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달그락…… 달그락…….
식당에는 식기 움직이는 소리만 울렸다. 커다란 칠면조 구이에 스테이크, 각종 샐러드와 구운 채소들로 가득 채워진 식탁 앞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사샤는 식탁 한중간쯤에 시선을 두고는 두 사람의 행동을 살피며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가져가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아이고, 사샤. 여기 생활은 괜찮니? 잘 지냈어?’
대략 이런 대사 같은 걸 기대했다. 걱정해 주고 안부를 챙기는 말 같은 것들.
실제로 들어 본 적이 별로 없어서 상상조차도 다양하게 하지 못하는 말들.
그러나 그들이 등장하고부터 꺼낸 말이라고는 그래, 어, 딱 두 가지였다.
나름 로제를 보고 배워 우아하게 대처를 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점점 침잠해 호수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오시는 길은 힘들지 않으셨어요?”
그럼에도 힘내서 말을 꺼냈다. 대화를 이어 가야 뭐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사샤의 목소리가 들리자 놀란 듯이 멈춘 이베른 후작부인이 입술을 꾹 깨물더니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힘들지 않았다.”
힘들었을 리가. 오가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겠지만 공작저에서도 최고로 좋은 마차를 보내 모셔 오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째서 힘들진 않았는데 오고 싶지 않았다로…… 들리는 걸까.
“아버지도 함께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많이 아쉬워요.”
“언니가?”
이베른 후작은 오늘 오지 않았다. 후작부인의 말로는 일이 생겼다고 했는데, 그 이유조차 너무 빤해서 힘이 빠졌다. 그런데 사샤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서 엘리나가 끼어든 것이다.
“엘리나.”
그것을 후작부인은 부드럽게 이름 한 번 부르는 것으로 말린다. 그러나 씩씩댈 것만 같은 엘리나의 강렬한 눈길은 거둬지지 않았다.
소문이 어마어마하다며 시녀들끼리 떠들었던 엘리나 이베른은 정말 반짝반짝 아름답고 화려한 아이였다. 같은 금발인데도 더 윤기가 흘렀고, 피부는 매끈하고 이목구비도 훨씬 또렷했다.
화려한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화려한 아이. 사샤의 동생은 제국에 소문날 정도의 미인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언니를 향하는 저 눈길에는 적대적인 감정밖에 없었다.
“예, 어쩔 수 없죠. ……이제 디저트 드시겠어요?”
깨작거리기만 할 뿐 진수성찬 앞에서도 포크를 제대로 놀리지 못하는 두 사람을 보고 넌지시 디저트를 권했다. ‘그러자꾸나.’ 하고 도도하게 대답하는 이베른 후작부인을 바라보다 로제를 불렀다.
디저트가 곧 나왔지만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보는 눈도 있고 해서 적당한 분위기까지는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사샤는 지금 아이스크림을 떠 입에 넣고 꼭꼭 씹고 있었다. 묵직한 것이 가슴을 꾹 누르고 있어서 까딱 잘못했다가는 아이스크림을 삼키다 체할 것만 같았다.
먹는 둥 마는 둥 건드려 놓은 후작부인과 화난 기색까지 보이며 아이스크림을 끝까지 다 먹은 엘리나를 바라보다 한숨이 푹 나오려는 것을 참고 다시 손을 들어 로제를 불렀다.
“예, 사샤 님. 정원으로 모시겠습니다.”
“고마워, 로제. 정원으로 가서 차 한잔 하세요.”
바로바로 사샤가 하려는 말을 알아챈 로제가 앞장서고 사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명씩 바라보며 얘기하자 둘 모두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식당에서 정원으로 가는 길에 응접실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카일러는 그의 방을 봤을 때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 응접실은 대대로 내려오는 걸 유지했는지, 고급스러운 가구들과 더불어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천천히 걸어가는 길, 이베른 후작부인의 눈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처음 이 집에 들어올 때도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 로비를 한참 둘러보다가 사샤의 인사도 제때 못 들었는데, 응접실도, 복도를 장식한 물건들 하나하나를 날카롭게 살펴보며 걸어갔다.
