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황제 알현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얼러 가며 대화하는 듯한 묘한 조합을 보고 난 뒤 사샤는 카일러의 뒤를 따라 알현실을 나섰다.
아…… 체력 딸려.
마차를 타고 나와서 사람 좀 긴장 타게 만들 정도의 높은 분과 이야기 좀 나누고 나왔을 뿐인데도 벌써 지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곳에서 눈뜬 후 내내 공작저 안에서만 지냈다. 그중에서 제대로 몸을 좀 움직여 본 거라고는 걸레질한 것밖에 없었다. 이전에는 일하러 다니느라 피곤은 피곤대로 해도 덕분에 체력이랄 게 조금 있었는데 말이다.
“사샤.”
“……예?”
무거운 몸으로 걸으면서 그의 뒤꿈치를 보며 걷고 있던 사샤는 갑자기 그녀를 돌아보는 그를 보곤 얼빠진 대답 소리를 내며 올려다보았다.
“여기 꼼짝 말고 있어라. 다녀올 곳이 있다.”
“아, ……네.”
지쳐 있는 상태에서 그가 갑자기 말하니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뭐 위험한 곳도 아니고 그가 다시 찾아오지 못할 곳도 아니고…….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뒤돌아 걷기 시작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같이 가면 안 되겠냐고 붙잡을까 아주 잠깐 생각했었다.
카일러의 뒷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던 사샤는 그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알현실에서 나와 그저 걷기만 했으니 1층일 텐데…… 앞뒤로 그저 복도밖에 없었다. 중간에 커다란 문이 있는 것 빼고는 그냥 화려한 복도였다.
왠지 사람이 잘 안 다닐 것 같은 느낌에 약간 안심을 하며 창문으로 다가갔다.
처음 여기 떨어졌을 땐 너무 급격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정신이 없었고, 이 몸이 처한 상황에 좌절하기도 했지만 최악은 아니었다. 여기서 살려면 가장 중요한 사람이 카일러인데 적어도 그가 그녀의 적은 아닐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는 왠지 혼자라는 부분에서 그녀와 비슷할 거 같았다. 물론 정말 아무도 없었던 사샤에 비해 그에게는 그를 위해 일해 주는 여러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튼 본인이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실제로도 무섭게 느껴지는 때가 간혹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모습만 보기 때문에 카일러를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인데…… 사샤가 본 카일러는 그런 남자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든…… 나한테 안 그럼 됐지.”
그렇게 보자면 오히려 운이 좋은 편이 아닌가.
“여기 오기 전의 날은 내가 다 지워 주겠다. 그냥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이그노트의 이름에 먹칠만 하지 않으면, 무엇이든 된다.”
이렇게 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부터가…… 너무나도 큰 행운을 만난 것이니까.
“그나저나 엄청나네…….”
창문 밖을 내다보는데, 하필 또 이 방향이 건물의 뒤쪽으로 나 있는 것인지, 뒤로는 드넓은 잔디밭과 저 멀리 울창할 것 같은 숲이 보였다. 구조는 인위적이지만 파릇파릇한 초록색이 너무 예뻐서 눈길을 빼앗겼다.
그녀가 자주 가는 공작저의 후원도 대략 이런 느낌이었다. 넓은 잔디밭 위에서는 뭘 해도 너무 트여 있는 느낌이라 그냥 보기에만 좋았고, 그 바깥에 벽처럼 둘러진 회양목 뒤편의 숨은 아기자기한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돌아가면 로제와 차나 한잔 마실까. 너무너무 불편하기만 하려나.
사람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만들고 이어 나가고 하던 경험이 없었던 터라 이런 것도 갈팡질팡이었다.
지난번 청소도 실패했던 것 같고…….
그가 도움을 주는 만큼 나도 공작부인이라는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고 싶었다. 생각에 빠져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카일러의 묵직한 발소리가 아니라 사뿐한 게…… 아무래도 여자 같았다. 심지어 한 명도 아니네……!
카일러가 돌아오기만 하면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다른 사람의 등장에 사샤가 꼿꼿하게 선 채로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긴장이 최고조에 다다른 순간 복도 저변에서 붉은 드레스 자락이 나타났다. 풍성한 치마와 화려한 장식, 그리고 풍성하고 윤기 나는 금발 머리카락이 걸을 때마다 출렁이는…….
화려한 모습과 그에 뒤지지 않을 만큼 화려한 외모가 빛나는 한 여자가 뒤에 시녀 한 명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이 정도 화려함이면…… 적어도 나보단 높은 사람 아닐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던 그녀는 인사 잘해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에 눈이 마주친 그녀를 향해 살짝 허리를 숙였다.
사샤가 인사를 건네자 걸어오던 화려한 그녀도 걸음을 멈추고 사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늘 그래도 황궁에 간다는 말에 로제가 나서서 드레스를 골라 주고 어린 하녀를 데려다가 머리에 화장까지 모두 도와주었다.
