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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25화 (25/128)

25화

대부분 사람들의 기척 정도로만 채워지던 공작저가 오늘따라 소란스러웠다. 떠들썩하다……는 표현이 맞을 듯했다.

제국 수호의 의무를 지고 있는 카일러는 자주 저택을 비웠고, 그가 저택에 있다고 해도 고요히 내부에 머무는 게 다였기 때문에 소란이 일어날 일이 없었다.

그나마 어린 하녀들이 조잘조잘 수다 떠는 소리가 소음의 전부였다.

카일러는 저택을 채우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게 시끄러운 것인 아니라 사람이 사는 소리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나저나 이런 소란을 일으킬 사람이라면…… 역시 그녀겠지.

카일러는 아침부터 박혀 있던 집무실에서 나와 소리가 들리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응접실 쪽으로 눈을 돌리자 열려 있는 문으로 하녀들이 기웃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문득 안에서 사샤가 어떻게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드레스를 고르고 이것저것 입어 보는 모습이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꺅……! 핫! 죄, 죄송합니다, 공작님. 일어나셨어요…….”

그런데 카일러가 입구 쪽으로 걸어와 하녀들과 마찬가지로 안을 슥 들여다보려던 찰나, 그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하녀 하나가 그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가 바로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머리를 조아렸다.

주인을 보고 비명을 지르다니, 옆에서 다들 사색이 되어 뒤돌아 카일러에게 인사를 올렸다. 정작 카일러는 하녀가 놀라든 사과를 하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냥 고개 한 번 주억거리곤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금까지 치수를 재시고, 다시 최종적으로 어떤 디자인으로 하실지 고르실 거래요.”

그런 그를 올려다보던 새라가 차마 얼굴 보고는 말 못 하고 그의 발치로 시선을 내리고는 안쪽 상황을 전하였다.

“……너희들은 그런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

카일러는 옹기종이 모여서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머리만 모으고 있는 어린 하녀 네 명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작다고 여긴 사샤보다도 더 키가 작아 보이는 네 명의 하녀들은 그의 질문에 쭈뼛거리며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꾸중하는 거 아니다. 안에 들어가서 보지 않고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고.”

하녀들 또한 자신을 직접 대하는 걸 어려워한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카일러는 분위기를 살펴 그녀들에게 보태어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강하게 긴장하고 있던 하녀들은 나름 긴장을 풀고 그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카일러에게 들어가 보라 해 주는 것 같았다.

“괜, 괜찮습니다. 저희는 일하러…….”

그때, 카일러가 뒤에서 팔을 뻗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팔에 걸려 그의 힘에 떠밀린 하녀들이 응접실 문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아, 공작님, 오셨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고 디자이너와 로제 셋이서 디자인 이야기 중이던 사샤는 카일러에게 말을 걸며 동그랗게 뜬 눈으로 우왕좌왕하는 하녀들을 둘러보았다.

“너희들!”

“으아, 죄, 죄송합니다!”

로제가 그런 그녀들에게 호통을 치듯이 목소리를 높이자 화들짝 올란 아이들이 죄송합니다를 큰 소리로 외치며 우르르 응접실을 앞다투어 나갔다.

“로제,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돼. 쉬지도 못할 만큼 일이 바쁜 것도 아닌 듯한데 .”

그 뒤꽁무니를 쫓아 나갈 듯이 위협하는 로제를 보며 사샤는 그녀를 만류해 보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몰아닥친 하녀들 뒤로 서 있던 카일라를 다시 보았다.

왠지…… 드레스를 맞추는 과정이 궁금했던 하녀들과 마찬가지로 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그런 생각에 살펴보고 있던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정면으로 마주친 그의 눈동자가 계속 마주 보지 못하고 또륵 다른 방향으로 굴러가는 눈동자가 그런 그녀의 의심을 뒷받침해 주었다.

“치수는 다 쟀고, 디자인 정해서 말해 주면 오늘은 우선 끝이래요. 저는…… 이런 걸로 해 달라고 했어요.”

사샤는 평소 입고 있던 것처럼 과하지 않은 디자인을 보였다. 소매가 과하게 풍성하거나 치마를 겹겹이 덧대거나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노출이 심한 것도 아니었다.

카일러는 영애들의 드레스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터라 정확히 뭐가 다르고 그런 건지는 잘 몰랐지만 보던 것들에 비해 덜 화려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은가. 다들 풍성하고 반짝거리고…… 뭐 그런 것 같은데.”

“공작님은 화려한 거 좋아하세요?”

사샤가 문득 그에게로 질문을 돌렸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은 아무리 봐도 화려와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이 정도 지위를 가진 여인이 드레스를 이렇게 간소하게 입으면 예의상 안 된다거나……. 위치상 어느 정도의 드레스는 입어 줘야 한다거나……?

물론 그런 제약이 있었다면 카일러보다 로제나 마담이 먼저 그녀에게 말을 해 주었겠지만 그의 반응이 그런 의미인 듯해서 다시 물어보았다.

