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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26화 (26/128)

26화

황후가 참석하는 사교 모임의 경우는 물론 황궁에서 열렸다. 황후의 궁은 황제가 머무는 본궁과 이어지는 정문 쪽과 별도의 진입로를 가진 후문이 있었다.

사교 모임이 열릴 때에는 황후전의 1층 홀과 응접실, 그리고 후문 앞으로 펼쳐진 넓은 잔디밭이 모두 연회장이 되었다.

“저쪽, 저쪽에 테이블이 비었잖아. 어떻게 된 거야?”

그 중심에서 미디에나는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황궁의 온 시녀들을 모두 동원한 듯 황후전을 바삐 오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날카롭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예, 폐하. 음식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어서 확인하고…….”

“이제 곧 손님들이 도착한다! 서둘러!”

미디에나는 시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딱 자르고 외쳤다.

황후가 주최하는 일이 여러 번이 아니어서 항상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모임을 통해서 부인들과 친분을 쌓고 통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모임이라 생각하는 만큼 더더욱 완벽하게 마치고 싶어 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다른 때와 조금 달랐다. 매년 새롭게 어른이 된 영애들이 새롭게 참가하곤 했지만 크게 주목을 받을 만한 이는 많지 않았다.

지난해에 어른이 되어 처음 참석했던 이베른 후작가의 영애가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서 모두들 기대 반 경계 반으로 맞이했던 일 외에는 별일도 아니었다.

“황후 폐하. 그간 강녕하셨나요? 제가 오늘도 일찍 도착한 모양입니다.”

사근사근 웃으며 인사를 해 온 이는 바로 다테젠 후작부인이었다. 그녀는 미디에나가 황후로 거론되던 때부터 그녀에게로 힘을 실어 주던 이로써 그녀가 하는 일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쏟아 주던 이였다.

누구보다 신뢰하고 누구보다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웃는 얼굴 뒤에 가시를 감추고 있으면서도 가시를 세울 곳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아주 현명한 여인이었다.

“어서 와요. 이제 마무리되어 가던 중이었어요. 다테젠 부인이 한 번 더 둘러봐 주시겠어요?”

“보나 마나죠, 새삼스럽게……. 폐하께서 얼마나 섬세하신지 잘 아는걸요?”

꺄르르 웃는 웃음소리가 거의 소녀의 것이나 다를 바 없이 청량했다. 만족스럽게 회장을 돌아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데, 문득 다테젠 후작부인이 말을 덧붙였다.

“그나저나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이그노트 공작부인, 이번에 참석하겠다고 연락이 왔다면서요?”

약간의 이죽거림이 담긴 목소리가 담은 이름에 순간 조절을 할 틈도 없이 미디에나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이베른 영애만큼 예쁘진 않다고 하던데…… 사실 누구도 그 영애…… 아니, 그 부인을 본 사람이 없다네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아 이제까지 그냥 후작저 안에서만 살았다고 하는데……. 오래 아픈 사람은 금발도 마른풀이 된다 하죠.”

다테젠 후작부인은 그간 들어 왔던 이야기들을 취합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직접 그녀를 만난 적이 있던 미디에나는 대번에 황궁에서 만난 그녀를 떠올렸다.

윤기 나는 금발 머리카락에 햇살이 투명하게 빛나던 다갈색 눈동자, 디자인도 심플하고 풍성하지도 않고 화려한 장신구마저 없는 드레스를 단정하게 빛내던 그녀의 모습은 한눈에 보기에도 예뻤다.

갓 사교 모임에 출석할 수 있게 된 여느 영애들은 생기는 있지만 무게감이 없었다. 청량한 만큼 어쩔 수 없는 가벼움이 있었는데, 그녀에게서는 그런 게 느껴지지 않았다.

작년에 열아홉이 되어 사교 모임에 출석을 시작한 이베른의 영애가 둘째라 했으니 지금 최소 스물한 살일 텐데…… 그 풋풋한 나이에도 왠지 우아한 느낌이 나는…… 그런 여인이었다.

“병 때문에 숨겨 자라게 했다면 사교계가 어떤지 하나도 모를 텐데 홀로 여기 참석한다니 대범도 하네요. 어떻게 해 볼까요, 폐하? 역시 무시가 답일까요?”

그녀를 탐탁지 않아 하리라는 건 다테젠 후작부인도 물론 알고 있었다. 그녀의 기운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넌지시 질문을 던진 것이다.

괴롭혀서 아주 사교계 쪽엔 발도 못 들이도록 본때를 보여 주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은데. 다테젠은 불을 품은 미디에나의 성정을 알고 있는지라 아주 재미난 유희를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살짝 근질근질한 느낌이었다.

“뭐…… 다테젠 후작부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해. 내가 그런 것까지 손댈 순 없잖아? 우리 모임은…… 어른들이 모이는 곳인데 말이야.”

미디에나는 자유를 주는 척하며 슬쩍 발을 뺐다. 그렇게 말한다는 건, 그녀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죄를 묻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테젠은 갈색 눈동자를 빛냈다. 한 명 한 명 도착하는 귀족 부인과 영애들의 인사를, 황후의 옆에 서서 함께 건성으로 받으며 그녀는 어떤 사람이 올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입구를 주시하고 있었다.

