잘 참여할게요. 잘 부탁드려요.”

그에 예외 없이 사샤도 남들 앞에 서서 인사를 했다.

잘 참여할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정말 다음에도 와 주실 거예요? 저희는 거의 매번 참여하고 있거든요.”

라다와 로즈힐은 사샤의 말을 듣고 벌써 자기네들이 신이 나서 눈을 빛냈다. 그냥 마무리 멘트 정도로 꺼냈던 것들이 그녀들에겐 약속이 되 버린 모양이었다.

뭐 그땐 황후도 없을 것이고, 엘리나가 올 리도 없을 듯하니 나간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였다

“그래요, 그럼. 다음에 봐요.”

어느덧 모임도 막바지였다. 하나둘 먼저 자리를 뜨는 사람들이 생기면 자리의 강제성은 끝났다고 했다. 눈앞에서 열심히 수다를 떨던 이들도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자연스럽게 자리를 정리하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공작부인께선 안 돌아가시나요?”

“어멋! 설마……! 카일러 공작님께서 마중을……!”

그녀에게 안 가냐 묻더니 갑작스럽게 훅 치고 들어온 로즈힐 덕에 주변의 시선도 얻어 버리고 말았다. 카일러가 온다는 말에 다들 혹해 가지고는, 제 입에서 그렇다, 그가 온다, 하는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안타깝지만 공작님께서 오늘 바쁘셔서요.”

난감한 미소를 짓는데, 그녀의 미소가 부드러워서 나약해 보이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저 우아하고 어여쁜 영애처럼 보였다.

저들의 머릿속에 어떤 이야기들의 조각이 맞춰져 가고 있었던 것일까. 그에 서로 눈빛을 주고받던 영애들은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각자 갈 길을 찾아 움직였다.

사샤도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기 전 화장실을 한번 들렀다 나가기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가는 무리들과는 반대로 안으로 들어가 들렀다가 나오는 길.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이 있으니 절로 발걸음이 빨라지려는 찰나에 그녀의 앞을 막는 발이 있었다.

어라, 하고 무심결에 고개를 든 사샤는 눈앞을 막은 이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미간을 슬쩍 좁혔다.

다시는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했던 아이가 눈앞에 있었다. 이젠 제법 비슷해진 윤기 나는 금발머리카락이 탐스러운 이베른의 후작 영애. 그날의 일을 생각하면 저도 나를 만나기가 싫었을 텐데…….

“안녕, 언니? 이젠 이런 곳에서도 다 보네.”

그녀를 비싯 비웃는 얼굴로 바라보는 엘리나를 바라보는데 어이가 없었다.

대꾸도 안 하고 바라보고 있으면 입술을 깨물며 익, 익, 하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그때와 다르게 이상하게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게…… 아무래도 마음에 좀 걸렸다.

“뭐 영애와 귀족 부인들이 모이는 자리이니 만나는 게 당연하지 않겠니. 앞으로도 자주 보게 되겠구나.”

태연하게 눈을 마주 보며 대꾸하는 그녀를 보자, 그제야 그녀의 눈이 화륵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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