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결국은 기분 상한 엘리나를 데리고 기분 전환 삼아 번화가로 나왔다. 상점들이 다행히 활기를 띠고 있었고 날씨도 화창했다.
하지만 사샤에 대한 일을 회상하고 있던 후작부인은 딱히 기분이 더 나아지지는 못했다.
공작이 그녀를 선택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엘리나는 그 사실을 부정했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대한 확신이 있어 보였다.
“엄마, 여기 의상실 디자이너가 최근에 수도에서 왔대요. 여기 한번 가 봐요.”
역시 드레스를 사기 위해 외출했다는 것만으로도 엘리나의 기분이 어느 정도 풀려 있었다. 후작부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자 그녀는 샬렛을 이끌고 서둘러 의상실로 들어갔다.
엘리나가 시야에서 사라지니 아까부터 하고 있던 사샤에 대한 생각이 이어져 버렸다.
결혼식에도 이베른은 정식으로 초대받지 못했다. 다만 그런 사실을 애써 숨겨 보려 결혼식에 참여하기는 했었다.
그래서 공작저에서 초대장이 왔을 땐 믿지 않았었다. 이건 무조건 사샤가 파 놓은 함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갔으면 그냥 조용히 자기 삶을 살 것이지 왜 이쪽에 시비를 걸려고 저택까지 오라 하는지…….
이베른 영지와 이그노트 영지는 지도상으로는 거의 바로 옆이었으나 그 사이를 가로막는 높은 산이 있었다. 그래서 두 영지를 오가는 데에 거리는 훨씬 멀었다.
“왜? 왜 못 가는데? 나는 갈 거야. 가서 그년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공작님도 만나고 올 거야.”
초대장을 본 엘리나는 앞뒤 가릴 것도 없이 덤벼들었다. 혹여 그것이 함정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겁먹는다는 거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강력한 그녀의 바람으로 그 초대에 응하게 되었다. 물론 공작까지 가서 휘말리는 것은 원치 않았기 때문에.
당일 아침 저택 앞에 준비되어 있던 공작저의 마차가 너무 크고 화려해 이미 주눅이 살짝 든 상태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어서 오세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그런데 공작저에 도착해 그들이 마주한 사샤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사이 잘 먹어 살이 오른 볼이 뽀얗게 빛났고, 부스스하니 여기저기 뚝뚝 끊어져 있던 머리카락도 제법 금발의 윤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는…… 눈치를 조금씩 보면서도 다정하고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는 점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아, 그래, 하고 대답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냐 무턱대고 의심했던 게 오히려 더욱 강해지는 순간이었다.
“요즘은 이런 색깔이 유행이에요, 영애님! 어쩜, 금발이라서 훨씬 더 잘 어울리시는데요?”
의상실의 디자이너가 나와 호호호 웃으면서 엘리나의 비위를 맞추면서 매장 안을 마음껏 누비고 있었다. 후작부인은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편안히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엘리나는 옷을 사는 데에 반나절은 족히 시간을 보내는 편이었다. 몇 번 입어 보는 것은 기본이요, 액세서리 같은 것들도 한꺼번에 고르고 사고 싶어 하기 때문에 후작부인은 그저 편안히 앉아 구경하기를 택했다.
그들의 반응이 냉담하자 사샤는 살짝 당황하는 듯했다. 마치 뭔가 제대로 답해 주길 바라고 있었던 듯했다. 아니, 그보다 대화가 되길 바라는 눈치였다는 게 더 맞을 듯했다.
“오시는 길은 힘들지 않으셨어요?”
“아버지도 함께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많이 아쉬워요.”
식사 도중, 그녀는 기어이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안부를 확인하더니 공작을 아버지하고 부르면서 평소 하지도 않았던 말들을 쏟아 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입술을 또 꾹 깨무는데, 엘리나는 또 거기에 넘어가 ‘언니가?’ 하고 정색을 했다.
그때부터 사샤의 표정도 썩 좋지만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대체 이 아이는 무슨 목적으로 우리를 공작저에 초대한 것일까.
적어도 지금은 싸울 태세가 아니었지만 말려서도 안 되었다. 식사는 조용하게 끝이 났고, 그다음은 정원에서의 티타임이었다.
“엄마! 이거 봐봐요. 이 노란 드레스랑 여기 연두색 드레스랑 뭐가 더 어울려요?”
싱그러운 계절과 어울리는 색깔들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후후작부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엄마는 연두색.”
“오, 알겠어!”
슥 그 드레스 두 개를 들고 엘리나는 저쪽으로 총총총 걸어갔다. 걸음이 참 신나 보여서 다행이었다.
문제는 정원에서 일어났다. 엘리나를 챙겨 주려던 그 아이와의 실랑이 도중에 티포트를 쳐 버리고 만 것이다.
