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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24화 (24/128)

24화

“그렇습니다. 제가 드레스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욕구라는 것은 없을 것만 같던 로제에게도 취미가 있었다. 원래 있던 곳의 말로 하자면…… 드레스덕?

속으로 쿡쿡 웃음이 나는 걸 겨우 참으며 사샤가 자리에서 일어나 행거로 향했다. 그중 그냥 무심히 드레스 한 벌을 집어 들더니 옷 갈아입는 방으로 쏙 들어갔다.

그러자 직원이 황급히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조금만 애쓰면 혼자도 입을 수 있던 기존의 것과 다른 드레스에 허둥대던 사샤는 따라 들어온 직원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제대로 입을 수 있었다.

“사샤 님……?”

사샤가 벌써 옷을 입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들의 덕심을 건드렸던 걸 해소해 줄 모양이었다.

“어머, 어쩜! 터프하시기도 하지. 정말 다 어울려 버림 어떡하죠. 로제?”

마담은 그녀의 모습에 반하기라도 했는지 꺅꺅 목소리 톤을 올리며 피팅룸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분에서 눈을 못 떼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로제는 자신의 진심을 들킨 것도 살짝 놀라웠지만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움직여 주는 것도 놀랐다.

“나갈게.”

그녀에게 가장 어울리는 드레스를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

카일러는 외출했다 돌아온 시간이 너무 늦어서 조금 마음이 급했다. 그래도 들어와서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을 제일 먼저 하고는 잠옷을 입은 그대로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공작님.”

그녀의 방문 앞에는 로제가 서 있었다. 그녀는 피곤한 기색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앞에서 카일러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카일러의 얼굴이 대번에 싸늘하게 굳었다.

“무슨 일인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아니라면 로제가 저렇게까지 기다릴 리가 없었다.

그런데 왜 자신의 방이 아닌 그녀의 방문 앞에…… 서 있는 것이지.

다급한 그의 목소리에 로제는 아랫입술을 한번 지그시 깨물었다가 가볍게 묵례를 했다.

“사샤 님께서 사교 모임을…… 참석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아, 그것……. 그런 류의 편지들을 모두 감추고 있었는데 로제가 그것만큼은 빼뜨릴 수 없어 결국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그쪽 관련해서는 사실 자신보다는 로제가 더 잘 아는 수가 있으니까 그녀가 알아서 할 수 있도록 여지는 준 것이었다.

그리고 선택은 사샤가 했을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단은, 첨언 없이.

그리고 그것에 당사가자 약속을 지키기로 했으니 잘 서포트해 주면 되는 일이었다.

“오늘…… 사샤 님과 함께 의상실에 다녀왔습니다.”

음, 하는 나직한 울림을 냈다. 아직까지는 큰일이랄 것은 없었다. 연회나 모임 같은 데서 여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드레스였으니까. 그걸로도 문제는 없는데…….

“저 그래서……. 오늘 점심 이후에 나가서는 저녁 식사 시간까지 써 가며 엄청 많은 양의 드레스를 갈아입고 돌아왔습니다.”

로제는 오늘따라 답지 않게 핵심으로 가는 길이 너무 멀었다. 띄엄띄엄 말하는 것이 더 수상해서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슬쩍 난감하다는 미소를 짓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샤 님이 오늘은 많이 피곤하셨을 겁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기 조금 송구하지만……. 오늘은 괜찮으시다면, 각자의 방에서 주무시는 것이…….”

카일러는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에 잠깐 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우직하니 바라다보게 되었다.

로제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를 못 하고 있던 카일러는 진지하게 눈썹을 굳히고 있다가 문득 그녀의 얼굴이 삭, 스쳐 갔다.

“아.”

로제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이제 알았다.

그녀가 살이 잘 붙지 않는 이유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가.

혹시나 그녀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은 아닌가 염려했던 것이 허탈해질 지경이었다. 아마 오늘 조금 피곤한 것으로 로제가 이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걱정하는 일은 없다. 음…… 힘들게 하지 않을 테니.”

로제는 그제야 살짝 카일러의 눈치를 보았다. 그가 입술 끝을 슬쩍 올렸다.

“날 막아선 용기 좋았다.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러 올 정도로 공작부인과의 관계가 좋아진 듯하군.”

하지만 그녀가 사샤와 진전이 있었듯 사샤와 자신 사이에도 비슷한 시간이 흘렀다. 사샤가 함께하기 싫은 티를 조금이라도 냈다면 그가 모르고 넘어갔을 리 없을 것이다.

“나를 뭐로 봤는지 모르겠으나…… 아니다, 그래. 참고하도록 하지.”

카일러는 씨익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로제를 지나쳤다. 그리고 그녀의 방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그가 이미 들어가기로 결정했으면 그건 로제가 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의 몸 상태를 생각해 줄 것이라고 믿는 것뿐이었다.

