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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27화 (27/128)

27화

시간이 가까워 옴에 따라 대부분의 여인들이 모여 있는 연회장으로 사샤는 발을 내디뎠다.

풍성한 치마와 소매가 최신 유행인 듯, 디테일은 모두 다르지만 대부분 그것이 공식인 양 비슷한 드레스를 두른 여인들이 잔뜩 있었다.

그에 반해 사샤는 목까지 덮어 노출도 없는 상의에 적당히 부푼 치마, 그리고 핀턱 주름으로 우아한 느낌을 강조한 단정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화려한 속에서 그녀의 청초한 모습이 더 눈에 띄었다.

한쪽으로 땋아 내린 풍성한 금발머리카락과 고급스러운 광택이 나는 네이비색의 드레스가 부인이라기보다는 소녀 같은 분위기가 났다.

공작부인이라고 일부러 어른스러운 척하지 말고 자연스럽고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가도록 의견을 낸 것은 오히려 로제였다. 어차피 그네들의 유행을 따르지 않을 거라면 이렇게 가는 것도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황후 폐하, 사샤 이그노트입니다.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사샤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역시나 황후 미디에나였다.

선명하게 붉은 입술이 보란 듯이 굳게 닫힌 채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녀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모든 이들은 먼저 그녀에게 인사를 하러 오기 때문에 입구에서부터 인사를 하기까지 황후의 눈은 그녀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래. 오느라 수고했네. 즐기다 가도록.”

꼭 해야 할 말만, 딱 지켜야 할 선만 딱 지킨 대답.

황후의 이런 태도는 모든 영애들에게 그녀가 사샤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사샤의 입장에선 생각보다 괜찮은 대우였다. 황후이기도 하겠다, 누가 덤비거나 나쁜 말을 하겠어, 하는 생각으로 첫인사부터 각오를 한 참인데, 얼굴을 일그러뜨리지도 않고, 여기를 왜 어떻게 오냐 면박을 주지도 않았다.

‘뭐야, 생각보다 괜찮네.’

사샤는 황후의 앞에서 물러나 나와 아무도 없는 원형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영애들이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눌 수 있도록 좌석이 준비된 참이었다.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되면 저쪽에 세팅되어 있는 음식들을 시녀들이 날라다 줄 거라고, 로제가 대답했다.

딜런은 이런 분위기를 엄청나게 어색해하던데, 로제는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걸까. 그녀의 나이 정도라면, 전 공작부인께서 사교 모임 다니실 때 같이 다녔던 것일까.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줘서 고마워요, 여러분. 우리 데르마 제국은 안으로는 평온하지만 바깥에서 볼 땐 언제나 반란, 혹은 전쟁의 위험을 아직 간직하고 있고, 마물의 위협 또한 받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와 귀족분들, 그리고 기사들이 힘을 내고 있는 이때일수록 우리의 역할 또한 중요할 거예요.”

황후가 한가운데로 나와 목소리를 돋우자 장내는 모기 소리마저 울릴 듯이 조용해졌다. 마냥 온화하지만은 않은 힘이 있으면서도 톤이 높은 미디에나의 목소리가 장내를 울리는 와중까지도 사샤의 테이블엔 혼자였다.

주변을 돌아보니 몇몇은 마치 동경하는 사람을 바라보듯이 황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그 눈빛을 보고 있자니 허허,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중에는 익숙한 얼굴이 하나 있었다. 그녀에게 익숙한 얼굴이라면, 하나뿐이지.

‘엘리나…….’

후작부인은 함께 있지 않았다. 그녀는 또래의 영애로 보이는 사람들과 모여 황후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끈끈해지면 위기엔 언제나 빛을 발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 오늘도 마음껏 즐겨 주길 바라요.”

마지막으로 그녀가 샴페인이 든 잔을 위로 들어 올리자, 여인들도 모두 다 샴페인 잔을 위로 들어 올렸다.

건배하듯 잔을 올린 뒤 모두 한 모금씩 샴페인을 마셨다. 사샤도 똑같이 따라서 마시다가 한 모금만 마시고 입을 떼기 아까울 정도로 맛있어서 눈동자를 또륵 굴리다가 한 눈동자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샴페인을 마시고 내려놓던 엘리나의 눈동자가 갑자기 그녀를 직시한 것이다.

와, 저 불타오르는 눈동자를 보라. 심한 말을 했기로서니…… 자기도 언니한테 더한 말도 했으면서 인과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눈빛이었다.

싸우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 그냥 일행 사이에서 즐겁게 놀다 가면 좋으련만. 쯧.

“저, 안녕하세요! 저는 라다라고 해요! 헤리디 백작가의 영애예요.”

“저는 메리플 백작가의 로즈힐이에요! 못 보던 영애이신데, 오늘 첫 참여인 거죠?”

그때 갑자기 그녀가 앉은 비어 있는 테이블로 두 명의 영애가 와서 자리를 잡았다. 친근하게 말을 붙이면서 다가오는 두 영애는 귀염성 있는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아, 저…….”

“어머, 이거 드레스, 독특하다 했는데 원단이 너무 고급스럽다! 이거 제국에서도 흔치 않은 건데?”

