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남쪽의 여정은 오히려 생각보다 빠르게 정리가 되었다. 서쪽에서도 힘이 달려 도망갔던 기사들이니 남쪽이라고 힘이 솟아날 리가 없었다.
기사단들과 함께 서둘러 공작저로 돌아온 카일러는 저택의 정문 앞에서 딜런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공작님. 그래도 한 달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2주 만에 끝나서 다행입니다.”
딜런이 저택 입구에서 자신을 보고 선 카일러에게 말했다. 예상보다 반밖에 안 걸렸지만 2주 만에 돌아오는 공작저 앞에서 그들은 지친 기색도 없이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기사단들이 고생해 준 덕분이지.”
카일러는 무뚝뚝한 남자였지만 기사단의 노고에는 매우 후했다.
“그리고 노티언은 이번 실수에 대해 반성하고 개선하도록 해. 이번에야 운이 좋았지만 다음은 없을 수 있다.”
물론 잘못이나 실수에는 엄격했지만. 목소리나 표정이 크게 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곁에서 오래 있었던 딜런은 그 차이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지시하겠습니다. 어서 들어가서 쉬십시오.”
딜런이 깍듯한 인사를 남기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섰다. 능력이 능력인지라 공작저에는 기사단이 아주 크고 제대로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딜런은 공작의 저택 건물 너머 뒤편의 기사들의 숙소로 향했다.
카일러가 저택의 문을 열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았을 때 안에서 어지러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낮의 저택 여기저기서 바쁘게 일하고 있던 고용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일 앞에 선 파반이 그의 앞으로 나서 허리를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지금 바로 목욕물부터 준비할까요.”
평소였다면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3층으로 올라가 버렸을 카일러가 조용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고용인들이 하나둘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그들의 주인의 기색을 살폈다.
카일러는 묵묵히 선 채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긴 하지만…… 사람을 찾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찾으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주인의 기분은 기가 막히게 알아채는 집사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카일러의 푸른 눈이 슥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나름 익숙하게 그 눈빛을 받아들였지만 그 주변에서는 흠칫거리며 어깨를 떠는 이들이 있었다.
“부…… 사샤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오히려 집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것을 본 카일러의 한쪽 눈썹이 위로 솟았다.
“방에 있겠지.”
“그게…… 네, 방에 계십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가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각자의 방에 있다가 밤이면 사샤가 그의 방으로 건너오곤 했다.
“목욕물부터.”
“예, 공작님. 20분 만에 채우겠습니다.”
집사는 대답하고 나서 그가 지나갈 때까지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가 지나갈 때는 망토가 휘날리는 바람에 한기가 이는 것 같았다.
무장을 해제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그는 곧 목욕탕으로 향했다. 그가 저택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미 준비되고 있었을 넓은 욕조의 목욕물이 목욕탕을 잔뜩 흐릿하게 만들어 놓았다.
피로를 푸는 와중에도 카일러의 귀는 크고 작게 소음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반란의 무리뿐 아니라 문제는 최근 들끓고 있는 마물이었다. 제국에의 위협은 다양하니까 한 가지를 처리한다고 해도 그의 귀가 편안한 날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심지어 자연재해가 올 때의 소음이라면 난감했다. 약간 소음의 종류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어떤 식의 재해가 올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얼른 돌아오고 싶었다. 사흘에 한 번씩 단 세 번뿐이었는데, 이렇게나 필요로 하다고 느끼게 될지 생각도 못 했었다.
“저를…… 저를 제발 데려가 주세요, 공작님……!”
우연히 서북쪽 산맥의 마물 사냥에 필요한 물품 공급을 위해 들렀던 이베른 후작저에서 그녀를 처음 발견했다.
어두운 밤. 마물들이 가까이에 있어 고통스러운 소음에 한껏 날카로워져 있던 때였다. 잠에 들 수가 없어 밤 산책을 나왔다가 마주쳤다.
그녀는 다락방에서 생횔하던 중이었고, 이미 이 후작저의 영애라는 여자는 낮에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하녀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부스스해도 영애와 닮은 금발을 가지고 있는 데다 이목구비 또한 영애와 비슷해서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몰래 다락을 벗어나 어딘가로 향하려다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카일러에게 부딪혀 온 사샤. 휘청이는 그녀를 붙잡은 순간 귓가를 파고들 것만 같던 소음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팔을 붙들고 멍하니 호흡을 고르던 카일러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물론 1분 1초도 쉴 새 없이 소음에 시달리는 것은 아니었다. 위협이 없을 때엔 그의 귀도 편안하게 남들이 듣는 것만 들리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격한 소음에 시달리고 있던 때에 이 혼란함을 한순간에 사라지게 하는 것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한 상황도, 그렇게 만드는 사람도 없었다.
