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드레스를 맞추셔야죠.”
응?
전혀 생각도 못 한 준비할 일에 사샤는 어리둥절해졌다.
“직접 의상실에 들러 사샤 님께 어떤 디자인이 어울리시는지 살펴보시고, 다음부터는 디자이너를 이곳으로 불러서 맞추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샤가 어버버하는 사이에 로제는 딱딱 계획을 이미 세워 둔 사람처럼 브리핑을 했다. 아마 지금 바로 나가자 하면 나갈 것 같은…….
“사샤 님께서 오늘 이후에 계획해 두신 일정이 없으시다면 바로 나가시는 것도 좋습니다.”
왠지…… 눈이 반짝이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뭐, 필요하니까 말하는 거겠지. 제일 먼저 해야 할 만큼 중요한 거겠지. 사샤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 좋아. 점심 먹고 나가도 괜찮을까?”
“그럼요. 지금 씻어 두시고, 식사하고 바로 저와 함께 나가시죠. 저도 준비해 두겠습니다.”
로제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그녀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러고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무래도 일어나라는 눈치인 것 같았다.
뭔가 미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사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움직이는 것까지 확인한 로제가 재빠르게 돌아서서 잰걸음으로 저택으로 향해 갔다.
*
“조심히 다녀오세요!”
저택 입구 쪽으로 모인 하녀들이 일제히 사샤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녀들은 왠지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인사하는 목소리마저 우렁찬 느낌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에 저택에 문제 생기면 두 배로 혼나는 거…… 알고 있지?”
“예, 옙!”
로제는 사샤의 뒤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 먼저 오른 사샤가 보기에 로제의 외출은 남은 어린 하녀들에게 아마 일탈과도 같은 일인 것 같았다.
그녀를 데리고 외출해 주는 공작부인은 저 어린 아이들에게 점수를 좀 땄을까.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사샤가 씨익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의상실은 그리 멀지 않았다. 마차를 타고 나가는 것도 두 번째라 창밖의 풍경 변화에 또 푹 빠져 보였다.
생각보다 꽤 구조가 있는 그곳은 총 2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이었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이쪽을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어서 오십시오!”
높다란 톤의 목소리 하나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수완 좋아 보이는 영업용 미소를 지은 여인은 그들을 빠르게 스캔했다.
귀족은 분명 사샤인 듯한데 익숙한 얼굴이 아니자 당황해서 하녀인 로제 쪽을 바라보았다. 분명 젊은 아가씨를 모시고 나온 중년의 하녀인 듯한데 얼굴은 모르겠고…….
왠지 사샤의 눈에도 그녀의 고민이 보이는 듯해 쿡, 하고 웃음을 지었다.
“로제.”
“예, 부인. 이그노트 공작가에서 왔다. 마담은 안 계신가.”
로제가 나긋한 목소리로 이르자 그 뜻을 단번에 캐치한 직원은 휘둥그렇게 뜬 두 눈에 대번에 사샤에게로 향했다. 마냥 수수한 어린 영애로만 보였는데…….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마담! 마담!”
직원은 고개 숙여 양해를 구하자마자 바로 뒤를 돌아 큰 소리로 마담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 마담이라는 사람이 이 의상실의 주인인가 보다. 디자이너?
곁에 로제가 있으니 긴장도 없이 의상실 안을 쭈룩 둘러보았다. 행거에 걸려 있는 것과 토르소에 입혀져 진열된 수많은 드레스들이 빛나고 있었다.
공작저에도 드레스가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차분하고 색이 진한 것들이 많았다. 어머니의 드레스라고 했으니 아마 그 시대의 유행이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의상실 안에 걸려 있는 것들 몇 개만 보더라도 색이 매우 밝고 풍성하고 화려한 것들이 많았다. 의외로 화려한 옷은 선호하지 않는 사샤로서는 꽤 난관이 예상되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이그노트 공작부인! 저희 의상실을 찾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도도도 급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했더니 저 안쪽에서부터 급하게 달려온 여자가 사샤의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온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 그녀는 사샤와 눈을 한 번 더 맞춰 인사를 하곤 바로 눈을 돌려 그녀의 옆을 바라보았다.
“로제! 이게 얼마 만이야!”
“오랜만에 나왔지.”
의상실의 마담과 로제가 나누는 살가운 인사에 사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아마 사이에 사샤가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두 손 꼭 붙들고 재회의 인사를 했을 법했다.
“맨날 그 어린 시녀만 보내더니 오늘은 무슨 일……. 어맛. 죄송합니다, 부인. 부인을 위한 나들이일 게 뻔한데. 그렇죠? 오호호!”
서비스업을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말도 빠르고 톤이 높았다. 정신없이 따라갈 것 같은 말투에 사샤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었다.
“왜 저택으로 부르시지 않고 직접 오셨습니까? 공작저에서 부르시면 바로 달려갔을 텐데요.”
“우선 어떤 디자인과 어떤 색이 어울리는지 싹 정리해 보고 맞출 걸세.”
로제의 깔끔한 정리에 턱을 괴고서 잠깐 생각에 잠겼던 마담은 곁에 있던 직원에게 이러저러 지시를 먼저 내리고 까딱 묵례를 했다.
“이 직원의 안내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세요. 제가 드레스를 추려서 가져오겠습니다.”
