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유리 온실 입구 쪽으로는 울창한 나무들이 줄을 잇고 안으로 들어올수록 아기자기한 꽃들이 늘어서 있었다. 귀한 종들은 더 안쪽에 모셔져 있다시피 한 이 사치스럽도록 반짝이는 온실의 중간, 쉼터처럼 만들어진 공간에 화려한 식탁이 차려졌다.
온실보다 더 화려한 무늬의 식탁과 의자, 그리고 그만큼이나 화려한 음식들이 잔뜩 차려진 그 식탁으로 황제 리디안이 투덜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대체 왜 식사를 온실에서 하자는 게야. 한겨울도 아니고. 나 더위 좀 타는데, 온실은 답답하단 말이다. 쯧.”
옷을 갖춰 입지 않을 수도 없는데 그 옷을 입고 오기엔 날씨가 너무 좋았다. 그가 들어온 중간 입구만 열어도 바깥의 시원한 바람이 좀 들어와 줄 텐데, 온실의 문은 주인의 허락 없이 함부로 개폐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관리가 엄청 잘되고 있군. 황후가 좋아하는 공간이니 각별히 더 신경 써서 관리하라고 일러둬. 알겠어?”
가볍게 지시를 내리고 난 뒤로도 덥다고 투정을 부리던 리디안이 식탁에 가까워져 자리를 잡자 곧 저 안쪽에서 기다렸다는 듯 보라색 드레스가 등장했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당황한 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방금 나타난 곳에선 그의 투덜거림이 아주 잘 보일 위치였던 것이다.
“그렇게 싫으시면 저와의 식사 시간은 없애시죠.”
“하, 역시이…….”
왜 거기 있다 나오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자신의 투덜거림을 전부 들었다는 것이 실제 상황이었다.
“뒷얘기까지 들었으면 화는 좀 풀어 주지?”
들켰다, 하는 표정을 지었다가도 리디안은 금방 얼굴을 풀어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런 그를 슬쩍 흘겨보고는 황후 미디에나도 자신의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호화로운 상차림은 어느 정도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리디안과 미디에나의 점심 식사였다.
사랑 없이 결혼하는 황제와 황후는 역대에도 많았다. 비단 그것은 황실만의 일이 아니라 세력을 위해 뭉치는 귀족 간에도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하지만 가문의 필요성으로 이곳에 와 놓고도 전혀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않고 객기(?)를 부리는 황후도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마음을 따라가겠다며 제국의 가장 실세인 공작에게 마음을 품었다 고백하기도 했다.
괘씸해서라도 쫓아내거나 했으면 좋았을 텐데…… 우선 그렇게 내팽개치기에 그녀의 마음을 빼앗은 공작가가 역사가 깊고, 현 공작 또한 황제의 최측근이며 제국에 꼭 필요한 능력을 갖춘 자였다.
그렇다고 그런 이유로 황후를 폐위시키자니 황실의 이름에 먹칠이 되기도 하고, 세력의 규모가 큰 메딜란 공작과의 관계가 매우 복잡해졌다.
“왜 그렇게 식사를 못 해서 안달이세요. 좋아하시지도 않으면서.”
새침한 빨간 입술이 그렇게 말하고는 꾹 다물린다. 포크를 집어 드는 손마저도 우아하다.
“뭐 우리가 서로 좋아서 하는 일이 있나. 해야 하는 일이니 하는 것이지.”
한평생 제국에 큰일 만들지 않고 살다가 보위를 물려주는 것이 목표인 리디안으로서는 대부분의 일이 그랬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보다 해야 해서 하는 일이 더 많았다.
물론 그중에는 시작하고 보니 정말 즐거워서 하게 되는 일도 있었다. 일방적인 거라면 그것은 아주 행운 같은 일인데, 상대방이 저 모양이라면…… 조금, 아니 많이 어려운 상황이 되는 것이다.
“아, 아버지가 원한 거라고 했죠. 알겠어요. 나도 아버지한테 시끄러운 소리 듣기 싫으니까.”
그녀는 또 새초롬하게 대꾸하고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작게 입 안에 넣고 오물거리길 반복하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리디안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한동안 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의무적인 식사에서 대화를 이끌어 가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미디에나와 말을 걸어 봐야 예민하게 반응할 그녀가 식사나 제대로 하고 갔으면 하는 리디안의 배려로 조용한 식탁.
한창 맛있게 먹고 있던 리디안이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미디에나의 가까이에 있던 스테이크 접시를 번쩍 들어다 치워 버렸다.
“한테스! 당장 주방장을 끌고 와!”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미디에나를 포함한 주변의 모든 이들이 화들짝 놀라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리디안의 명령에 시종장 한테스는 지체도 없이 바로 온실을 나섰다.
“이게 무슨…… 무슨 일인가요?”
미디에나는 아직도 얼이 빠진 상태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항상 느긋하고 능청스러운 리디안은 큰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그렇기 때문에 매사 심드렁하게 굴던 미디에나조차 긴장하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미디에나, 산딸기에 알레르기 있다는 거, 주방장에게 알리지 않았나?”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서서 그녀에게 물어보는 리디안의 목소리가 자못 진지했다. 그의 기세에 살짝 눌린 미디에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말했을 거예요. 주방에 사람이 새로 올 때마다…… 필수적으로 전달하라고 되어 있어요.”