그것은 그의 부모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넌…… 무엇이냐.”
정체를 묻는 말에 그녀는 한껏 움츠러들었다. 도망가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으나 카일러가 붙든 손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손아귀에서 몸부림만 치는 꼴이었다.
보통의 영애였어도 어려웠겠지만…… 그녀는 삐쩍 마르고 부스스하고, 피부도 건조해 보였다. 오랫동안 관리하지 못한…… 관리는커녕 끼니조차 제대로 때우지 못한 모습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내려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흑.”
기어이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혼미한 정신에 마치 자기가 내려온 게 알려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이 벌벌 떨며 사과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귀가 아니라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만. 말하지 않겠다. 네가 지금 여기 있었던 것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녀를 진정시키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카일러는 그 말부터 꺼냈다. 보통의 영애였다면 그의 냉기 가득한 목소리에 무슨 말을 하든 벌벌 떨었을 텐데, 그가 말하자 그 영애의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건 안심했다는 뜻이다. 그를 믿고 제 몸을 맡겨 준 것이었다.
몸부림을 치느라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그녀는 자신의 이름과 후작저에서 버려진, 첫째 영애라는 것을 고했다.
처음엔 물론 이 여자를 의심했지만 다른 것보다 그녀의 외모가 아주 충분한 뒷받침을 해 주고 있었다.
카일러는 뜨거운 물속에 몸을 아주 푹 담근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날의 그녀와 지금을 생각하면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잘 먹고 관리받아 예뻐진 외모가 가장 제대로 전해지는 그녀의 변화였고, 그 외에도……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죄송합니다……. 혹시…… 이그노트 공작님이신가요?”
자신의 말에 안정을 찾은 그녀는 호흡이 진정이 되자 그렇게 물었다. 힘없이 늘어진 몸에 비해서 그녀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감정에 휩쓸려 흐려졌던 눈동자는 순식간에 귀족 영애의 그것이 되어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입술을 이로 꾹 깨물었다. 말라 터져 있던 입술이 기어이 피를 보았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저를 데리고 가 달라고, 이번에는 그녀가 그의 옷깃을 붙잡으며 매달렸다.
눈을 한시도 떼지 않고 올려다보는 그녀를 보다가 카일러는 문득 그녀를 두고 두 걸음 뒤로 물러나 보았다.
가까이에 닿을 듯 서 있을 땐 괜찮았던 것이, 그녀와 거리를 두자 바로 그를 덮쳐 왔다. 귀를 찢을 듯한 소음은 마물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얼추 비슷했다.
그녀는 멀어지는 그가 자기를 두고 가려 한다 생각했는지, 그 자리에 멈춘 채 망연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고개를 떨구는 바람에 쏟아져 내린 힘없고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마치 그녀 자신의 존재와 비슷해 보였다.
다시 두 걸음,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숙인 고개가 그의 가슴께에 닿자 정말 소음이 귀신같이 사라져 버렸다.
착각이 아니다. 이 여자가 이유였다. 카일러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 숙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떨림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다분히 충동적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때 카일러는 바로 그녀를 데려가겠다고 결심했다. 마침 황제가 결혼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이기도 했다.
평소에는 생각도 안 하고 있던 그 일이 해결 방법으로 떠오르자 그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너무도 딱딱 맞아 들어가는 이야기에 이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던 것이다.
촤아악—
카일러는 욕조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치 커다란 바위산을 타고 흐르는 폭포수처럼 물이 흘러내리는 그의 몸은 금방 뿌연 김에 가려졌으나 그는 성큼성큼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
마지막으로 보고 간 모습은 꽤나 의욕적이고 생기가 있어 보였다.
스스로 나서서 걸레를 들고 청소를 한다든가, 자신을 가두고 키우던 후작저의 사람들을 공작저에 초대하겠다든가…….
솔직히 후자는 너무 이상해서 수상하게까지 여겼지만 아무튼 그녀가 나서서 뭔가 하겠다는 것은, 데려가 달라고 말하던 때의 그녀와 너무 달라진 모습이었고, 긍정적으로 느껴졌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다녀갔을 후작저의 사람들이…… 이 공간에서 어떻게 하고 갔는지 말이다.
그들의 방문 일정을 전해 들었던 카일러는 당일에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될지 전혀 예측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알던 사샤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공작 없는 공작저에 와서 어떤 행실을 보이고, 사샤를 어떻게 다룰지…… 너무 빤했다.
“머리카락이라도 안 뜯겼으면 다행일 듯한데…….”
그걸 물어볼 수 있는 건 역시 본인이겠지. 커다란 몸에 얇은 잠옷을 입고 그 위에 가운을 걸치며 욕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