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아, 기,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로제가 은제 뚜껑이 덮인 음식을 쟁반에 받쳐 들고 계단을 올라오다 그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마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이가 아직도 밖에 서 있으니 놀랐던 것이리라.
그녀가 다가옴에 따라 고소한 냄새가 훅 끼쳤다. 그가 쟁반으로 시선을 내리자 얼른 그의 앞으로 걸어온 로제가 안으로 들어가려 문손잡이를 잡는 것이 보였다.
카일러는 한 손으로 가뿐히 쟁반을 가로채 가며 문손잡이를 먼저 잡아 버렸다. 오른손을 뻗던 로제는 왼손이 허전해진 것도 못 느낄 만큼 화들짝 놀라 손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내려가서 일 봐라.”
“아니, 그, 음식을…….”
“…….”
“예, 알겠습니다.”
로제는 뭐라 말을 덧붙이려다가 황급히 물러났다. 그럼에도 약간의 불안을 담은 얼굴로 그 자리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런 로제를 두고 카일러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남긴 당부를 지키고 있었다. 이번에는 넓게 자신의 잎을 펼쳐 들고 해를 흡수하는 풀처럼 침대 가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젖히고 있는 그녀의 금발과 투명한 살결이 햇살에 녹아 들어가는 듯이 보였다.
아름다웠다. 햇살의 여신 같은…….
문을 닫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는지, 아니면 그가 들고 들어온 수프의 냄새가 전해진 것인지 사샤가 고개를 젖힌 상태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어둠 속에 갇혀 있어 봐야, 얻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문과 가까운 창문 앞 테이블에 음식을 내려놓고는 뚜껑을 열었다. 갇혀 있다가 화 하고 퍼져 나가는 김이 고소한 냄새를 순식간에 방 안에 터뜨렸다.
눈만 뜨고 자세는 유지하고 있던 사샤가 문득 고개를 내리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먹을 것 냄새에 반응까지 하다니, 정말 어린 짐승 같은 모습이라 웃음이 날 뻔했다.
“왜 밥을 여기서 드세요?”
“……뭐?”
“……네?”
아직 정신이 다 돌아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사샤의 엉뚱한 질문에 본래의 얼굴대로 대답을 해 버리자 사샤가 무슨 소리냐는 듯 이쪽을 바라보았다.
서로 그러고 바라보고 있다가 한발 먼저 물러서 준 것은 카일러였다. 오늘의 그녀는 상태가 걱정되는 수준이었으니까.
“사샤, 그대가 먹을 것이다. 이쪽으로 와라.”
“으음…….”
마음에 안 드는 목소리를 내는 그녀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물끄럼한 시선을 계속 받으려니 볼이 뚫릴 것만 같았다.
사샤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서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진해지는 향기는, 여기서 먹은 다양한 종류의 수프 중 가장 맛있었던 버섯 수프였다. 그간 음식 먹으라고 꾸준히 넣어 주던 것들은 어쩌고, 이 냄새를 맡자 입 안에 침이 고이는 느낌이었다.
햇빛을 쫴서 그런 걸까.
눈앞의 남자 때문은 아닐 거 아냐.
사샤는 머릿속에서 조금씩 문장을 만들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그냥 머릿속에 떠도는 말들에 갇혀 있던 느낌이었는데…….
그는 움직이기 시작한 그녀를 끈질기게 기다려 주었다. 커다란 몸으로 올곧게 앉아 끈질기게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있었다.
그를 시야에 잡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샤의 머릿속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자신을 내리누르는 것의 무게가 사라져 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카일러의 맞은편에 앉아, 자신 쪽으로 향해 놓인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도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카일러를 올려다보았다.
“혼자 먹나요?”
목소리가 엉망으로 나왔지만 사샤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자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로 받아들인 카일러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안 뺏으니 천천히 먹어라.”
아직 멍한 표정이던 사샤가 입술을 슬쩍 내밀었다. 절로 불퉁해지는 얼굴을 따라 멍하던 눈빛도 돌아왔다.
숟가락을 움직여 수프를 떠올려 입에 담아 보았다. 뜨거운 감각과 아직 퍽퍽한 입 안 때문에 맛이 바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그 향기와 입에서부터 속으로 퍼져 나가는 따뜻한 온기가 이 수프의 역할을 짐작케 했다.
“맛있네요.”
“우리 저택 주방장이 요리를 잘한다.”
그가 덧붙이는 말에 사샤는 쿡 웃어 버렸다.
사샤도 이미 음식을 여러 번 먹어 봤기 때문에 모를 수 없는 것이었다. 제 기분을 풀어 주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 주방장을 칭찬하고 싶었던 것인지.
그녀는 느리지만 차근차근히 숟가락을 움직였다. 계속 먹다 보니 입맛도 돌아오고, 온도도 적당해져서 한가득 떠올려 한입 가득하게 먹기 시작했다.
“손님맞이는 그다지 좋게 끝나진 않은 모양이더군.”
꽤 많은 양이 담겨 있던 수프 그릇의 3분의 2가 빌 때쯤 카일러가 본론을 꺼냈다. 생각보다 쉽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에게 정면으로 부딪쳐 본 것이다.
숟가락으로 수프를 더 떠 올리던 사샤가 멈칫했다. 역시 이렇게 엉망인 상태로 공작을 맞이한 것에 대해 궁금했을 것이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수프를 떠다 입으로 가져가면서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을 했다.
