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사샤는 급히 그의 팔을 붙들었던 손을 어색하게 놓고는 비어 버린 수프 그릇을 옆으로 치우면서 민망함을 떨치려 했다.
계약 이야기는 궁금하기도 하지만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괜히 들었다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충격을 받아 버릴까 봐, 그래서 아까까지와 같은 일이 반복될까 봐. 궁금증은 미뤄 두고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아, 그, 덕분에…… 정신 차렸어요. 고마워요.”
이 말은 반드시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너무 오랜 시간을 버려 버렸다.
로제가 아마…… 자신 때문에 골치를 썩지 않았을까 싶다. 그 외에 다른 하녀들도 방에서 두문불출하는 공작부인 때문에 엄청 귀찮았을 테고.
“로제랑…… 다른 하녀들에게도 미안했다고 전해 주세요. 저 때문에 많이 신경 썼을 텐데.”
웃음기도 지운 채 얘기하는 사샤를 바라보며 카일러의 입꼬리에 다시 웃음이 슬쩍 걸렸다.
생각하는 것까지 자신과 비슷했다. 자신의 그런 방황이 일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마음을 다잡고 난 뒤에야 그 부분을 생각하게 됐다.
틀어박힌 어린 공작을 대하는 게 편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카일러도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그들에게 사과를 했다.
카일러가 지그시 바라보는 바람에 사샤는 조금 볼이 따끈해지는 것 같았다. 뭐 어찌 됐든…… 그가 조금이나마 웃고 있는 걸로 봐서 이 일은 잘 넘어가 줄 건가 보다.
그런데, 이 남자……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생각이지?
이제…… 할 일 하러 가면 될 것 같은데 카일러는 앉은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테이블 위를 지그시 내려다보더니 팔을 쓱 뻗어 그녀의 손을 큰 손으로 감싸 잡았다.
흡, 사샤는 그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숨을 들이쉬었다. 아니, 그간 보면 이 남자 엄청 무서운 사람이라는 결론밖에 안 나던데. 그를 다정하다거나 친절하다거나, 그런 식으로 설명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그녀와의 관계 때문에 그를 욕구가 넘치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하녀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상황에 따른 추측이었을 뿐이다.
함께 보낸 밤을 생각하면…… 그녀가 거절했다 생각하고 난 뒤로도 그녀를 품에 안아야 자는 그를 보면 타당성도 있어 보이긴 하지만…… 아무튼 이건 아직 억측일 뿐이었다.
그런데 사샤가 보고 느끼는 카일러 이그노트라는 남자는 들리는 소문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일러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걸 놓지 않은 채라 사샤도 그의 걸음을 따라 의자에서 일어나 이끌려 걸었다.
근데 이 길로 걸으면…… 침대입니다만.
“저, 공작님? 지금…… 아직 해도 안 졌…….”
설마 이렇게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지라 사샤는 당황해 버렸다. 침대로 가지 않으려고 그 자리에 멈춰 뻗대 보려고도 했지만 그의 힘은 계속해서 그녀를 이끌었다.
그때 그가 슬쩍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표정 없는 그의 얼굴을 마주 보다 문득 흠칫했다. 그가 입을 열면 계약 이야기를 꺼낼까 봐……. 지금 그 얘기를 직접 들어 버리면 공작저를 뛰쳐나가 버릴 것 같아서 버티고 있던 힘을 풀어 버렸다.
버티던 힘이 풀리자 그는 계속 걸어 기어이 침대에 도착했다.
포기한 사샤는 스스로 침대에 올랐다. 그러고 똑바로 위를 보고 눕는데 그가 올라오지를 않는다. 아, 뭐야. 모처럼 마음먹고 자리까지 잡았는데 뭐 하느라 이렇게…….
괜히 막 심장이 뛰는 게 스스로 막 부끄럽고 그래서 두 눈 질끈 감고 기다리는데 그는 기척도 없다. 이상한 낌새에 꼭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떠 보자 그가 표정 없는 얼굴 그대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음, 억지로 눕히지 않아도 돼서 좋군. 그럼, 푹 자라.”
“……예?”
이, 이게 아니었던 건가? 사샤는 푹 자라는 말만 남기고 뒤돌아 성큼성큼 방을 나가 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 나 지금 혼자 그런 생각 하고 있었던…… 거야?
“끄아아!”
음란마귀가 씐 거야, 정말! 아악, 창피해!
사샤는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는 마구 발버둥을 쳐 댔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꺄앗!
머릿속으로 변명을 떠올리는 것조차도 너무 창피해서 베개 속에 비명을 질러 버리고 말았다. 나, 조금…… 기대라도 한 건가. 복잡하고 창피한 마음에 한동안 고개를 들지를 못했다.
*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저녁 식사 때가 된 식당에서였다.
식탁 위에는 만찬이 차려져 있었고, 사샤가 도착했을 때 식당에는 시중드는 사람들도 전혀 없이 카일러만 혼자 앉아 있었다.