영애가 아니라 공작부인이라고 소개를 해야 하는 것에 약간 걱정을 가지고 있던 터라 대답이 느리게 나오려는데, 갑자기 로즈힐이 훅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하하, 미안해요, 영애. 로즈힐이 드레스에 관심이 많아 가지고……. 그런데 정말 어쩜 이런 디자인을 생각했어요? 영애에게 잘 어울려요.”

자신을 영락없는 영애로 생각한 이들은 마치 동생을 대하듯 말을 붙여 주고 있었다. 더 뭔가 오해가 쌓이기 전에 얼른 이야기를 해 줘야 할 거 같았다.

“저는 이그노트 공작부인이에요. 이름은 사샤라고 해요.”

최대한 별일 아니라는 듯이 그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이 아가씨들이 어떻게 반응을 할지, 그건 살짝 긴장이 되었다.

이렇게 해맑은 아이들에게조차 외면을 받는다면…… 그건 약간 상처가 될 것 같은 느낌도 들었기 때문에.

로즈힐와 라다는 그녀의 말에 입을 살짝 벌렸다가 속히 정신을 수습하고는 놀라 벌어진 입을 재빨리 정리했다.

“그, 그, 아, 죄송합니다, 공작부인, 부인께서 머리카락을 이렇게…… 부인들은 대체적으로 업스타일을 하셔서…… 게다가 처음 보는지라 당연히 영애이실 줄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공작부인…….”

너무 무서워하는 듯이 보이니까 오히려 이쪽이 좀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로제 말대로 이렇게 하고 오긴 했는데…… 그냥 부인인 거 티 나게 하고 올 걸 그랬나.

“괜찮아요. 제가 아가씨처럼 보인다는 거니까 좋은 거죠, 뭐.”

어느 시대든, 유부녀로 안 보인다는데 좋은 거지 뭐. 사샤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하자 라다랑 로즈힐은 서로를 바라보며 무언의 눈빛을 나누었다.

그러더니 들썩이던 엉덩이가 그대로 자리에 딱 붙었다. 오호. 왠지 로제가 노린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 이 자리에 같이 앉아도 되나요, 공작부인?”

“그럼요. 괜찮아요.”

사샤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흔쾌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눈빛을 반짝이더니 샴페인 잔을 들었다.

“이렇게 같이 만난 것도 인연인데 건배 한번 해요!”

라다는 굉장히 적극적인 성격인 모양이었다. 그녀의 주도하에 건배를 하고 났더니 시녀들이 바삐 움직여 그들 앞에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우와……. 역시 황실이라 퀄리티가 남다르네요!”

라다가 서빙된 음식을 바라보며 호들갑을 떨고 있자 로즈힐이 팔로 밀어 대며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주었다. 사샤는 밝은 소녀들의 모습에 그저 기분이 좋아졌다.

“공작부인? 어떤가요? 음식은 입에 맞나요?”

그때였다. 문득 테이블 사이로 스윽 인기척이 다가오더니 가시 돋친 목소리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 왔다.

사샤는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차리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예, 황후 폐하. 아직 입에도 대지 않았지만 좋은 음식들이라는 건 보기만 해도 알겠네요. 먹고 난 뒤에 다시 가서 음식이 어땠는지 대답해 드려도 될까요?”

혹시라도 그녀가 말을 걸면 그냥 간단간단하게, 예의만 딱 지킬 정도로 대답을 하려고 했는데, 한번 경험해 보기도 했고, 또 그렇게 가시 돋친 말들을 해 대니까…… 이쪽에서도 마음이 곱게 써지지가 않았다.

사샤의 대꾸에 아래에서 라다와 로즈힐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황후는 곧바로 그녀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처음 출석에 그래도 말 걸어 주는 이들을 만나 다행이군. 즐기다 가요. ……이그노트 공작에게도 안부 전해 주고.”

황후는 그렇게 자기 할 말만 마친 뒤 휙 뒤를 돌아 다른 테이블로 갔다. 대답할 틈도 없이 대화를 끊어 버리는 것은 다른 사람이 했다면 무례했을 테지만, 누가 황후에게 그것을 논하겠는가. 다른 테이블의 여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웃는 얼굴로 황후를 맞이했다.

역시, 황후는 카일러에게 마음이 있는 게 분명했다. 중요한 것은 그녀는 황후이고, 카일러 또한 공작부인을 맞이한 이 시점에서마저, 그 마음을 숨길 생각 없이 제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큼큼, 아니…… 솔직히 좀 이상하지 않아요?”

그때 목을 가다듬은 라다가 몸을 수그리더니 한껏 작은 목소리를 내었다. 황후가 지나간 길에는 눈길도 주고 있지 않았지만, 다른 두 사람은 모두 그녀가 하는 말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챘다.

오호라, 이거 봐라. 사샤는 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일단 접어 둔 상태였는데 뜻밖의 곳에서 정보를 얻게 생겼다.

“이상……한가요.”

사샤는 질문하는 것도 아니고, 약간 되묻는 듯한 뉘앙스로 그 질문에 대답했다. 마치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탄식을 담은 듯한 그녀의 말에 로즈힐과 라다가 순간 발끈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럼요! 이상하죠! 이미 결혼을, 그것도 황제 폐하와 결혼을 해 놓고 다른 이를 마음에 품고 있다니요. 그게 이상한 게 아니면 뭐겠어요?”

역시. 틀리지 않았다. 황후가 되고서도 놓지 못하는 그 마음. 그 간절한 마음이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확실히, 카일러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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