“그, 그런 건 아니다. 나는 전혀 문외한인 부분이니……. 내 반응을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궁금은 했지만 참견할 생각은 없었던 카일러는 잠시 응접실 입구 언저리에 서서 가만히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샤와 로제, 그리고 디자이너는 또 그들대로 공작이 방문의 이유조차 밝히지 않은 채로 입구를 막고 서 있으니 신경이 계속 쓰이고 있었다.

“그…… 계속해도 될까요……?”

마담이 그의 눈치를 보며 사샤에게 물었다. 그나마 사샤는 그에게 별다른 이유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확인차 묻는 마담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공작님 말씀대로 화려하지도 않고 풍성하지도 않을 겁니다. 대신 좋은 원단을 사용하고 고급스러운 포인트 액세서리로 시선만 딱 사로잡을 만한 아주 심플하고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만들겠어요.”

사샤의 선택은 사실 마담으로서는 매우 큰 도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저 화려하고 풍성하게 만들면 되는 최근 유행과 많이 다른데도, 공작부인이라는 높은 지위에 걸맞은 품위는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황후 다음가는 여인을 위한 드레스. 마담은 아주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걸 어느 정도 눈치챈 사샤도 한껏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럼 세세한 것은 후에 확인하면서 진행하는 것으로 하고, 저는 이만 디자인부터 시작하러 가 보겠습니다. 의욕이 샘솟는군요.”

도전 의식을 불태우며 마담이 의상실 직원들과 함께 응접실이 가득 차도록 잔뜩 부려 놓은 드레스과 원단 등등을 챙기고는 인사와 함께 공작저를 벗어났다.

분명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응접실인데 그 안에 서 있는 사샤와 카일러는 살짝 넋을 놓은 채였다.

“드레스 준비가 꽤 정신없으셨죠?”

로제는 초점 잃은 눈동자로 응접실을 돌아보고 있는 사샤를 향해 말을 붙여 보았다. 눈꺼풀을 깜빡깜빡하던 사샤는 이내 초점을 찾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

“왜 제일 먼저 시작하자 했는지 알 것 같네. 그리고 기대도 되고…….”

화려한 것에는 관심이 없지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무언가 만들어진다는 것에는 약간 설렘이 느껴졌다. 오로지 날 위한 것이라는 말의 울림에 살짝살짝 입꼬리가 올라갈 것 같았다.

“그 외에도 이제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가서 모두들 사샤 님에게 와 인사하려 들 것이고 하니 누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아 두시면 좋을 듯합니다. 공부를 좀…… 해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로제가 덧붙인 말에 사샤는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나 사람을 대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인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꼭 바로 알아야 하겠는가. 한꺼번에 모두 알아 가기엔 무리가 아닌가.”

그때 예상외로 카일러가 그녀를 거들고 나섰다. 본인이야 어렸을 때부터 어깨너머로 보고 귀동냥으로 들으며 자라 왔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들인데, 사교 모임의 참석을 위해 거기 모일 모든 여인들의 이름을 외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물론 다 외우지 않으셔도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알면 아실수록 사샤 님께서 그 자리에서 맞닥뜨릴 위험 같은 것에서 벗어나기가 수월하긴 할 것입니다. 제가 곁에 계속 머물러 있지는 못 할 것이기 때문에…….”

로제의 말에 사샤는 눈을 깜박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긴 하겠지만 해 볼게요. 음…… 조심해야 할 사람보다, 공작부인으로서 알아봐 주는 것이 좋은 분들부터…… 외우겠어.”

사샤는 웬일인지 의욕이 넘쳐 보였다. 말이 나온 김에 사샤는 바로 시작하자고 말하면서 응접실에서 공부를 시작할 판이었다.

“……사샤.”

“예?”

이대로 두면 쉼도 없이 바로 시작할 모양새라 카일러가 그녀를 불렀다.

귓가의 소란이 오늘은 좀 잠잠한 터였다. 흔치 않은 기회여서 사샤를 보러 오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 때문에 내려와 본 것이었다.

그렇다고 의욕 넘치는 그녀의 기분을 꺾을 수는 없어서, 카일러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 놓고도 자신을 바라보는 다갈색의 눈동자에 하지 말라고는 못 했다.

“점심 식사는 제대로 했는가. 알기로…… 아침부터 줄곧 드레스에 매달려 있다 했는데.”

그래서 아주 잠깐, 점심 식사하는 시간만 조금 같이 있어야겠다 생각했다.

“아, 그렇네요. 공작님 말씀 듣고 보니까 배가 고픈 것 같아요.”

이거저거 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 있던 사샤는 카일러의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녀의 미소에서 그런 뉘앙스를 읽은 카일러는 편안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손을 본 사샤는 지체할 것도 없이 걸어와 그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힘든 일 도중 쉬어 가는 의미로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손을 잡아 오는 그녀의 작은 손을 카일러는 꼬옥 쥐었다. 조금의 틈도 없이 감싸 쥔 손을 이끌어 함께 걸어가는 기분도…… 꽤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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