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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22화 (22/128)

22화

“사교…… 모임.”

사샤가 되뇌는 그 단어에 정면에 서 있던 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사샤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회양목 너머 작은 분수가 있는 티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본격적……이라고 하기엔 거창하니까 올바른 공작부인 되기 초급 단계부터 밟아 나가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은 바로 로제였다.

이 공작저의 하녀 중에 유일한 중년의 여인이었다.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공작저에 하녀는 모두 젊었다. 그렇기에 로제가 하녀장으로서 컨트롤하는 일이 많아 보였다. 젊은 하녀들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청소나 관리, 시중 등등을 담당하고 있었다.

오늘 차를 준비해 달라고 말하며 그녀에게 조심히 대화를 요청했던 것이다. 로제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일인지 흔쾌히 그녀의 앞에 자리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로제가 알아야 할 일정이 있다면서 전해 준 말이었다.

“결혼식을 올린 이후로 여러 영애나 귀족 부인들께서 모임 초대 편지를 보내셨는데, 사샤 님께서 확인을 안 하시더라고요. 아, 물론 나중에야 그 편지들을 전부 공작님께서 가지고 계시면서 안 알려 주셨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모임 초대 편지?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아, 본 적 없다 말하려고 했는데, 문득 그의 집무실인가 싶은 곳에서 보았던 편지 더미를 기억해 냈다. 형형색색 아주 고운 편지 봉투에 리본에 정성을 다한 고급 진 봉투의 향연이 그에게로 온 러브레터쯤으로 생각했었는데…….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게 좀 창피해져서 입을 꼭 다물었다.

“일부러 보여 드리지 않은 듯해 저도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공작님께서 특별히 지시하신 것이 있는데, 아마…… 그 때문일 거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지시라면……?”

로제는 물어보는 것에는 다 대답하기로 한 사람처럼 물음표를 다는 모든 질문에 즉각 대답을 꺼내 주었다.

“사샤 님께서는 태어나서부터 산속에 오래 살다 나온 것과 같은 환경에서 살고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국에 관한 이야기든 귀족들의 이름이든 살림이든 모르는 것이 많으실 거라고요. 그러니 알고자 하시는 게 있거나 모르면 안 되는 상황이 생길 때 곁에서 잘 보필하라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그는 어디까지 저를 배려해 주는 것일까. 진심과 계약 사이에서 사샤는 가슴이 에일 정도로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카일러 공작님은 정말 좋은 분이시네.”

계약이 무엇이었든, 그가 챙겨 주는 이 세심함이 지금 그녀를 살게 하고 있었다.

이 정도 받았으면 저도 뭐든 주는 것이 맞았다. 우선은 이그노트 공작부인의 품위를 지키며 하고 싶은 걸 하는 것. 그가 원한 것은 그거였으니 그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그거 가는 게 좋은 거……겠지?”

“잘하시면…… 좋습니다.”

“……그건 가지 않는 게 좋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 한가득인 사샤는 모든 이야기가 부정적으로 들렸다.

로제는 그런 사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묻는 말에는 척척 대답해 주는 대신 먼저 알려 주는 것은 거의 없었다.

사교 모임에 못 가겠다고 한다면 카일러는 그러라고 할 것이다. 그에 따라서 뭔가 불이익이라고까지 할 만한 게 생기더라도 그것 때문에 자신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잔뜩 몰려 있는 모임 초대장이 그 증거였다. 그것을 다 갈 필요는 없었다 하더라도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문제가 없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우선…… 가야 한다는 그 사교 모임은 어떤 건지 말해 줘.”

그런 초대장과는 다른 무엇이 있으니까 제게 이야기가 나온 것일 터였다. 로제는 목을 가다듬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황후 폐하께서 주기적으로 참석하시는 모임입니다. 귀족 부인들의 모임에 성인이 된 영애들도 함께 참가하도록 되어 있어요. 황후 폐하께선 1년에 두 번 정도 참여하시고, 그 외에는 각자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임을 가지는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 수도에서의 모임이 아무래도 가장 큽니다.”

적당한 속도에 명확한 발음까지, 정말 설명도 우아하게 하는 로제였다. 어디 귀족 아니었냐고 물어보고 싶은 것을 꾸욱 참았다.

“규모가 어마어마하겠네요.”

얼핏 생각해 보아도 도대체 모일 사람이 몇일까 싶은 것이다. 특히나 황후가 참석하는 때라면.

“황후께서 참여하는 사교 모임은 황실 연회 수준에 맞먹지요.”

황후의 지원하에 주기적으로 열리는 사교 모임이 있었다. 그런 자리를 첫 번째 사교 활동으로 시작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깊은 고찰이 필요해 보였다.

정말 그 카일러의 집무실에서 썩어(?) 가는 초대장 중 하나 골라서 한번 경험을 하고 가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렇게 가면 내가 주인공이 돼 버리니까 오히려 더 위험한 일이 될 거 같았다.