미디에나는 빨간 입술을 깨물며 리디안이 들고 있는 스테이크 접시를 바라보았다. 그의 질문으로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가 어째서 저렇게 화를 내고 있는지.
곧 주방장이 불려오고 불같은 추궁이 이어졌다. 누구를 통해서도 아닌 리디안이 직접.
“어떻게 황실에서 일하는 주방장이 모시는 이들의 알레르기조차 모른단 말이냐. 말하라. 너에게 사주한 자가 누구냐!”
“흐익! 죄, 죄송합니다, 송구합니다, 황제 폐하! 저, 저, 저는 막 1주 전에 새로 온 주방장으로…… 그, 알레르기에 대해서는 전혀 전달받은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정말 전혀 몰랐습니다!”
억울하게 외치는 주방장은 몇 번이고, 들은 게 없다, 죄송하다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주방에 일하는 이가 너뿐이냐.”
“그, 저와 한 명 더 있습니다. 그자도 저와 함께 1주 전에 들어왔습니다.”
한참 그를 내려다보던 리디안은 이번엔 황후를 모시는 시녀장 레이리를 불렀다.
“주방에 알레르기 사실을 전달하는 것은 누구냐.”
“그, 그것이…… 주방에는 항상 세 명 정도가 있어 왔기 때문에 주방장들끼리 정보를 공유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리디안은 어느 때보다 황제다운 얼굴로 주방장과 시녀장을 바라보았다.
“주방장이 싹 갈렸는데, 시녀장이 알레르기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예? 아…… 예, 폐하. 소…… 송구합니다.”
리디안의 신랄한 목소리가 레이라를 향해 쏟아졌다. 그러자 덜덜 떨던 레이라가 납작 엎드려서 싹싹 빌기 시작했다.
“아까까지 내가 들고 있던 스테이크의 소스, 무엇으로 만들었는가.”
“그, 기, 기본 소스에 산딸기를…….”
주방장의 대답에 레이라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산딸기에만 알레르기가 심하게 오는 그녀의 주인이 만약 그 스테이크를 먹었다면 정말 큰일이 났을 수도 있었다.
“저, 저의 죄가 큽니다. 내리시는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머리를 땅바닥에 마구 조아리며 울먹이는 레이라의 모습을 황제는 그저 서늘하게 내려다보았다.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를 알리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우발적 살인 행위에 가까운 것이었다. 알려 주지 않는다고 확인조차 안 한 주방장까지도 함께 이는 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폐하, 고정하세요.”
곁에서 덜 흥분한 것은 오히려 미디에나였다.
그녀는 지금 완전히 멍한 상태였다. 리디안이 이토록 화를 내는 것도 자신이 저 스테이크를 먹을 뻔했다는 것도 모두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시녀장은 모시는 이의 가장 위험한 요소를 미리 공지하지 않은 죄, 주방장은 모시는 이에게 가장 위험할 요소를 미리 파악하지 못한 죄가 있다. ……어쩌겠는가.”
“잠깐, 잠깐만요, 폐하.”
황제가 죄를 논하자 흠칫 놀란 주방장과 시녀장은 정작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는데, 뒤에서 미디에나가 그를 멈춰 세웠다.
화가 난 황제가 금방이라도 들고 있는 스테이크 접시를 두 사람의 머리에 때려 넣을 것만 같아서.
“됐어요.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들 조심하고. 나도 먹기 전에 조심할 거니까, 이만 넘겨요.”
덜덜 떠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던 리디안은 선뜻 나서는 미디에나의 선처에 눈동자를 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겠는가. 적어도 사람을 바꿔 주는 것은 바로 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한 리디안의 말에도 미디에나는 고집스럽게 그들을 황제의 손아귀에서 빼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모두 물러가라.”
황제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리자 바깥에서 들어온 이들이 두 사람을 끌고 온실 밖으로 나갔다.
한순간 터져 나왔던 소란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모두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미디에나와 리디안만이 남았다.
슬슬 스테이크 접시를 자신의 앞으로 내려놓는 리디안의 눈치를 보던 미디에나가 입을 열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녀가 꺼내는 목소리가 어딘지 가라앉게 느껴졌지만,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듣는다는 것은 진짜였다.
괜히 씰룩대는 광대를 다잡고 리디안은 당당하게 자기 자리에 앉았다.
“크흠, 뭐, 그대의 식습관 같은 건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지. 그대와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조심스러워지고 그러는 것이다.”
두 사람의 식사는 그렇게 다시 이어졌다. 아까의 일이 있어서 브런지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는데. 음식이 이어져 있었다.
“이거, 폐하께서 좋아하는 것이죠? 저는 이만큼 덜었으니 전부 드세요.”
식탁 앞에서 이런 식으로 말을 건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리디안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고맙게 먹겠어. 오늘 일은 나도 부주의했군. 사실 지금도 고용인들이 계속 바뀌고 있는 차니, 서로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멋쩍게 바라보며 리디안은 그녀가 건넨 음식을 찍어 먹으며 한껏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