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카일러는 지체가 없었다. 욕실에서 나와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한 채로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갔다. 유려한 움직임에 옷자락이 고요하게 나풀거렸다.
한낮이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방에 있을 터였다. 자신의 방과 그다지 멀지도 않은 그 방문을 열자 어딘지 모르게 묵직한 공기가 느껴졌다.
이 느낌은…… 뭐지. 창문을 열지 않아 공기가 답답한 것은 아닌데,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카일러는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한낮의 햇살이 들이쳐야 하는 방의 커다란 창문마다 커튼이 꼭꼭 닫혀 있었다. 암막 커튼이 아님에도 어느 정도 반 이상 밝기가 줄어들어 버리는 바람에 고요한 공기만큼 조도도 훨씬 낮아졌다.
그리고…… 넓은 침대의 캐노피도 꽤 내려와 있었다.
동굴과도 비슷한 그 안에서 숨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사샤?”
그의 울림 좋은 목소리마저 묵직한 공기에서 제대로 퍼지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약한 숨소리만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나오고 있었다.
카일러는 가만히 발을 옮겨 침대로 다가갔다. 그 안을 들여다보자 침대의 어둠 속에서 사샤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아, 오셨어요. 고생……하셨네요.”
그제야 안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눈을 맞춰 주지도 않았고 목소리에 힘도 없었다. 그녀의 숨소리와 목소리가 침대 밖을 넘어서지 못하고 맴도는 느낌이었다.
묵직한 공기의 이유를 여기에서 찾았다. 사샤는 지금 자기 안에 갇혀 버린 듯했다. 그녀가 내뿜고 있는 기운이 이 방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신경도 쓰지 않고 그냥 이 방에서 나갔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은 자신이 잘 조절할 수 있어야 하고 그에게는 그런 걸 다스려 줄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카일러는 바로 나가는 대신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답지 않게 질문도 던져 보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이렇게 두고 나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느낌도 있었고…… 그녀는 항상 자신이 날카로울 때 자신을 달래 주는 이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원해서 한 일은 아니었지만…….
“아무 일도…… 아니에요.”
대답은 곧잘 한다. 얼핏 들으면 그냥 평소의 목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듯했다. 하지만 예민한 그의 귀에 그 공허함이 느껴졌다.
우선 이대로 질문을 계속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을 듯했다.
침대에서 일어난 카일러는 방 안의 모든 커튼을 걷기 시작했다. 촤악 촥 하는 소리가 온 방 안의 무거웠던 고요를 깨트렸다. 그도 모자라 커다란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추운 날씨도 아니었다. 오히려 바깥의 햇살이며 온도가 너무 좋아서 일부러 해질 때까지 바깥에서 있고 싶은 날씨였다.
마지막으로 창문 쪽을 막고 있는 침대의 캐노피까지 싹 걷어 올렸다. 그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사샤는 들이치는 햇살에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다시 오겠다. 저거, 이거, 닫지 말아라.”
조치부터 일단 해 둔 카일러는 그녀가 눈을 뜨는 걸 보지도 않고 바로 방을 나섰다.
쾅, 방문 닫는 소리에 얼굴을 잔뜩 찡그려 가며 눈을 감고 있던 사샤가 서서히 얼굴에 힘을 풀더니 눈을 슬쩍 떠 보았다.
어둡고 고요하기만 하던 방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밝은 햇살이 들이쳐 방의 절반을 환하게 물들였고, 눌리고 눌렸던 공기들이 해방이라도 된 듯 바깥으로 빠지고 바깥의 신선한 공기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하아……. 이게 뭐야.”
자신의 상태를 다시 한번 머리로 깨달은 사샤의 입에선 탄식이 흘렀다. 하지만 인식했다고 해서 그게 대번에 풀어지지는 않았다. 겨우 안정적으로 뜬 두 눈에 방 안의 변화를 담으며 사샤는 또 한동안 그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카일러는 방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로제를 손짓으로 불렀다. 그녀는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듯 약간의 불안을 담은 얼굴을 한 채 부리나케 달려와 그의 앞에 섰다.
“예, 공작님.”
보아하니 무서워하는 기색보다는 걱정과 불안을 가진 얼굴이었다. 그 표정까지 살핀 카일러가 입을 열었다.
“사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저런 상태였다면 고용인들이 모를 수 없을 것이다. 로제는 아마 그 이유가 무엇인지까지 파악이 가능할 터였다.
“그…… 제가 느끼기에는…….”
그러나 로제마저 쉽게 이유를 입에 담지 못했다. 말을 꺼낼 듯이 목소리를 내던 그녀가 다시 입을 다무는 것을 보았다.
“본 대로 말하라. 내가 없는 동안 그녀에게, 공작저에 생긴 일을.”
그의 무덤덤한 목소리도, 모르는 사람은 공포로 느낄 수도 있었다. 로제는 오랜만에 자신의 주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기운을 느끼며 더 망설여지는 것을 누르고 입을 열었다.
“그저께 이베른 후작저에서 후작부인과 영애가 다녀가셨습니다.”
“이베른 후작저가……. 그래. 온다 했으니. 그래서?”
