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드레스 다른 거 더 가져와 봐! 어떻게 이것밖에 없지?”
엘리나의 방에서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곳을 하녀 두 명이 분주하고 오가고 있었다.
금발이 헝클어지도록 마구 헤집던 엘리나는 침대를 온통 차지하고 있는 드레스를 다시 한번 뒤적거렸다.
“엘리나, 대체 무슨 일이니? 오전부터 점심도 안 먹고…….”
그녀의 방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민 것은 이베른 후작부인이었다.
“엄마는! 보면 몰라요? 드레스 고르고 있잖아요!”
그녀가 기다리던 드레스가 아닌 걸 본 엘리나는 더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후작부인은 방 안으로 들어와 침대 위에 내팽개쳐진 드레스들을 다시 하나하나 들쳐 보기 시작했다.
“아니, 여기 이것도 지난달에 산 거고…… 이건 한 번도 안 입은 드레스잖니?”
거기에 널브러진 것들이라고 해도 다 최근에 산 것, 기껏해야 한 번밖에 안 입은 옷들이 전부였다. 심지어 한 번도 입지 않은 드레스도 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번 모임에 막 티 나진 않으면서 아주 눈에 확 띄는 그런 드레스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엘리나는 누가 봐도 초조한 얼굴로 엄지손가락을 꾹꾹 깨물어 가며 드레스를 가지러 간 하녀들을 기다렸다.
“아니 뭣 때문에 그렇게 드레스를 다 뒤집어 보고 있느냐는 거지…… 우리 엘리나는 얼굴도 예쁘고 머리카락이 예뻐서 뭘 입어도 어울리는데 말이야. 응?
후작부인은 어르고 달래 가면서 엘리나의 탐스러운 금발머리를 슥슥 빗듯이 쓰다듬어 주었다. 엘리나는 그 손길에 잠시 심호흡을 했다. 너무 초조한 나머지 엄마에게도 날카롭게 굴던 그녀는 거울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엄마아, 이번에 황후 폐하가 여는 사교 모임에 입을 거 고르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거기 공작, 후작, 백작 영애들 전부 다 올 텐데 대충 갈 수는 없잖아요.”
자신의 머리카락을 너무도 소중하게 쓰다듬어 주는 후작부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부비면서 애교를 부려 댔다.
그녀가 말하는 사교 모임은 삼삼오오 모이는 10대 소녀들의 사교 모임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황후도 주기적으로 함께하는 모임으로, 젊은 영애들뿐 아니라 귀족 부인들까지 자리하는 아주 큰 모임이었다.
후작부인은 새롭게 드레스를 이고 지고 온 하녀들에게로 쪼르르 달려가 버리는 엘리나를 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영애뿐 아니라 부인들도 모이는 자리다 보니, 분명 그 아이도 올 것이다. 이그노트 공작이 사냥 물자를 공급받기 위해 들렀다가 갑작스럽게 혼담을 넣고 데려가 버린 그 아이.
엘리나가 저토록 날카로워져 있던 이유 또한 그걸 알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한 번도 그 아이에게 져 본 적 없이 살아온 엘리나였다. 후작 영애라는 자부심에 차 있었고 자신의 미모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우연하게도 공작이 후작저에 들렀을 때, 사실 엘리나는 조금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항간에 황제께서 공작의 결혼을 강력하게 추진 중이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을 때였다.
그에겐 정혼자도 없었기 때문에 누가 그 상대가 되느냐로 온갖 소문과 추측이 나돌았었다.
물론 또래의 영애들은 모두 자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고 그의 눈앞에 스쳐라도 지나가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곤 했다.
“엄마! 엄마! 그분이에요! 공작님께서 우리 집에 왔어요!”
그래서 멀리 마물 사냥을 나왔다가 물품 공급을 위해 긴급한 협조를 부탁한다며 들어온 것이 이그노트 공작 본인이란 걸 알았을 때 엘리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얼른 살렛을 불러다 예쁜 드레스로 갈아입고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고 화장까지 연하게 한 그녀는 이그노트 공작을 따라다니며 거의 저택의 안주인 행세를 했다.
그때만 해도 엘리나는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더해 싹싹하게 공작과 기사들을 보필하는 모습을 어필했다며 굉장히 들떠 있었다.
“다들 말은 못 하지만,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는 줄 아세요? 이만한 기회를 얻다니, 진짜 저는 행운아예요. 아니, 공작부인이 될 운명인 거예요!”
이그노트 공작을, 그가 머물 방으로 안내해 준 뒤 나온 엘리나는 후작부인의 두 손을 붙들고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었다.
번득이는 두 눈에 어린 욕망이 너무 생생하게 빛났었다.
그런데 그게 하루아침에 뒤집어져 버렸던 것이다.
“음…… 아냐, 이것도……. 이건 어때? 흠…….”
두 하녀들의 극진한 도움을 받으며 드레스를 하나하나 몸에 대 보고 그중에 하나를 골라 갈아입으러 가는 것을 지켜보던 후작부인은 착잡한 마음에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그러고 떠났으면 더 나았을 것을. 우리 가문과는 전혀 교류도 없던 다른 집안에서 공작부인이 나왔다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
“이베른의 영애를 내 부인으로 맞이하겠다.”