정원에서도 별다를 것은 없었다.
후작부인은 티 웨어들을 하나하나 들어 살피고는 몇 번 차를 입에 대는 척했으며 어린 엘리나는 그 예쁜 얼굴에 담긴 적대감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차는 괜찮으세요? 아, 엘리나 벌써 잔이 비었네. 더 따라 줄게.”
“됐어.”
“더 마셔, 여기 케이크들도 맛있으니까 마음껏…….”
“아, 됐다니까!”
덜그럭!
“꺅!”
거의 비어 있는 엘리나의 찻잔을 보고 더 채워 주려 스스로 찻주전자를 들어 따라 주려던 사샤는 갑자기 밀치는 힘을 예측하지 못하고 찻주전자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비명은 엘리나가 질렀지만 바로 오른쪽에 앉은 엘리나의 잔으로 향하던 주전자는 밀쳐진 채 탁자에 부딪혀 기울며 사샤 쪽으로 쏟아졌다.
주둥이 부분에서 튄 찻물이 소매 쪽에 조금 튄 엘리나는 드레스를 버렸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뜨거워! 드레스에 튀어 버렸잖아! 이거 물들면 어떡해!”
뒤에서 이베른 후작가의 하녀가 달려와 그녀의 팔에 냅킨을 두드려 댄다. 얼마 묻어 나지도 않는 차와 옅은 얼룩을 보며 사샤는 조용히 일어났다.
“코니, 여기 정리 좀. 잠깐 실례할게요.”
겹겹이 입은 드레스 쪽은 문제가 없었지만 손등은 조금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겁먹은 얼굴로 달려와 넘어진 찻주전자를 정리하는 코니를 두고 사샤는 뒤돌아 정원을 벗어났다. 입술 안쪽을 꾹 깨무는 그녀의 턱 언저리가 얕게 떨리고 있었다.
로제의 도움을 받아 젖은 드레스를 갈아입고 다시 내려가는 길. 사샤는 여전히 미간이 굳은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사샤 님, 괜찮으세요?”
결국 로제가 뒤에서 조심스레 확인할 정도였다.
사샤는 마치 표정이 사라진 인형 같았다. 매뉴얼대로 움직이고는 있지만 폭탄을 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괜찮아.”
짧은 한마디로 대답하는 게 겨우인 듯한 사샤는 그럼에도 우아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다시 정원으로 나가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야! 너 진짜 뻔뻔하다?”
앙칼진 목소리가 사샤의 발을 붙들었다. 정원으로 나가는 복도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 엘리나가 다가왔다. 가지런하게 정리한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는 눈앞에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어떻게 우리를 여기다 초대할 수가 있어? 뭐, 복수라도 하려고?”
목소리만큼이나 독기를 담은 눈이 사샤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가만히 엘리나가 한 말을 곱씹는 사이, 그녀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또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내 자리 뺏어 간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사샤의 오른쪽 눈썹이 움찔했다. 엘리나의 자리, 이 자리가 원래 그녀의 것이었다고.
이번에도 대꾸가 없이 그저 살짝 내리깐 눈으로 보고만 있는 사샤에 엘리나가 이를 악물었다.
“이익, 지나가는 사람 백 명을 붙들고 물어봐. 이베른 후작의 영애는 나밖에 몰라!”
“……뭐?”
이베른 후작 영애 하면 엘리나를 먼저 생각한다고 하면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엘리나밖에 모른다고 말하지.
객관적인 눈으로 ‘사샤’의 외모를 볼 수 있었던지라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화려한 느낌은 없지만 사샤 또한 이베른의 핏줄이라 그런지 예쁜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엘리나가 예쁜 외모 때문에 알려져 있다면 사샤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사샤가 드디어 반응을 보이자 그게 더 엘리나를 부추긴 것 같았다. 기세등등하게 다시 바락바락 외쳐 댔다.