딱히 관리를 한 건 아니지만 잘 먹고 잘 쉰 덕에 부스스하고 건조하던 것들이 나아져 제법 미모가 살아날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너무 풍성하고 화려한 드레스를 꺼내 오길래 죄다 거절해 버리고 움직이기 편한 이 드레스로 골랐다. 그래도 원단이 너무 고급스러워서 TV 같은 데서나 보던 예쁜 원피스 같아 너무 좋았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화려한 여인은 사샤를 보더니 마치 어쩜 이런 게 이곳에 있냐고 물을 듯이 위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어머, 되게 무례한 것이…… 진짜 높은 사람은 맞는가 보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새로 온 시녀인가?”
그 여인은 사샤에게 직접 묻는 대신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던 중년의 여인에게 물었다.
“저도 처음 봅니다. 그리고 옷이 시녀의 복장은 아닙니다.”
조곤조곤 대답하는 중년 여인을 보고는 이 여인의 무례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샤는 그저 저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어보면 대답은 해 주겠지만 굳이 먼저 나서서 날 소개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둘이서 속닥이고 있는데도 미동도 없고, 대답도 없는 사샤를 보며 여인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나를 만났으면 인사를 올려야지.”
“……방금 인사 올렸습니다.”
인사는 마주치자마자 내가 먼저 한 것 같은데? 여기는 인사할 때 이름까지 대는 게 예절인가?
역시나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는지, 그녀의 잘 그린 눈썹이 일그러졌다.
“어디 소속, 이름, 똑바로 해야 할 것 아니냐.”
“소속……이라면 이그노트 공작저입니다. 사샤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자신을 직접 사샤라고 소개하는 것은 참 어색했다. 조금 떨리는 마음이 들었다. 마치 다른 사람을 사칭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이그노트?”
그리고 화려한 여인은 이그노트라는 이름에 아주 격하게 반응했다. 목소리 톤이 올라가고 눈썹이 더 가파르게 올라갔다. 이그노트 공작이랑 적대적인 가문의 사람이라든가……?
큰 세력을 가진 가문이라면, 아마 적도 있을 것이다. 황궁 와서 처음 만나는 낯선 이가 적이라니 참 운도 없다.
“카일러 공작이 와 있는 것이냐? 그는…… 지금 어디 있지? 황제를 알현 중인가?”
그런데 갑자기 여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의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감추려고 노력은 하는데 유심히 보면 초조한 기색이 너무 잘 보였다.
“공작님은…… 잠시 볼일 때문에 가셨습니다. 저는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셔서…….”
누구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겨우 참고 대답했다. 살짝 초조하던 그 얼굴에 갑자기 옅은 분노가 고였다. 표정이 참 솔직한 여인이었다.
“하녀가 주인이 어딜 가는지도 모르고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이그노트 공작저에서는 하녀 교육을 이렇게 시키는 것인가?”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에 사샤는 두 눈을 끔벅끔벅 빠르게 깜박였다.
애초에 하녀라고 한 적이 없는데 왜 자꾸 하녀로 몰고 가는 것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는 건데, 그게 그렇게 다른 사람이 화를 낼 일인가 싶은 것이다.
“저…… 저는 하녀가 아니…….”
“애초에 혼자 다니시던 분이 하녀를 왜 데리고 온 거지……? 너, 바른대로 말하는 게 좋아. 이그노트 소속이라는 거 거짓말이지, 어? 어디서, 사칭을 해도 유분수지. 말해! 말하라고!”
갑자기 급발진하는 이 여인은…… 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그노트의 일에 이렇게 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것일까.
“고, 고정하세요, 폐하! 제가 데려다가 잘 타일러서 내보내겠습니다.”
중년 여인은 갑자기 난리가 난 그녀를 붙들고는 말리느라 진땀을 빼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사샤는 호칭 하나를 획득했다.
그런데 그 호칭이 의심의 여지없이 너무나 딱 한 명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폐하는 황제를 부르는 말인데 황제 폐하는 아까 뵙고 나온 그 남자분이니 눈앞의 또 다른 폐하는…… 바로 황후 폐하인 것이다.
무례할 만했네. 하루 황궁에 들렀다가 황제에 황후까지 보고 가다니.
딱딱한 얼굴로 따지고 드는 황후는 유하고 능글능글한 황제와 어울리는 듯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는 듯 애매한 분위기였다.
이제 와서 아하, 황후 폐하셨군요, 하고 정정할 수 없으니 사샤는 그저 묵묵히 그녀의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씨익씨익대는 숨을 삼키려 애를 쓰다 보니 드레스로 한껏 조인 그녀의 가슴이 빠르게 들썩거렸다.
“거짓말을 한 적 없습니다. 오늘 공작님과 함께 황궁에 도착했고, 지금은 그분의 말씀에 따라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도 나름 산전수전 정도는 겪어 본 지라 사샤는 이런 때일수록 차분하게 행동했다.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보아 살짝 눈을 내리깐 듯한 모습을 하고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차근차근 설명을 했다.
“이게 정말 끝까지…….”
하지만 아무리 차분히 한다고 해도, 상대방에서 들어줄 의지가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황후는 애초에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던 듯 그녀의 말이 끝나자 버럭 화부터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