그 말을 하는 이그노트 공작의 앞에서 주체를 못 하고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 버렸다. 엘리나가 얼마나 원하던 결과였는지를 알고 있었으니까.
후작이 옆에서 옆구리를 쿡 찌르고는 자못 근엄한 자세를 유지하며 공작을 바라보았다.
“보셨다시피 우리 엘리나는 외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안살림에도 톡톡한 도움을 주고 있는 아이입니다. 확실히, 공작의 배필로 손색이 없죠.”
뿌듯함이 배어 있는 그 표정을 후작부인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공작은 그때까지 누구도 생각조차 못 한 말을 꺼냈다.
“이 집에 영애가 그…… 방을 안내해 준 그 영애밖에 없는 것은 아닐 텐데.”
“……예?”
거기서부터 싸함을 느꼈다. 뭔가 미묘하게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물론 그때 알았다고 해서 돌이킬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사샤. 이 저택 제일 위층에 살고 있는 첫째 영애. 내가 반려로 정한 이는 사샤 이베른이다. 돌아가거든 정식으로 혼담을 넣을 것이니 그리 알도록.”
그 아이의 이름이 나옴과 동시에 후작 내외는 당황으로 굳어 버렸다. 그런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도 전에 공작의 선언이 끝나 버리고 말았다.
먼저 정신을 차린 공작이 그를 붙들었다. 그녀에게는 눈치를 주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아직 하녀나 문 밖의 엘리나 등 듣는 귀가 꽤 있었던 것이다. 하녀들을 내보내다 버티고 있는 엘리나를 하녀들의 손에 맡겨 멀어지는 것까지 전부 확인한 다음에야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표정 없는 공작과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를 마주하고 있는 후작. 후작부인이 곁에 앉는 것을 신호로 후작이 바로 입을 열었더랬다.
그 아이가 안 되는 이유를 끌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져다 얘기했다. 우리가 감추고 아주 없는 사람으로 키워 왔는데 이제 와서 드러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필사적인 말에도 꿈쩍 않고 있던 공작 때문에 곁에서 후작부인까지 같이 말을 거들어야 했다.
그들의 말이 끝나고 공작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단호하게 딱 자르지 않는 것이 이미 좋은 반응이라고 여긴 후작 내외는 속으로 통했다, 생각하고는 이제 엘리나를 적극적으로 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 아이는 준비된 아이였다. 황제가 안 되고 공작이 안 된다면 황후 가문의 영식도 있었고, 안 되면 옆 나라 왕국에라도 혼담을 넣을 생각이었다.
적어도 후작 아래의 가문에는 보내지 않겠다고 키운 아이였다.
그중에서도 최적의 결혼 상대, 그리고 다시없을 기회까지 얻은 마당에 이걸 절대 놓쳐선 안 되었다.
“좋아. 그대들의 말로 아주 확신을 가질 수 있었군.”
이그노트 공작은 큰 키에 넓은 어깨, 거기다가 강인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가진 완벽한 남자였다. 탐이 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더더욱 놓치고 싶지 않은 남자였다.
그가 마음을 바꾼 듯한 말을 꺼내자 그들은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그가 다음 말을 꺼낼 때까지 한껏 부푼 심장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사샤는 우리가 이곳을 떠나는 날 함께 데려가도록 하겠다. 그래도 영애의 부모에게 허락을 받는 것이 예의라 생각했던 것인데…… 그녀를 딸이라 여기지 않으니, 그녀는 이 저택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그노트의 이름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껏 부풀었던 가슴은 뻥 하고 터져 버리고 말았다.
부모로서 이그노트 공작의 장인이 될 수 있는 기회마저 뻥 차 버리고 만 것이다.
“아! 이거 뭐야! 언제 적 드레스인데 이렇게 안 맞아? 샬렛! 나 살쪘어?”
파티션 너머에서 신경질적인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샬렛이 이를 꾹 물며 파티션 너머 엘리나에게로 가는 것을 보며 후작부인도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아가, 드레스 한 벌 사다 입도록 해. 응?”
후작부인이 달래려 말을 꺼냈지만 한번 약이 오른 엘리나의 기분을 달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엄마 나 요즘 못생겨졌어? 왜 이렇게 맘에 드는 드레스가 없지?”
엘리나는 얼굴이 불퉁해져선 입고 있던 드레스를 벗어 던졌다.
후작부인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잔뜩 부려 놓은 드레스들을 추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샤는 새 옷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뭔가를 남기지도 않았다. 집을 떠나는 준비를 하는 것도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공작 일행이 떠나기 전날 속이 심란해 바깥으로 나왔던 후작부인은 분명히 보았다. 집을 떠나기 전 사샤가 집 뒤쪽의 좁은 공터에서 뭔가를 태우고 있는 것을.
완벽하게 손절하고 떠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그녀를 보고 후작부인은 심장부터 써늘하게 얼어 가는 것을 느꼈다.
사샤는 그 자리에서 자기가 챙겨 갈 수 없는 것들을 태우고 있었다. 옷과 신발까지 있었다. 다음 날 사샤가 떠나던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당장 입고 갈 것만 남기고 모두 태워 버렸던 것이다.
철저하게 자신의 흔적을 지운 사샤를 자신의 마차에 태운 이그노트 공작은 그렇게 유유히 저택을 떠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