“당연한 거 아냐? 다락방에 처박혀 자라 온 우중충한 여자 뭐가 예쁘다고 알리니? 그런데 공작님이 너한테 청혼한 거라고? 당장 말해, 어떻게 공작님을 꼬셔서 결혼한 건지 말하라고!”
하녀들이 하는 말을 들었을 땐, 혹시 사샤가 본래 못된 여자라 동생의 자리를 뺏은 걸까 걱정했었다.
비록 내가 한 일이 아니더라도 그런 자리는 불편할 것이고, 제대로 알고 오해를 풀든 잘못을 보상하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엘리나의 말을 표면적으로만 들으면 그 걱정이 현실이라는 말이었지만, 사샤는 이미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며 지내온 사람이었다. 걱정했던 게 싹 날아가는 순간 명치를 꽉 막아 숨 막히게 했던 응어리가 탁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사샤가 어떤 생각이었을지, 진짜 사샤가 카일러를 꼬셨을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지만, 저 사람들을 끊어 낼 수 있는 기회였는지도 몰랐다.
잘못 생각했다.
내가 설레며 기대했던 가족이란 건, 이런 게 아니었다.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던 무언가가 핑, 소리를 내며 끊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머릿속에 무중력 상태가 찾아왔다.
“재밌네. 뺏기긴 뭘 뺏겨.”
미동도 없이 엘리나를 내려다보던 사샤의 입이 열리고 서늘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변화를 지켜보고 있던 엘리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이그노트 공작님이 뺏겠다 나선다고 뺏겨지는 사람이니? 그 사람에 대해 전혀 모르는구나.”
발악을 해 대던 엘리나는 서늘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사샤를 보곤 놀라 입이 얼어 버렸다.
어버버 하며 대답을 못 하고 입술을 움찔거리는 엘리나를 보며 얼굴 표정에 변화 하나도 없이 내려다보았다.
“뭐, 제국에서 알아주는 미인이라던데. 이미지 잘 지켜서 최고 미인, 그거 계속해야지. 언니 결혼 파탄 낸 악녀는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니.”
서늘하게 못 박은 사샤는 내리누르는 눈빛으로 파르르 떠는 엘리나를 지그시 눌러 주고는 그녀를 비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정원으로 나가 테이블에 도착할 때쯤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일부러 내며 뒤따라왔다. 그런 엘리나와 태연한 얼굴인 사샤를 보자 이베른 후작부인은 대번에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도도했던 두 눈이 한껏 경계하는 눈빛을 띠고 사샤를 노려봤다. 저쪽도 딱히 내 편은 아니었네. 하긴 다락방에 살게 한 건 동생이 아니라 부모 쪽이었겠지.
사샤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그 앞에 서서 두 사람 모두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귀찮은 걸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공작님께서 배려해 주신 마지막 만남이니, 다신 여기 모실 일 없을 겁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로제.”
“예, 마님.”
대답을 들을 여유 따위 주지 않았다. 축객령이나 다름없이 말을 하며 로제를 부르자, 단번에 옆으로 다가온 그녀가 우아한 몸짓으로 두 사람을 안내하겠다 했다.
“엄마, 가요!”
팽하니 돌아서 발로 땅을 구르듯 걸어가는 모양새가 가관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사샤의 앞까지 온 후작부인이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어미 알기를 우습게 아는구나. 네가 감히.”
“지금까지 딸을 우습게 보셨고요, 후작부인.”
대꾸하는 말도, 이렇게 서늘한 목소리도, 심지어 후작부인이라는 말로 미묘하게 ‘감히’라는 말을 되돌리는 사샤의 태도까지. 어렴풋이 그걸 피부로 느낀 후작부인이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안녕히 가시죠.”
사샤는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았다. 눈썹 끝, 입술 끝도 움직이지 않은 채 두 모녀를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