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아침이 되면 새소리가 참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소리에 기분 좋게 눈을 떴다가 침대 위의 상황에 화들짝 놀라 심장이 벌렁벌렁대는 때도 있고.
오늘이 그랬다. 좋은 기분으로 잠에서 깼는데, 눈을 뜨기도 전부터 몸의 반 정도를 덮고 있는 뜨거운 온기에 지금 상황이 어떤지를 깨달아 버리고 마는 것이다.
전날 낮에 사샤가 했던 뻘짓은 밤이 되자 바로 실행되었다. 그의 침실로 가 그의 침대에 눕혀져 그가 내 위로 올라타는 일.
오랜만의 진득한 스킨십은 더욱 집요해졌고 움직임은 강해졌다. 힘 있게 들이칠 때마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체력을 기르라는 게…… 설마 이거 때문은 아니겠지.’
사샤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생각에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맨몸을 끌어안은 그의 맨몸, 닿은 부분마다 뜨거운 이 남자는 오늘 아침엔 그녀보다 늦잠을 자고 있었다.
깨지 않게 나가고 싶은데…….
온몸을 옭아매고 있는 통에 밀어내고 빠져나가고 할 틈이 없었다. 이리저리 틈을 보고 몸을 꼬아 봤지만 결국 포기하고 몸에 힘을 풀어 버렸다.
하아…… 어려우시네.
“그만 꿈틀대라. ……위험하니까.”
하마터면 엄마야! 하고 면전에 소리를 질러 버릴 뻔했다. 그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품 안의 내가 꼼지락대는 걸 느끼고 있었나 보다.
“위험은 무슨 위험, 저 나가게 팔 좀…….”
“이제 위험이 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아……. 사샤는 아랫배를 압박하는 단단한 살의 감촉에 놀라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고 말았다.
“이, 일어나야죠……. 더는, 못 해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정수리 위에서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오늘은 하고 싶어도 못 하겠군. 이제 준비하고 나가야 해서.”
“어디 가세요?”
“황제께 간다.”
깜짝 놀랄 인물이 나오자 사샤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여기와는 다른 곳에서 왔어도, 황제 폐하가 어떤 위치의 사람인지는 알고 있었다. 제국을 위해서 일하네 유구한 가문이네 하더니 황제와 실친쯤 되시는 건가…….
“함께 알현하겠나?”
“예……? 제가 왜요……?”
높으신 분은 카일러만으로도 충분한데 말입니다.
그녀가 한껏 쫄아서 긴장하자 몸이 그걸 나타내는지 카일러는 한 번에 알아채 버렸다. 그는 이번엔 쿡, 하고 웃은 뒤에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오늘 함께 입궁하자. 폐하께서 좋아하실 거다.”
뭐…… 실친이시라면 친구의 아내 정도는 방문도 허락해 주시고 혼내거나 하진 않으시겠지.
“공작님이 괜찮으시다면 저는 좋아요. 함께 갈래요.”
왠지 떨어지기 싫은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흔쾌히 허락했다. 어떤 드레스를 입고 가야 이그노트 공작부인의 품위에 맞는 걸까, 혹은 가서 하면 안 되는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차곡차곡 늘어 차올라 버렸다.
빨리 나가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마구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사샤는 문득 현실로 돌아왔다. 얼른 준비를 시작해야 할 텐데, 이제……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막상 나가려니 또 눈 뜨자마자 했던 걱정이 다시 찾아왔다.
어떻게 이 품에서 빠져나가느냐, 빠져나간다 해도 알몸인데 어떻게 그의 눈에 안 띄고 나갈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을 가지고 고민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왜 아직도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 거지? 폐하의 앞에 설 때도 내가 뒤에 있을 것이고, 뭔가 곤란하다 싶으면 내가 다 막아 줄 수 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걱정의 방향이 조금 달랐지만…… 그가 저렇게 말해 주니 그래도 마음이 놓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저어…… 이제 일어나서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준비하면 되지.”
“그럼 팔을 놓아주셔야 한다고요.”
아침부터 이게 무슨 설전이람……. 사샤는 그냥 대놓고 말해 버렸다. 네가 잡고 있어서 내가 아무것도 못 한다고 말이다.
“…….”
그런데 방금까지 말만 잘하던 공작님께서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뜨거운 몸이 자꾸만 살에 감기는 느낌이 들어서 얼굴이 빨개지려는 차에 말없는 그가 이상했다.
“에……?”
너무 말이 없는데. 사샤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려는 사이에도 카일러는 포옹한 팔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다리로 감은 힘이 더 은근하게 강해지는 건…… 나의 착각일까.
기겁을 하는 사샤의 반응이 재밌었던 건가. 재밌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정말 일어나야 할 때였다.
“그럼 눈을 감고 있을 테니 일어나서 옷가지를 챙겨라.”
“……꼭 감고 있는 거 맞아요?”
조금 못미덥다는 생각이 들곤 했지만 우선은 그의 말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두 눈을 감을 걸 제대로 확인한 뒤에야 힘까지 풀어 준 그의 팔을 걷어 내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허리 아래쪽이 꽤 뭉근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지만 막상 일어나서 움직여 보니 그럭저럭 괜찮은 반응이었다.