“네, 좋지 않았어요.”
사샤의 입장에서 이입한 것도 있었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도 굉장한 충격이었다. 충격을 받은 자신을 생각하면서도 또 충격을 받고…….
“왜 그들을 초대했는지, 그땐 그냥 넘어갔었는데, 물어보고 싶어지는군.”
역시 그는 알고 있었구나. 후작저 사람들과 사샤의 관계가 어떤지 말이다.
그럼, 사샤가…… 동생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을까.
엘리나 앞에서는 호기롭게 말했지만 사실 사샤는 거기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오히려 정말 빼앗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그녀를 보고 나니 뺏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사샤가 한 일이 맞았지만…… 그래도 조금 켕기는 것이다. 지금은 내가 사샤니까.
“그냥…… 얘기를 좀 나눠 보고 싶었어요. 떨어져 있기도 했고,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봤어요.”
당황한 기색은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열심히 수프를 먹는 척하는 게 그런 기색을 숨기기에 좋았는데…… 애석하게도 수프가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그대에게 영애가 함부로 대했다던데…… 어떻게 해 줄까.”
“……예?”
영애라면 엘리나를 말하는 걸 텐데……. 함부로 대했다는 건 어떻게 알았고, 어떻게 해 줄까는 무슨 말일까……?
그녀가 대답도 못 하고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자 카일러는 그녀가 대답하기 편하도록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광장에 끌어내 공작부인을 욕보인 죄를 물을까, 아니면 귀족 회의에 출석하게 해서 귀족들 사이에서 창피를 당하게 할까. 요란한 것이 싫다면 그냥 그대로 감옥으로 보내 버려도…….”
“무, 무슨……!”
사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광장이라느니 감옥이라느니…….
“그…… 그냥 말을 함부로 했을 뿐이에요. 그걸로 어떻게 그런 벌을…….”
당황을 숨기고 차분하게 답하려던 사샤는 수프가 사레들리지 않게 조심히 삼키고는 말했다.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고 지나가는 게 나을 뻔했다. 정신 바짝 차리고 로제 입부터 막았어야 했는데…….
괜한 욕심 때문에 저도 저지만 카일러까지 신경 쓰게 만들었던 게 이제 와 후회되었다.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편하게 살기 어려운 곳인 건가.
“이그노트는 유구한 데르마 제국의 역사와 함께한 가문이다. 어떤 때에는 황제보다 앞선 권위를 가지고 제국을 수호해 온 가문이야. 그런 가문의 공작부인을 함부로 건드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갑자기 저렇게 말하니 자기 자신이 더더욱 이곳에 있어선 안 될 것만 같았다. 그의 비장한 분위기를 깨기는 뭐했지만…… 묻고 싶은 말이 생겼다.
“그런 것치고…… 공작부인을 대충 고르신 건…… 아닌가요?”
공작이 빼앗겠다 나선다고 빼앗길 사람이냐고 따지기는 했지만, 계약이니 뭐니 운운하던 공작부인의 자리를 두고 저렇게 비장하게 말할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정말 복잡하게 꼬인 관계인 듯했다.
“엘리나의 말로는…… 제가 자기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하던데요.”
그녀가 따지려던 말에는 올라간 입꼬리를 유지하고 있던 카일러의 표정이 싸하게 식었다.
이제까지 중 가장 무서운 표정이 된 그를 보며 사샤는 저도 모르게 테이블 위에 얹어진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 여자가…… 그런 말을 했단 말이지. 그 이야기 또 누구에게 했다고 하던가.”
“지, 진정해요. 그냥 자기가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닐까요? 저는, 그…… 제가 모르는 때에 뭔가 이야기가 있었나 하는 생각 때문에…….”
금방이라도 이베른 후작저로 날아가 검을 휘두를 것만 같은 냉기가 흐르자 사샤가 다급하게 아무 말이나 꺼냈다. 다행히 진실에서 크게 어긋나는 말은 아니었지만, 사샤는 그걸 알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대신 그런 그녀의 모습 덕에 카일러는 금세 진정했다. 자신의 팔을 붙들고 있는 작은 손에 온기고 돌고 있는 것에 마음이 훅 풀려 버렸다.
“마치 내가 이베른의 둘째 영애를 공작부인으로 선택했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고, 두 번째로 내가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여자의 꼬임에 넘어간 가벼운 남자라는 말이 된다.”
“뭐…… 화내실 만은 하네요.”
이렇게 큰일 날 소리를 동생분은 참으로 당당하게 했구나.
사샤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뻔뻔하게 우긴다고 되는 일이 아닌데.
그리고 이야기를 나눌수록 뭔가 이야기의 앞뒤가 맞아 가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그는, 엘리나는 생각한 적도 없이 사샤를 공작부인으로 골랐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아차, 그리고 그 선택의 이유는 계약이었다. 그런데…… 진짜 무슨 계약이었던 걸까. 사샤가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을지는 이제 대충 파악이 되었다. 자신을 후작저에서 꺼내 달라고 했을 것이다. 저런 사람들 밑에서, 관심조차 받지 못한 채 다락방에서 살아왔다면 말이다.
권력과 외모, 젊음 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이 남자는…… 무슨 이유로 계약을 건 결혼을 해야만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