그 안에 뜨거운 물을 다시 채운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후작부인은 반사적으로 엘리나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다행히 엘리나에게는 많이 튄 것도 아니고 대부분 의상에 묻어 큰일은 없었는데…… 그 아이는 아무래도 손에 많이 튄 모양이었다. 이제 와서 걱정해 주기도 뭣하고 금방 손을 수습하기 위해서 자리를 떴기 때문에 챙겨 주지 않아도 되었다.
이렇게만 오늘 하루가 끝난다면 좋겠다 안도하는 사이, 엘리나가 분을 못 참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 아이의 뒤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분을 못 이기는 씩씩대는 숨소리를 내면서 엘리나가 돌아왔다. 그에 비해 그 아이는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이었다.
자리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 아이의 말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칼 같은 말들로 그들을 몰아내듯이 자리를 마무리한 것이다.
역시 뭔가가 이상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우리에게 날을 세우고 따지고 들었다면 이해했을 텐데…… 처음 그들을 맞이할 때에 보였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엄마! 나 드레스는 이걸로 할래!”
“어머? 아까 연두색으로 하는 거 아니었니?”
또 불쑥 드레스를 아예 착장하고 나타난 엘리나는 아까 보여 줬던 노란색도, 연두색도 아닌 짙은 남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응, 연두색보다는 이게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아서. 어때? 어울려?”
바깥에 나온 것은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았다. 엘리나는 환하게 웃으며 최종적으로 고른 드레스를 입고 의상실을 누비며 다음으로는 여기에 맞는 액세서리를 고르겠다고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들을 수 있었다.
“엄마, 언니가 나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 이그노트 공작님이 뺏겠다 나선다고 뺏겨지는 사람이냐고, 그 사람에 대해 전혀 모르구나. 하면서…… 나를 막 무시했어!”
그 자리에선 꾹꾹 참고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며 엘리나는 또 한 번 흥분했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그렁그렁한 채였다.
뺏었다는 이야기가 또 나온 걸 보니…… 전에 엘리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아이가 빼앗아 간 자리라는 말을. 도저히 근거를 모르겠지만 이 아이는 확신하고 있는 그것.
“나더러…… 나더러 이쁜 이미지 잘 지키라고…… 언니 결혼 파탄 낸 악녀는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냐고…….”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듣고 있던 후작부인은 이 부분에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원래 그들이 알고 있던 사샤라면, 그 다락방에서 분노를 쌓고 쌓아 표출한 거라면 이런 식으로 나와야 타당하다는 것이었지, 사실 그 아이의 성정이 본래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바보 천치같이 결국은 가족이다 하고 생각할 아이였다.
그런데 자신에게 했던 말도 그렇고 엘리나에게 한 말도 들어 보면 전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문득, 엘리나에게 물어봐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그노트 공작이 그 아이를 선택한 것이…… 어째서 그 아이가 공작을 빼앗아 간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인지를 말이다.
“엄마. 다 골랐어. 엄마는 뭐 안 사도 돼?”
엘리나는 이제 정말 평소의 기분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의 미소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왔는데, 어쩜 이렇게 일이 어긋나는지 모르겠다.
“엄마, 카일러 공작님이 짙은 남색을 좋아하신다는 거 알고 있었어? 거기 의상실 새로 온 디자이너가 공작가에 출장을 나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얻은 정보래.”
기분 좋게 팔짱을 끼고 의상실을 나서는데 엘리나가 해맑게 속삭였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카일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활짝 웃는 그녀를 보고는 후작부인은 오히려 얼굴이 어두워졌다.
“엘리나, 카일러 공작님은 이제 혼인을 하셨으니 미련 버리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자. 저기 위나프 왕국의 왕자가 그렇게 멋있다던데, 응? 어때?”
후작부인은 살짝 걱정이 되는 마음에 말을 건네 보았다. 실제로 공작과 공작부인이 이그노트 공작 다음으로 후보로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
위나프 왕국은 이베른 영지와도 그렇게 멀지 않은 편인 데다가 꽤나 자유로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나라라서 딸을 보내도 크게 걱정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심지어 제국의 축제 때 사절단으로 방문했던 그를 보았었는데 꽤 미남이었다.
애초에 순위를 매길 때 어떤 부분에선 이그노트보다도 더 좋은 부분도 있었기 때문에 아주 적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엘리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뭐가 탐탁지 않은 건가 유심히 보고 있는데 엘리나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다물고 있던 입을 연 것은 마차에 올라타고 나서였다.
“엄마, 있지.”
발랄해졌던 기분이 벌써 가라앉았는지 엘리나의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덜커덩거리며 마차가 출발하자 엘리나가 그제야 눈을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실제로 만나고 나니까 카일러 공작님이 너무 아까워졌어요. 그래서 기회를…… 노려보려고요.”
“기회?”
여전히 엘리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본인만 아는 무엇인가가 있는 듯이 보였지만 꼭 마지막까지 가서 정확한 사실은 말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어 버렸다.
“위험한 짓만 하지 마. 엄마는…… 우리 엘리나가 행복하기만을 바라.”
진심을 담은 그녀의 말에 엘리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대답했다.
“응, 엄마. 나 행복해질게.”
묘한 다짐을 자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