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그들이 알현실에 들어올 때부터 내내 리디안이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질문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도 마치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이야기하는 듯한 질문들을 듣다 보니 대체 무엇을 대답해야 하나 멘붕에 빠질 것만 같았다.
“그만 놓으십시오. 너무 질문 공세를 퍼부으면 부담스러울 겁니다.”
카일러는 그녀를 이끌어 황태자위보다 아래쪽으로 마련된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그는 그 수다에 흠뻑 빠진 리디안의 신난 얼굴에 한숨을 폭 쉬었다.
“내가 뭐 국제 정세에 대한 의견을 진지하게 묻고 있는 것도 아닌데?”
카일러의 타박 한마디에 볼을 부풀리는 황제를 보고 있자니 긴장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아, 저러다가 갑자기 확 돌변해서 사람들 잡아먹는 악마가 돼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별 생각을 다 하면서 사샤는 의자에 앉은 채 주변을 돌아보았다. 황제의 알현실은 고급스럽기 그지없었다. 흰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인테리어가 정말 고급스러웠다.
갖가지 안료를 사용해 그림을 채워 놓았고, 그 그림들은 그녀가 봐도 하나같이 너무 아름다운 상태였다.
아마 이 화려함이 데르마 제국의 힘을 보여 주는 것일 터다. 알현실이라고 하면 자국이든 타국이든 황제를 보기 위해 온 사람이 제일 먼저 황실 내부를 접하게 되는 곳이고, 그만큼 제국의 위엄을 한눈에 심어 주기 좋은 장소인 것이다.
“물가에 애를 내놔도 이렇게나 싸고돌지는 않겠군. 그래도 부인을 이리 아끼니 아주 보기 좋구먼. 응?”
황제가 빙글빙글 웃으면서 사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주변에 넋이 나가 있느라 아직도 무아지경이었다.
황제가 앉아 있는 의자는 조금 높은 단상 위에 있었다.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니, 내려 보는 그 위치가 그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려 보였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계속 유심히 들어 보았지만 역시나 황제와 공작은 굉장히 막역한 사이인 것 같았다.
차분하다 못해 차가워서 얼 것 같은 카일러와 빙글빙글 눈웃음을 달고 그녀를 향해 미소와 질문 공격을 퍼붓는 수다쟁이 황제의 조합을 언뜻 상상도 못 할 만큼 어울리지 않아 보였지만, 확실한 건 카일러도 굳이 황제에게 밉보이기 싫어한다는 것 정도?
한껏 어깨에 들어갔던 긴장도 슬슬 풀어지고, 사샤는 물끄러미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 나는 이 데르마 제국의 황제 리디안이라고 한다. 만나서 반갑다, 사샤 공작부인.”
“아…….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
리디안 황제……. 이 세계에 떨어지자마자 공작의 부인이 되지 않나 황제 폐하를 이렇게 손쉽게 알현하질 않나…… 이 정도면 좀 출세한 사람 정도 된 거 아닌가 싶다
“이렇게 와 주어 고맙네. 어때 여기 마음에 들어? 심혈을 기울여 남겨 놓은 벽화이지.”
“아, 예. 아주아주 화려하고 아주아주 멋진 곳이네요.”
사샤는 우선은 묻는 대로만 대답했다. 자리를 잡고 앉았고, 오늘 입궁에 일이 있었던 것은 자신이 아니라 제 옆의 카일러였으므로.
그녀가 알현장을 유심히 돌아보는 것을 알았는지 리디안은 자꾸만 카일러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그녀를 감상하고 말을 툭툭 던지고 있었다.
“거기의 그건 저쪽 탄 왕국에서 보내온 물건이다. 원한다면 가져가도 좋다. 선물로 주지.”
“예? 아, 아닙니다! 선물은요, 당치도 않습니다.”
다른 왕국에서 보낸 물건이면 선물로 보낸 걸 텐데 덥석 넘기시겠다니요……! 탄 왕굴의 공격을 받게 되는 건 아닐까 싶어 손사래를 쳤다.
바깥에서는 귀족들이 알아볼까 봐 그게 겁이 났었는데, 지금은 황제가 훨씬 고난도였다.
그쪽에서 보낸 물건들이 화려한 것이 많다 보니 여기에서도 선물 관리에 시달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정말 아름다운 보석이네요.”
괜히 이거저거 구경하고 감탄하는 듯한 리액션으로 넘겨보았다. 괜히 그러시는 거겠지, 진짜 주진 않겠지, 하고 자신을 위로하며.
“저, 그런데 황제 폐하.”
그리고 용기 내어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카일러가, 황제가 자신을 데리고 수다 떠는 걸 보기 위해 황궁으로 가자 한 것은 아닐 터였다.
“오늘 공작님께서 볼일이 있으시다 해서 따라왔는데…… 혹시 나눌 얘기가 없으신가요?”
말을 빙빙 돌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쓸데없는 감일까. 그녀가 살짝 눈을 깜박이며 물어 오자 황제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영애는 좀 영특한 느낌이 드는군? 마음에 아주 들어.”
영애‘는’에서 좀 애매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사샤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하며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자, 그럼 우리 얘기를 해 볼까, 카일러?”
씨익 웃으면서 각오하라는 듯이 말을 시작했다.
황제는 보면 볼수록 오묘한 사람이었다. 호쾌한 듯하다가도 눈빛이 매섭도록 날카로웠고 뭐든 퍼 줄 것처럼 생겼는데 자세히 보면 알현장에 굉장히 소소한 소품들이 많이 있었는데, 선물받은 것들을 꼼꼼하게 모아 놓은 것 같았다.