그래서 그들이 와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갔다는 것인가.
그거 대답을 재촉하자 로제는 살짝 숨이 멎을 것 같은 긴장을 느꼈다. 여기서 일한 이래로 카일러가 다른 사람의 일을 알아보겠다고 이렇게 어르는 것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우선, 후작부인과 후작 영애 두 분만 다녀가셨습니다. 후작님은 일이 있으시다 하면서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 그럴 수 있었다. 꿈에도 그리워하던 딸도 아니었고, 쉽게 오갈 거리도 아니었다.
“그리고…… 외람되지만, 모신 손님들과 사샤 님의 사이가…… 좋지 않은 듯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그거 잠깐 반나절도 못 참을 정도로 좋지 않은 사이였던 거다. 얼굴 보고 밥 먹고 차 한잔 나누는…… 그 짧은 시간조차.
그런 사이인 걸 자신이 제일 잘 알 텐데, 무슨 생각으로 초대한다고 말했던 걸까. 공작부인이라는 이름을 걸고 얼마간의 기대라도 했던 것일까.
카일러는 로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더 말하라는 뜻의 눈빛에 로제는 몰래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세한 내용을 원하시니…… 가리지 않고 본 대로 말하겠습니다. 두 분 모두 사샤 님을 매우 무시하는 듯 행동하셨고, 특히 엘리나 영애께선 자신의 자리를 사샤 님께서 빼앗아 갔다며 윽박지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런 실랑이 끝에 두 분의 팔에 부딪힌 티 포트가 넘어졌는데, 후작부인은 손등이 시뻘겋게 변한 사샤 님 대신 드레스의 치마 자락을 살짝 적신 엘리나 영애님만을…… 챙기셨습니다.”
로제는 천천히 그러나 숨도 쉬지 않고 그날의 일을 전부 실토했다. 처음 반갑게 인사하는 사샤를 보고도 심드렁하게 대꾸하고 눈도 잘 맞추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보자마자 의심을 했었어야 했다.
티 포트는 사고였다고 해도, 티타임 도중 잠시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 봉변을 당하시지 않도록 신경을 썼어야 했다. 가족 간의 재회를 방해하지 말자 생각하고 있다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게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더랬다.
“그것뿐이군.”
“예. 그들은 그렇게 돌아갔고, 그날 저녁은 그냥 평소의 사샤 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로 점점 안 좋아지시더니 방 안에서 안 나오시고, 식사도 거의 안 드시고…… 그렇습니다.”
로제는 모든 것을 고했다. 사실 털어놓고 나니 속이 후련한 것도 같았다. 그녀는 모든 이들이 어려워하고 있는 공작부인이고, 그녀는 조심스레 묻는 말에는 탄식 섞인 한숨으로만 답하고 말았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해 준다 하면 역시 공작님께서 나서 주셔야 할 만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그렇군. 로제, 내려가서 사샤가 좋아할 만한 수프를 만들어 올려라.”
“지금, 말씀이십니까?”
로제가 고개를 들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로제는 바로 발을 돌려 아래로 내려갔다. 저녁 식사 준비가 시작되기 전에 어서 주방에 전달을 해야 했다.
카일러는 천천히 뒤를 돌아 그녀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로젠이 본 이상 더 자세히 이야기를 전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내용은 그게 전부일 것이다.
문제는…… 카일러가 듣기에 당연해 보인 그 일로…… 사샤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상처를 입었는가 하는 문제였다.
저건 마음에 상처를 입은 채 자신의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10대 시절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를 보살펴 줄 이가 하나도 남지 않았던 그때, 그에게 남은 거라고는 매일매일 자르고 도려내고 싶은 저주받은 귀로 소리를 듣는 것뿐이고 이 넓고 넓은 공작저에 혼자였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방에서 내 마음속으로 도피하는 것뿐이었다. 움츠리고 웅크리고…… 내 안의 어둠에 집중하고 있으면 다 편했다.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했다. 배고픈 건 어느 시간 이후로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건 혼자 깨어날 수 없었다. 적어도 주변에서 자꾸 소란을 만들어 줘야 했고, 아니면 손을 잡고, 아니면 멱살을 잡아서라도 우악스럽게 끄집어 올려 줘야만 했다.
카일러는 들어갈까 하다가 멈추고 그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사르륵 그가 몸을 비스듬하게 기울자 얇고 부드러운 천이 몸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베른…… 후작…….”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황권에 위협이 될 만한 세력을 갖춘 귀족뿐이었다. 그 이름 안에 이베른은 없었다. 제법 수도와 가까운 곳에 영토가 있는 이베른이었지만 위협적일 요소가 하나도 없는 곳이었다.
“특히 엘리나 영애께선 자신의 자리를 사샤 님께서 빼앗아 갔다며 윽박지르셨습니다.”
뭐…… 그 무렵 카일러는 비슷한 또래의 영애를 보면 우선 결혼 상대로 대입해 보았기 때문에 엘리나를 대입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렇게 보자면, 빼앗아 간 게 맞다고 해야 하나.
애초에 차지한 적도 없는 자리를 빼앗겼다고 윽박을 지르는 게 어불성설이다. 웃기는 동생을 두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