“규모가 크면 그만큼 긴장이 되시겠지만, 한 번에 많은 영애와 귀족 부인들을 만나는 것이니 오히려 귀찮은 일을 한 번에 해결하신다는 방향으로 생각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아. 로제는 현명하기까지 했다. 어차피 한 사람 한 사람과 친해질 것이 아니라면 그런 큰 규모의 행사에만 참여해도 주기적인 인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서 한꺼번에 인사를 나누신다면 이제까지 모든 영애와 부인들의 요청을 마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변명도 가능해집니다.”

“오, 로제 정말 똑똑하구나.”

기어이 못 참고 속엣말이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너무 순수하게 튀어나와 버린 말에 사샤도 당황해 입술을 슥 말아 무는데 로제의 볼이 발그레해지는 것을 목격해 버렸다.

“아, 그, 네,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에 매우 약한 타입인 것일까. 볼을 붉히며 말을 더듬는 것은 처음 보는 거 같아서 배시시 웃음이 났다.

“그럼 가야겠네. 내가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거지?”

큼큼 마른기침을 하며 마음을 다듬은 로제가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사교 모임에 관해서도 편지가 도착했는데, 카일러 공작님은 신경도 쓰지 말라시며 딱 자르셨습니다.”

카일러는 정말 밖에 내놓지 않을 예정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권위 있는 가문의 공작부인이라면 해야 할 일 같은 것도 있을 텐데 말이다.

“혹시…… 로제.”

긍정적인 방향으로 계속 생각을 하던 사샤의 나쁜 버릇이 또 올라왔다. 항상 긍정적일 수 없이 잘못됐을 때를 생각하고 대비하고 살아야 했던 환경 탓에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자꾸 카일러를 의심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그녀가 갑자기 무게를 잡고 심각하게 말꼬리를 흐리자 로제는 살짝 신장한 느낌을 보였다. 대답할 분비가 되었다는 느낌으로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자, 사샤가 진지하게 물었다.

“카일러 공작님께서…… 날 바깥에 내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건…… 아닌 거지?”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하라고는 했지만…… 모임의 초대장을 주지도 않고 말해 주지도 않는 것에 혹시나 제게 말 못 할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로제가 아까는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이번에는 입꼬리가 살짝 씰룩였다. 웃긴가? 웃긴 건가? 내 질문이 웃긴다는 것은 좋은 일인데…….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작님께서는 공작부인이 된 사람이 누구든, 그 사람이 미쳐 날뛰고 다닌다고 해도 알아서 잘 해결하셨을 분입니다.”

으음, 그것 조금 결론이 애매해지는데? 사샤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반응도 못 하고 있자 로제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 주며 말했다.

“감추려고 하실 분은 아닙니다. 나가고 싶다 하시면 나가라 하실 것이고, 나가고 싶지 않다 하시면 이제까지처럼 모두 본인의 선에서 잘라 주셨을 겁니다.”

로제는 단호하게 그를 대변해 주었다. 그에게 궁금했던 것들을 그녀에게 물어본다면 열에 여덟 정도는 대답을 다 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럼 좋아. 그 사교 모임 나갈게. 로제가 많이 도와줘야 할 텐데……. 바쁜데 해 줄 수 있겠어?”

사샤가 결심한 것을 꺼내 놓았다. 하고 싶은 걸 하라는 말에 바로 들었던 생각이 있었다. 그에게 부끄럽지 않은 공작부인이 되는 것. 그에게 도움이 되는 공작부인이 되는 것.

내가 뭐 그에게 마음이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뭐 그런 감정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여기에서 눈을 떠서 살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은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처음엔 강압적인 상황으로 날 몰아넣은 사람이고 나의 처음을…… 가져가 버린 사람이고 해서 무섭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바로바로 전해졌다. 내가 이 사람으로 인해 살 수 있다는 것을.

심지어 원래 이 몸의 주인이었을 사샤의 인생도 이 남자가 구해 준 것이었다.

이전에는 하고 싶은 것은 많아도 그저 먹고 자는 것 외엔 신경 쓸 수 없는 삶을 살았는데 이젠 그것도 아니었다. 먹고 자는 것에 대한 걱정이 없으니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

내게 주어진 것이 ‘공작부인’이라면, 그걸 제대로 해내고 싶은 거다.

“굳이 질문조차 필요 없는 이야기입니다, 사샤 님. 사샤 님은 카일러 님께서 인정하신 이그노트 가문의 일원입니다. 저는 이그노트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고요.”

너무나도 믿음직한 말에 사샤는 굉장히 큰 아군을 하나 만난 것 같았다. 제가 이그노트를 망가뜨리지 않는 이상은 제게 힘이 되어 줄 거라는 말이었으니까.

“좋아. 그럼 나는 제일 먼저 뭘 하면 될까?”

귀족들의 이름 외우기? 아니면 모임 순서 숙지? 아니면…….

황후가 참석하는 모임이라는 게 가장 중요한 사항인 거니까 황후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인가.

황궁에서 만났던 기분 나쁘게 화려한 여자가 떠올랐다. 사람 많은 연회에서도 과연 그렇게 나올 것인가.

이 여자를 다루는 게 아마 최종 목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로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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