각자의 몫이 팔 닿는 범위 안에 있어서 시중이 필요 없도록 세팅된 식탁이었다.
“어서 와. 아까 수프로 달랬으니, 먹을 수 있겠지.”
아무래도 오랜만에 방에서 나온 그녀를 배려한 것이었나 보다. 사람들을 최대한 마주하지 않게 해 주고, 며칠 제대로 못 챙겨 먹었다는 그녀의 배를 제대로 채워 주고 싶은 마음이 전해졌다.
사샤는 치마를 풍성하게 퍼뜨리는 속치마 같은 것도 없이 항상 심플하게 드레스를 입고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얼마나 말랐는지가 바로 보였다.
“좀 많이 먹어라.”
그녀가 앉아서 막 포크를 들어 올리려는데 카일러가 그렇게 한마디를 보탰다. 아니, 뭐 먹지도 않았는데. 심지어 포크로 뭘 찍어 보지도 못했는데 이게 지금 무슨 말인가.
“뭐가…… 맘에 안 드세요?”
뜻을 이해를 못 하니 타박하는 것으로 들은 사샤가 뚱하게 바라보니 카일러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아 올렸다. 팔꿈치 정도까지 오는 길이의 소매 덕에 드러난 팔에 뼈가 도드라져 있었다.
“너무 말랐어. 밤에 안을 땐 잘 몰랐는데…… 밝은 데서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마르면 체력이 안 붙으니 많이 먹어라.”
식탁 앞에서 그런 얘길……! 손목이 잡힌 채로 사샤는 얼굴이 화르륵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머, 먹을 테니까…… 손은 놓으세요.”
그는 잠깐 보고 놓을 생각이 맞긴 한 것인지 뼈가 도드라진 손목 부근을 손가락으로 계속 쓸면서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기 오기 전의 날은 내가 다 지워 주겠다. 그냥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이그노트의 이름에 먹칠만 하지 않으면, 무엇이든 된다.”
여전히 손목을 지그시 문지르며 그렇게 말했다. 카일러 이그노트라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분명 무서운 사람이랬는데…… 나한테 다정한 것은, 저런 말을 하며 내게 자유를 선물해 주는 것이 다 계약 때문인 걸까.
“자, 먹자.”
이제야 겨우 손을 놔주어 자유가 됐는데도 한동안 그녀는 손을 움직일 생각을 못 했다.
그가 두 번째 음식을 집어 입으로 가져갈 때가 돼서야 손을 움직였다. 포크를 들고 채소를 파삭,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신선한 채소를 씹으면서도 별다른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다.
“적어도…… 그대가 불쌍해서 데려온 것은 아니다.”
한참 말없이 각자의 식사를 이어 가고 있던 때였다. 갑자기 카일러가 예고도 없이 말을 툭 뱉었다. 순간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아서 예? 하고 되물어 버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와 잠깐 눈을 맞춘 채로 있다가 눈을 돌려 음식을 보는 척하며 다시 덧붙였다.
“이그노트가의 공작부인을 고르는 것이다. 대충 골랐을 리가 없다는 얘기야. 그러니 이곳에 온 것을 부정적으로만 생각지 말아라.”
자신이 제대로 된 영애가 아니었음에도 최고의 가문에 함께하게 된 것에 대한 자격지심 같은 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사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게 그런 거였다.
왜 나를? 계약으로 결혼을 했다는 나는 주인이 누릴 것들을 제대로 누릴 자격이 있는 건가?
그녀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맥락이 정확하게 일치해 버렸다.
“그 말씀은…… 혹시 저도 공작님께 도움이 되고 있다는…… 건가요?”
문득 든 생각에 사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일러는 ‘계약’이라는 말을 했다. 물론 계약이 꼭 동등한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것만 있진 않지만…… 기본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성립이 되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당돌하고 되바라지고 분수도 모르는 사람으로 보일까 싶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서 물었다. 이미 이렇게 조심스레 질문하는 것부터가 아직도 주눅 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는데…… 본래 성격대로 사는 게 참 쉽지가 않다.
“우리는 계약을 한 사이다. 네가 내게 부탁했다 한들…… 아무런 이득도 없이 데려왔을 리는 없지. 안타깝게도 난 자선 사업가가 아니다.”
부탁…… 엘리나가 태클을 걸었던 것은 저 이유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그의 입에서 사샤의 생각과 일치하는 말이 나왔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계약이란 단어에 매여 있던 마음이 팡, 하고 트이는 것이 느껴졌다. 더 이상 답답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좋아요. 이그노트에 해 입히지는 않을게요.”
씨익 미소를 올리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카일러가 다시 포크를 놀리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게 뭐든, 많이 먹어 두는 게 좋겠군.”
“네, 제 생각도 그래요. 공작님도 많이 드세요.”
어딘가 목소리가 씩씩해진 것도 같았다.
카일러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은 채 본인도 열심히 음식을 입에 옮겨 넣고 꾹꾹 씹어 넘기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전투적이 된 두 사람이 식탁 위의 음식을 하나하나 클리어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