로제는 그의 뒤에 대고 허리를 살짝 숙인 다음 뒤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 또한 매우 피곤했던 터라 어서 가서 쉬어야 다음 날을 이길 수 있을 듯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카일러는 촛불 몇 개만 일렁이는 어두운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로제가 왜 막았는지 알 것 같았다. 벌써부터 침대 안쪽으로부터 새액새액 규칙적으로 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그는 사박사박 조심스럽게 발을 놀려 그 침대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사샤는 정말 멋모르고 잠에 푸욱 빠져 있었다. 새액새액 숨이 오가는 소리를 따라 가슴이 들썩거리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정말 이렇게 깊이 자고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하겠군.”

하지만 왠지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마냥 그 자리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고 싶었다.

카일러는 침대로 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옆으로 몸을 누였다. 코앞에 새액새액 숨을 쉬는 그녀의 얼굴이 있었다. 내쉬는 숨이 제게로 와 닿았다.

보고 있으려니 보는 것만으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결국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숙면을 방해하지 않으려 손가락으로 윤곽선을 따라 그리는 사이 그녀는 눈을 감고도 슬쩍 미소를 지었다.

가까이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있는 것을 느꼈는지 작은 몸이 꿈틀거리며 제게로 다가오려 했다.

그 모습에…… 왠지 이상하게 코끝이 시린 느낌이 들었다.

카일러는 잠깐 망설였지만 그녀의 몸을 당겨 끌어안아 주었다.

조심스럽게 그녀를 당겨서 안자 나머지는 사샤가 움직였다. 순간 깨어났나 싶을 정도로 그녀는 스스로 움직여 그의 품에 파고들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허리에 팔을 둘러 온 것이다.

“사샤……?”

하지만 역시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온기를 찾는 것은 잠결에도 가능한 일이었군.

오늘은 싸우고 들어온 것도 아닌데 괜히 피곤해했던 것에 비하자면 그녀를 보고 난 지금은 몸과 마음의 긴장이 와르르 풀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금 더 쓸어 주던 카일러는 자기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옆에서 온기를 나누는 몸을 안고 조용히 꿈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

사샤는 눈을 뜨다가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분명히 어제는 그가 늦게 들어온 데다가 본인이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었다. 다음 날에도 아직 결론짓지 못한 것에 대해 정리하러 가야 했기 때문에 좀 급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감각은…… 카일러와 함께 밤을 보내고 잠들고 일어났을 때의 감각이었다.

온몸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그의 팔과 다리에 얽혀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저를 이렇게 끌어안고 잘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문제는 없는데…….

어, 이상하게 아래가 아프지도 않았다.

우선 이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에 힘을 주는데, 벌써 자신을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정말…… 깨우지 않고 이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이상하게 도전 의식이 생기는 것 같은 정도였다.

하긴 이렇게나 얽혀 있으면 안 건드리고 깨는 거 자체가 불가능한 게 맞는 거 같았다.

“깼어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는데 제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어서 ‘어’ 자는 거의 묵음으로 나와 버렸다. 쿡,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우스꽝스러운 목소리였다고 지금 웃는 거야? 발끈한 사샤가 그를 밀어내려 하는데 카일러가 문득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더니 고개를 내려 왔다.

쪽.

“아…….”

“좋은 아침. 목소리 갈라지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대로 입술을 맞춰 온 그가 사샤와 마찬가지로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복수하듯 사샤가 하하 웃어젖히는 소리에 씨익 또 미소를 짓던 카일러가 이번에는 아까보다 길고 깊게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움…… 핫, 가, 갑자기 아침부터 왜 이래요오…….”

겨우 입술에서 벗어난 사샤가 당황해서 묻자 그는 그녀의 머리를 살짝 당겨 가슴에 품어 안았다. 사샤의 귀에…… 그의 심장이 쿵쿵 강하게 뛰는 것이 고스란히 들렸다.

“이 울림을 알고 있는가. 나는 이걸……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들었는데, 말이야. 진짜 그런 건지 나는…… 아직 모르겠어서.”

살아 있으면 끊이지 않고 뛰어야 하는 것이 심장이가. 너무 빨라도 너무 느려도 안 되는 그것이 갑자기 이렇게 강하게 뛰어 대는 거면,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어느 책에서 사랑을 알 수 있는 법에 대해 그렇게 나온 말을 읽었던 것이다. 심장으로 그걸 알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음…… 글쎄요. 저도 들은 적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심장이 뛴다고요. 이 정도면…… 정말 저를 좋아하는 걸까요? 뛰지도 않았고, 깜짝 놀라지도 않았으니까……. 이 울림은 저를 위한 건가요?”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그의 심장은 정말로 요란하게 뛰어 대고 있었다.

물론 그를 보는 자신의 심장도 이렇게 뛰는 때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이런 움직임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자신을 안고 뛰어 대는 이 심장의 울림이라는 게…… 이게 나를 위해 뛰고 있다는 생각에 사샤는 기분이 너무 좋아졌다. 정말로…… 내 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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