*

“와…… 이곳은 더 화려한데요……?”

지금 이 시대 여자들의 최고 유행은 아무래도 화려함인 모양이었다. 드레스도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화려하게 입고 색깔도 현란하도록 화려하더니만 황후궁에서 여는 사교 모임 또한 어마어마했다.

황실의 연회와도 맞먹는 수준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석들이 마치 밤하늘을 그대로 끌어 내린 듯이 찬란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낮인데도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나 싶을 만큼 보석들이 빛을 반사하고 있어서 황후궁 문 앞 잔디밭에서부터 정말 눈부시도록 환했다.

그리고 한쪽 길을 따라 쭉 이어져 있는 긴 테이블 가득 음식들과 디저트와인, 샴페인 등등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이 가득 차올라 있었고 테이블마다 예쁜 꽃이 잔뜩 올라 있었다.

“눈이 어지러운 것 같습니다. 여인들만 모이는 모임은…… 이렇군요.”

이그노트 공작저에서 여인이 하는 일을 경험한 적이 없었던 딜런은 이런 화려함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보통 잡으러 가면 숨어 다니는 반란 분자들을 처리하고 다니거나 마물이 나오는 회색빛 숲을 다니는 게 전부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무채색의 건조한 풍경이 제일 익숙한 것이었다.

그나마 이그노트 공작저의 웅장함과 화려함이 그가 아는 전부였는데, 보석을 마치 식물의 이파리처럼 여기저기에 장식해 두었다는 거 자체로 약간의 충격이 오는 듯했다.

“그나저나 그냥 저 혼자 와도 되는 자리 아닌가요? 괜히 할 일 있으신 분이 저 때문에 시간 버리고 계시는 거 아닌지…….”

딜런은 공작저의 기사단 중에서도 아마 제일 실력이 좋은 자가 아닌가 싶었다. 그가 눈에 띄는 자리는 항상 그의 곁이었기 때문이다. 카일러가 하는 일에 가장 최전선에서 움직이고 있는 거 같은데, 공작부인의 에스코트 일을 맡겨서 조금 그랬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공작가의 안주인의 호위를 맡는 영광을 제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생 할 수 없는 일이 될 뻔했던 것이었다. 카일러가 결혼을 해야지만 가능했던 일. 그는 자신의 능력도 그렇지만 부모님이 주고 간 상처 때문에 결혼이라는 것은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공작부인이 되어 주신 것부터가 감사한 일이니 그런 건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딜런은 우직하고 고지식한 사람이라 달래기 위한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카일러라는 사람이 그렇게나 무뚝뚝하고 무섭고 냉랭한 사람일지라도 누군가를 속이고 아프게 하고 못되게 구는 사람은 아니어서 그런지 그의 주변 사람들도 다양하기는 했지만 못된 사람은 없는 거 같았다.

입구에는 초대장을 확인하는 인물이 있었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초대받은 여인들만 입장할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으시면 여기까지만 나오시면 됩니다. 제가 바로 여기에 있겠습니다.”

딜런은 절대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듯 우직하게 서서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알겠다고 해 버리면 정말 끝까지 한 발짝도 안 움직일 것 같았다.

“그럴 거 없어요. 귀족 부인들이랑 영애들만 있는 곳인데 뭐 그렇게 급할 일이 있겠어요. 편히 쉬고 계세요.”

“하지만…….”

“다녀올게요.”

“이그노트 공작가의 사샤 이그노트 공작부인 입장하십니다!”

그녀가 입구로 발을 들이자마자 그녀의 등장을 커다란 목소리가 안으로 전달했다. 그리고 그 이름에 안에서 화기애애하게 이어지고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어이구…… 이렇게나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반응이라니. 약간…… 쫄리는데.

카일러 하나만 붙들고도 충분히 살아날 수 있을 것도 같지만…… 기왕이면 너무 의존하지 않고 나 스스로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이런 시기의 여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역시나 여인들의 모임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어울려서 제 편을 만들거나, 아주 장악을 해 버리거나.

적어도 내가 얕보아도 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그노트 소속이라는 거 거짓말이지, 어? 어디서, 사칭을 해도 유분수지. 말해! 말하라고!”

이그노트의 사람이라는 말에 앞뒤 가리지도 못하고 와락 화를 내던 미디에나 황후가 떠올랐다.

공작부인이라는 말을 듣고 난 뒤로는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며 말을 제대로 꺼내기 전 카일러가 도착해서 험한 말을 듣지는 않았지만…… 곧바로 정신을 수습했다면 더 심한 말도 들었을 것 같았다.

관계가 어떻게 되든 황후의 미움을 받고 시작하는 것이라니. 조금 불리한데.

그녀는 그럼에도 고개 숙이지 않도록 턱을 살짝 들며 안으로 들어갔다. 압도되지 않을 힘은 물론 카일러를 떠올리는 것으로 얻었다.

내게는 돌아갈 곳이 있고, 나를 믿어 주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무슨 소리를 듣든 간에 그것이 내 전부가 아니고, 거짓된 정보 속에서 오해로 시작되는 것이니 그걸 바꾸려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포기하고 그 굴레 안에서 살던 때와는 달라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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