싱긋 웃는 마담이 멀어지자 직원이 그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의상실의 가장 안쪽에는 소파와 옷을 갈아입을 공간, 그리고 거울이 있는 곳이었다. 높은 파티션만 길게 친다면 하나의 독립된 공간이 될 것 같았다.
“여기에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먼저 차부터 내오겠습니다.”
직원은 친절히 말하고는 바로 빠릿하게 사라졌다.
“장사가 잘되나 봐. 다들 아주 부지런하게 움직이네.”
그녀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사샤는 그제야 목소리를 내었다. 차분하고 또 차분한 공작가의 사람들과 있다 보니 이 속도감이 이상해졌나 보다.
당연히 대답을 기대하고 말한 것이었는데 로제에게서 답이 돌아오지를 않았다. 제가 앉은 소파 뒤에 서 있을 그녀를 돌아보는데, 로제의 시선이 그녀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마담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옷들이 걸려 있는 방향을 향해 아예 몸까지 돌려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로제……?”
“아, 아, 네, 사샤 님!”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흠칫 놀라서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로제는 무엇을 말할지를 기다리고 있는 얼굴이었다.
내가 하는 말 전혀 안 듣고 있었네…….
그때 커튼이 촤르륵 열리고는 트레이가 먼저 들어왔다. 소파 앞 테이블에는 간단한 티 웨어들이 올라왔다. 그리고 그 트레이가 나가자 바로 마담이 고른 드레스들이 등장했다.
“우와…….”
사샤는 입을 슬쩍 벌린 채로 감탄해 버렸다.
그 짧은 사이에 정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와 색깔의 드레스들이 행거에 힘겹게 매달려 있는 비주얼이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자, 이걸 다 입어 볼 수는 없으니까 하나하나 대 본 뒤에 어울릴 만한 것들을 한번 입어 보시도록 해요!”
마담의 깔끔한 말에 사샤에게 맞는 드레스 찾기는 금방 자리를 잡고 시작되어 버렸다.
홀터넥에 오프숄더, 그리고 노출 없이 다 막혀 있는 것도 있었다. 치마도 사샤가 맨날 입던 홑겹 치마가 아니라 거의 몇 겹이나 되는 풍성한 의상들이 대부분이었다. 하나하나 대 보고 돌아보고, 그리고 또 다음 것들을 꺼내어 대 보고 있었다.
“어쩜? 어쩌지? 부인께서는 어쩜 이렇게 디자인들이 하나같이 잘 어울리시는 거죠?”
바깥에서 내내 고찰을 하고 있는 사이 사샤는 속으로 생각했다. 의상실에서 일하는 기 막히는 텐션에 잘 따라가야겠다고.
“제가 지금 어울릴 만한 디자인들 빼놓고 있었거든요? 이렇게 추려서 하나씩 입어 보시고 여러 가지고 나눠서 해 보자, 했던 건데. 고를 수가 없네요. 어쩜 행복한 고민이야.”
즐거워 보인다 했는데…… 정말 그럴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신기한 마음에 그녀를 바라보던 사샤는 비싯 미소를 지었다.
“다 해 보지 뭐. 오늘 힘들거나 시간 모자라면 또 들를 테니.”
한번 거쳐야 하는 일이라면, 제대로 하고 넘어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게 옷 만드는 거랑은 상관없어서 마담의 시간만 잡아먹는 일이라면…….”
“아유 아닙니다, 부인. 그럴 리가요. 제게 맡겨 주셔서 영광이에요. 이런 작업 해 볼 수 있는 경우도 별로 없고, 이렇게 여러 가지가 어울리는 분을 뵙는 것도 쉽지 않지요.”
마담은 너무너무 즐겁다는 얼굴로 웃으면서 말하고는 다음에 대 본 옷도 입어 볼 목록이라는 뜻으로 옆 행거에 쌓았다.
즐겁게 일하는 것 같아 좋아 보인다고 생각하는 찰나 아차, 놓쳤던 게 떠올랐다. 이 일로 인해 일반 업무 시간의 이상을 외상 고르는 데에 쏟을 로제에게도 미안했다.
“로제, 옷을 알아서 입어 보고 돌아갈 테니 저택으로 먼저 돌아가겠어?”
그런데 흐뭇한 얼굴로 보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얼굴이 싹 굳어 버렸다. 그 변화에 화들짝 놀란 것은 사샤였다.
“사샤 님…… 저 보내시게요? 저 안 보내시면 안 되나요? 곁에서 제가 봐야 나중에 어떤 게 얼마나 어울리셨는지 기억하고 다음 맞춤 때 참고해서 할 수 있으니까……!”
왠지 다급하게 말하는 그녀가 미묘하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옷 고르는 걸 다 지켜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이건 업무상이라기보다…… 왠지…….
“로제, 혹시…… 드레스, 좋아해?”
사샤가 슬쩍 던진 말에 그녀가 입술을 살짝 사리물었다. 혹시 부정하려나 싶었는데 아예 대답을 못 하는 게 쑥스러워 보이는데…… 맞는 것 일까?
“정말이구나? 아…… 그동안 이그노트가에 드레스를 맞출 사람이 전혀 없었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드레스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그노트가는 최악의 조건을 갖춘 집안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