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제가 이그노트라는 이름을 꺼낸 것이 잘못이었을까. 흥분한 황후는 금방이라도 사샤를 향해 돌진해 올 듯이 흥분한 상태였다.
시녀가 그녀의 뒤에서 말리고 붙들고 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를 일이었다.
정도가 있지, 정말……. 카일러는 이그노트의 품위를 가장 우선시하던데, 황실에는 품위 같은 건 신경을 안 쓰나, 하는 의문이 생길 지경이었다.
“폐하? 오해가 있으신데, 저는 이그노트의 하녀가 아니라 공작부인이고, 전혀 폐하께 거짓을 고할 이유가 없습니다.”
높은 사람에게 잘못 대하다 피해를 끼치지 말자는 생각으로 조용히 입 다물고 있던 사샤가 기어이 참지 못하고 그렇게 말했다. 항상 조용히 내던 목소리도 단호하고 단단해졌다.
그녀가 또렷하게 전하는 목소리에 흥분했던 황후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한 가지 안 좋은 점은…… 다짜고짜 따지고 들던 것을 넘어서 눈동자에 분노가 어렸다는 것이다.
아니 대체 황후라면서 이그노트에 무슨 억하심정이…….
“공작님이 금방 돌아오실 테니, 확인하고 가셔도 무방합니다. 무척이나 화를 내셔서 해명을 부탁드린다고 말이죠. 어떠세요?”
공작과 문제가 있으면 공작과 풀어야지 처음 보는 내게 왜 이러느냔 말이다. 뭘 알아야 싸우든지 기든지 하지. 카일러에게 확인도 시키는 겸 왜 저렇게 발끈하는지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하며 당당하게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네가…… 그 이베른의 영애?”
너라니……. 끝까지 예의 없는 그녀를 보고 어이가 없었지만 거기까지는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은 그런 자잘한 거 따질 때가 아닌 것 같으니까.
입술을 꽉 깨무는 황후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할 말이 많지만 참고 있는 듯한 그 느낌에 사샤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 냈다.
다시 한번 그녀의 몸을 아래로 훑어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모양새가 탐탁지 않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사샤.”
그때였다. 그냥 복도에 세워 두고 갔으니 금방 올 거다 생각하고 있던 카일러가 적절하게 등장해 주었다. 황후를 마주 보고 있던 사샤가 시선을 슬쩍 돌리자 그녀의 뒤쪽에서부터 카일러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대번에 알아챈 듯 황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숨기지 못한 눈동자의 흔들림까지, 사샤는 그녀가 흘린 감정의 조각을 발견하고는 깜빡, 눈을 깜빡였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카일러는 슥 사샤의 곁으로 와 선 후에야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마치 할 일이 끝났다는 듯 바로 사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렇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아, 아니에요. 오래 안 걸렸어요. 창문 밖이 예뻐서 구경하고 있었어요.”
사과부터 꺼내는 그의 말에 사샤의 대답도 부드럽게 나가고 말았다. 황후를 앞에 두고 나빠졌던 기분까지 괜찮아져서 관계가 어떻고 이런 걸 따지는 게 별로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카, 카일러.”
그때 정면에서 아직도 넋을 놓은 듯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사샤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상황을 파악해 버렸다. 그런 감정들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가 듣기에도…… 그 목소리가 너무 애틋했다.
“이그노트 공작입니다. 여기는 제 부인, 사샤 이그노트입니다.”
이베른 영애라고 들었을 때는 별다른 느낌도 없던 이름이었는데, 그가 이그노트라는 성을 붙여 주자마자 이름이 너무도 특별하게 다가왔다.
이렇게라면 이그노트 소속이라는 말도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소유물 같은 게 아니라 한 가족이라는 의미니까.
그가 옆에 있자 그녀는 더욱 당당하게 황후를 마주 볼 수 있었다. 아까부터 무례하게 굴던 그녀의 반응이 질투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더 무서울 것도 없었다.
“아까 인사를 드렸는데…… 제 드레스가 좀 하녀 같은지 하녀로 오해를 하시더라고요. 저 공작부인 맞습니다, 황후 폐하.”
그래도 말한 건 지켜야지. 사샤는 한껏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하고는 카일러에게 사근사근히 말했다. 잔뜩 굳은 황후의 얼굴을 살피며 그렇게 말한 사샤는 이제 얼른 그녀의 앞을 지나쳐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려 했다.
황후이기도 하고, 그게 뭐 크게 잘못한 일도 아니니까. 그냥 자존심이나 좀 상할까 싶어서 꺼낸 말이니까.
“이 드레스…… 전 공작부인께서 워낙 원단을 좋아하셔서 장인을 통해 짠 원단으로 만든 드레스였는데. 그래, 못 알아보면 디자인은 단순해 보일 수도 있겠군.”
카일러가 이렇게 나오자 사샤가 오히려 깜짝 놀라 황후의 눈치를 보았다. 여기까지 말하는 건, 특히나 댁이 이렇게 말하는 건…… 안 되지 않을까?
상처받은 얼굴을 한 황후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일러의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그의 얼굴이 보이는 사샤의 입장에서 이 구도가 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저 뒤에서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는 시녀님과 내 처지가 매우 비슷해 보였다.