그 날카로운 눈빛은 분명히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두 눈을 들여다보는 그의 눈빛에도 힘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훑어보는 눈에서 완벽한 호의가 아닌…… 뭐라 해야 하지, 호의의 이면에 숨어 있는 날카로운 무엇을 보았다. 하나라도 수틀리면 그 날카로운 것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번에는 남쪽으로 다녀왔습니다. 본래 한 달 일정이었던 것을 2주 만에 하고 왔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빨리 끝낼 수 있었지?”
황제가 그렇게 질문을 할 때만 해도 매우 사무적이고 진지했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그녀의 앞에 그걸 내놓을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것 같았다.
“내가 괜한 걸 물었군. 집에 저렇게 아름다운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면, 나라도 일을 빨리 끝내고 싶었을 거야. 안 그런가?”
“안타깝게도 그런 이유는 아니니 안심하시죠.”
카일러는 그런 황제의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바람부터 읽는다. 그러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간다.
“서쪽에서 도망쳐 간 이들로 이루어진 무리였습니다. 애초에 이미 졌던 자들이고 이미 도망치는 데에 힘을 모두 쏟은 상태이기 때문에 시간이 아무 의미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카일러가 간략히 상황을 설명하는 화중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간혹 사샤와 눈이 마주치면 싱긋 웃었다.
카일러와는 조금 다르지만 못지않은 미남이어서 조금 놀랐다. 귀족들은 다 예쁘고 잘생긴 것일까.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카일러의 보고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리하여 서쪽 반란 무리에 대한 정리는 이제 끝났습니다. 아마 재기하고 싶어도 한동안은 무리일 겁니다.”
“음, 아주 좋아. 역시 카일러가 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아,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이야기야.”
씨익 웃으며 연극조로 이야기하는 황제의 모습에 왠지 모르게 살짝 소름이 돋는 거 같았다.
카일러가 무대 위를 종횡무진하는 멋진 남자 배우라고 한다면, 그는 연출가 같은 사람이었다. 아니, 거기서 좀 더 느낀 바를 반영하자면…… 다른 사람들의 팔다리에 줄을 걸고 조종하는 마리오네트 조종자 같은 느낌이었다.
방금 그 미소에서 그런 느낌을 확 느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카일러의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달까. 권력자는 착하기만 해선 안 된다. 그래서는 다스리는 사람들이 옳은 방향으로 갈 수가 없으니까. 어쩌면 이 남자가 표본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따라 과하십니다. 사샤가 있어서 이러시는 겁니까.”
기어이 카일러가 한마디를 더했다. 하지만 이 황제는 또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버렸다.
“사샤……! 이름으로 부르는구나! 아, 당연한 건가. 결혼한 사이니까? 나는 황후를 황후라고 부르고 이름을 안 부르니 신기해서 말이야. 다정한데?”
카일러의 입에서 나오는 사샤라는 이름을 들으면 사실 본인인 그녀조차도 살짝 떨리는 것을 느꼈다. 나직한 목소리는 항상 차가운 느낌부터 드는 데 이상하게 그 이름을 부를 때면 녹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폐하.”
그래, 이 목소리. 얼마나 싸늘한지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였다. 그의 이런 반응에도 전혀 겁먹지 않는 황제는 다시 보아도 엄청 무시무시한 계급의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공작부인은 좋겠네. 제국 최고의 남자가 이렇게 아끼고 아껴 주니 말이야.”
“제국 최고의 남자도 아닙니다.”
혀를 작게 차는 것도 너무 새로웠다. 황제에게 매우 충성할 것처럼 생겼는데 생각보다 매우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다. 깍듯하게 예는 지키는데…… 왠지 군신 관계보다는 친우가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제가 제국 모든 남자들이 어떤지 잘 모르지만…… 아마 최고의 남자는 맞을 거 같아요.”
사샤가 그의 말에 대꾸하자 황제의 눈동자가 흥미롭게 반짝였다.
“그렇고말고. 지위도 높지, 검술 실력도 갖추고 있지. 그렇다고 멍청한가? 생각보다 머리가 좋은 친구야. 전술도 짤 줄 알고. 거기다가 잘생기기까지 했지. 온 제국 영애의 꿈이라니까?”
또 능청스럽게 말하는 황제가 난데없이 카일러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가만히 듣고 있기만 하는 게 어려웠던지 슬쩍 그녀 쪽으로 몸을 숙여 가까이 다가왔다.
“폐하의 말은 적당히 걸러 들어라. 그저 대화하는 게 즐거운 분이니까.”
너무나도 찰떡같은 설명에 사샤가 풉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와…… 황제 앞에서 이렇게 애정 행각도 벌이고 말이야.”
“애, 애정 행각이 아닙니다……!”
아, 반응하고 말았다. 그녀가 하는 말에 또 씨익 웃는 황제를 보고서야 아차 했다.
이 사람 앞에서는 말리는 게 일이 될 것 같았다. 그나마 카일러쯤은 되어야 휩쓸리지 않고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소란은 없습니다. 아마 반란 종자들은 제대로 이번에 타진을 한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쓸데없는 대화가 오가고 있는 도중인데도 그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준비하고 있다가 침묵 시에 툭툭 던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 황제와 대화하는 아주 노련한 방법인 듯했다.
“아주 흡족한 대답이야. 역시 카일러야. 상을 내릴 테니 가져가도록 해. 기사단들에게도 충분히 보답을 해야 다음에 문제 생길 때도 더 열심히 해 주지 않겠나?”
“모두들 좋아할 겁니다.”
사샤는 이 오묘하고 신기한 관계에 대해 호기심만 잔뜩 생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