재빠르게 움직여 챙길 옷을 챙겨 입고 나자 어떻게 알았는지 카일러가 눈을 뜨고 있었다.
“시간 절약을 위해 함께 씻어도 된다.”
“예에?”
아니, 이 남자가 이런 말도 한다고? 하고 쳐다보는데, 그런 말을 입에 답은 것치곤 표정이 너무 담백해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런 건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거구나…… 어쩌면 난 괜찮 걱정을 한 걸지도……?
“그것은 사양하겠습니다. 실례합니다.”
정중하고 단호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힌 뒤에 공작의 방을 나섰다. 오늘 왠지 모르게 조금 설레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
황제에의 보고를 위해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이었다. 무엇을 하든지 그에게 따라붙는 사람들의 시선이 제일로 귀찮았다.
다행히 황궁에 귀족들이 많지 않은 때의 경우에는 마차에서 내려 걸어가려는 그에게 귀족들이 들러붙어 흔드는 바람에 걸어 나가기에도 어려울 지경인 때가 있었다.
이건 무슨 게임 같은 것도 아니고, 매번 입궁할 때마다 이런 일이 꼭 일어났다. 매번 잘 피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을 꼭 피해야 하는 폭탄처럼 만들어 버리는 것도 재미가 없었다.
“우와…….”
그녀는 마차 밖으로 보이는 화려한 황궁의 모습에 조용히 감탄했다. 그 감탄을 보이기는 쑥스러운 건지 뭔지 그렇게 입 모양만 나도록, 감탄사는 공기 빠지는 소리만 나도록 그렇게 작게 리액션을 했다.
오늘은 사람들이 있는 날이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조용히 지나가기엔 글렀군, 하고 조용히 혼자 생각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바깥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최대한 본궁 건물 앞에 가까이 마차를 대고 최대한 조용히 내려서 가려고 했는데…… 애초에 그가 온 이상 온 신경은 이쪽으로 한계가 있을 수 있었다.
“고, 공작님…… 사람들이 전부 이쪽만 봐요.”
그녀도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그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겁에 질린 그녀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멀리서 보기에 편안히 귓속말을 주고받는 여느 부부처럼 보였다.
“사샤…….”
“앗, 네!”
아차, 이그노트 가문의 위엄…….
사샤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게 화들짝 놀라 크게 대답하다가 갑자기 그의 반응에 멈춰 버렸다. 시선이 많은 곳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이그노트의 공작부인으로서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면 안 되는데, 이렇게 촐싹맞으면 안 되는데.
카일러가 보기에도 이쪽을 보는 귀족들의 엄청나게 많이 있었다. 회의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오늘 이곳에 적당한 모임이 있었던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본래는 알아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피해 다니면 될 일이었는데 그녀가 꽤 신경이 쓰였다.
“견디기 어려운가.”
사샤가 이 시선을 모두 버텨 내 주었으면 했다. 제 옆에 있으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그것이었다. 견디기 어렵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돌아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어려운 건 없어요. 그냥 보고 있나 보다 하니까. 그냥 가 버리면 그만이죠. 문제는 대꾸를 해야 하는 일이 생기느냐인데…….”
“아마 사교 모임 같은 걸 나간다고 하면 저런 시선들에 대답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힘들겠지?”
사교 모임이라니…… 생각도 못 했던 이야기가 들어오자 사샤는 조금 멈칫했다.
“사교 모임…….”
“그것이야말로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니 고민해 보고 말해 줘. 당도했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그들을 커다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문을 지키는 듯이 서 있는 한 남자를 만났다.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적으로 끊겼다.
“오셨습니까. 폐하께 아뢰고 오겠습니다.”
깍듯하게 말을 남기고 들어간 이가 황제에게 뭐라고 고하는 걸까, 작아서 잘 안 들릴까 귀를 기울이려고 하는데, 걱정이 무색할 만큼 큰 목소리로 이그노트 공작님 내외가 도착했습니다! 하고 외치는 게 아닌가.
이그노트 공작 내외…… 공식적으로 불린 그 명칭이 어쩐지 미묘했다.
“오, 그래. 어서 들어오라고 해.”
안에서는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샤가 상상했던 황제 폐하와는 많이 느낌이 달랐지만 왠지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인 것 같기는 했다.
“들어오십시오.”
시종장이 다시 나와 이야기하자 카일러가 앞장서서 알현실로 들어간다.
“오, 왔구나! 세상에. 함께 올 거라면 미리 언질이라도 넣어 줄 수는 없는 겐가?
그가 왔다는 소식에 리디안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던 사샤는 세상 발랄한 황제의 말에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황제는 언제나 자신의 발이 되어 주는 이들을 지배하고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가.
“처음 뵙겠습니다. 사샤…… 이베른, 아, 아니, 이그노트라고 합니다.”
사샤는 아무 생각 없이 이전의 성을 입에 올리려다 화들짝 놀라 바로 정정했다. 식은땀이 흘렀지만 카일러도 황제도 별로 신경 안 쓰는 눈치였다.
“그러게. 처음 보네. 앞으로는 자주 보게 될 것이다. 카일러와 내가 워낙에 막역해야 말이지. 이렇게 어여쁜 부인을 두고 장기 출타를 다녀오기만 해선 안 되는 것인데. 그것보다는 가정에 충실해야 할 시기란 말이지!”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