“아, 이게 그렇게 좋은 원단이었나요? 이 옷은 아껴 입어야겠네요.”
얼른 마무리하고 가고 싶은 마음에 말을 꺼내며 그의 팔을 붙들자 황후가 그걸 못 참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하게 됐네, 부인. 다음부터 황실에 들를 땐 이곳에 맞는 드레스를 맞춰 주게.”
“황실에 맞는 드레스는…… 화려하기만 하면 됩니까? 제 부인에겐 안 어울릴 듯하지만 몇 벌 사 주겠습니다.”
사샤는 빨리 가 주려고 했는데, 황후가 스스로 화를 자초한다. 끝내 이상한 말로 자존심을 부리는 황후에게 카일러가 결정적으로 말을 꺼내고 말았다. 화려하기만 하면 되냐 묻는 그의 시선이 황후의 드레스로 가 있는 것이…… 크리티컬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 뿐 다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럼 이만, 하고 담백한 인사를 남긴 카일러는 잠깐의 동요조차 없이 사샤를 데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길고 긴 복도를 걸어 건물을 나와 마차에 올라탈 때까지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혹시나 뭔가 먼저 말해 줄까 싶은 마음에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입을 다문 채 그저 살짝 눈을 감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덜그덕, 덜컹.
공작저로 돌아가는 길 내내 그들의 귓가에 울린 거라고는 마차가 내는 소리밖에 없었다.
갈 때는 창문 바깥을 보고 있던 사샤가 그런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지만 눈을 감고 있으니 알 리가 없었다.
일부러 말을 안 하는 것일까. 해 줄 수 없는 이야기, 혹은…… 스스로 난감해지는 일이 있어서?
황후는 너무나도 애틋한 표정이던데 카일러에게서는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옆에 있는 게 사샤가 아니었다면 아마 말도 섞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고, 불러도 돌아보지 않았을 것 같았다.
대체 어떤 관계여야 이런 관계가 가능하냐 이 말이다.
게다가 너무나 당연하게도…… 황후라면 알현실에서 뵈었던 그 황제의 부인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 아닌가.
사샤는 눈을 감은 카일러의 멋진 모습을 뚱하게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을 펼치기 시작했다.
둘 다 결혼 전에…… 알던 사이였던 걸까? 아니, 알기만 한 건 아닌 거 같고,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게…… 맞지 않을까?
황후가 카일러를 바라보는 애틋한 눈빛과 표정을 보아선 그 가설이 너무나도 타당했다.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감정이 남아 있는 얼굴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그런 것밖에 생각나질 않았다.
본래 사랑하던 사이였는데, 가문의 이해관계 탓에 그녀는 억지로 대제국의 황후가 되어야 했고, 그래서 사랑하지 않는, 심지어 남편이라기보다 황제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 그녀의 입장으로는 옛사랑이 잊히지를 않는 것이다.
여기까진 그럴듯했는데…… 그럼 이렇게나 애틋하게 사랑하는 그녀를, 카일러는 어쩜 이렇게 매몰차게 외면하는가 하는 부분이 남아 있는 것이다.
너무 사랑했지만…… 이미 남의 여자가, 심지어 황제의 여인이 될 사람을 마음에 품을 수 없어서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인가?
그렇지……. 여자가 매달릴수록 남자는 더욱 냉랭하게 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너무나도 완벽한 시나리오를 짜 놓고, 그를 바라보는 것도 잊은 채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던 사샤는 문득 덜컹거리는 마차 때문에 정신이 확 들었다. 카일러가 아닌 그의 옆 마차 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다시 카일러를 보았다.
……잠이 든 게 분명했다. 이 정도 흔들림에도 미동 없이 앉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완벽했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냥 시나리오로 폴폴 사라지고 말았다.
“아주 글을 써라, 글을 써. 아주 대작가 납셨네.”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고 완벽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자신이 너무 웃겨서 혼잣말을 꺼내 버렸다.
황후 같은 경우는 상황 파악 못 하고 자신의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의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그렇게나 무시하고 적대감을 드러내던 사람이었으니까.
그에 반해 카일러는 정말 감정 한 톨 남지 않은 것이 그녀에게도 느껴질 정도였었다.
만약 감정이 남아서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눈치챘을 듯했다.
“아까 지쳐 보이더군. 돌아가면 식사 제대로 하고 바로 쉬도록 해라.”
그래 이렇게. 그는 감정 표현에는 인색한 편인 것 같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사람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매몰찬 것은 매몰찬 거고, 방금 그녀의 앞에서 한 행동은 애정에 기반을 둔 게 아닌 것 같다는…… 그런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마차는 그렇게 공작저로 들어섰다.
황궁에서의 일에 대해 한마디도 꺼내지 않은 카일러는 마차에서 내리는 사샤의 손을 잡아 주며 완벽하게 에스코트를 하고, 안으로 들어갈 때에도 그녀의 걸음에 맞춰 주었으며 로제를 불러 제일 먼저 사샤의 목욕물과 식사를 챙기도록 이야기해 주었다.
사샤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지만 입은 다문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