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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9화 (9/128)

9화

밤이 깊었다.

그리고 사샤는 잠옷을 입은 채 자신의 방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가 저택에 돌아올 때면 언제나 그와 함께 밤을 보냈었는데, 어제만이 예외였다. 잠자리를 사흘에 한 번씩 갖는 것도 계약이냐고 물었던 날 밤.

그렇게 확인하려 했던 걸, 돌리고 돌려서 자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것으로 이해한 것일까.

서로에게 닿지 않기 위해서 꼼지락꼼지락 조금씩 움직이는 거 외에 대체적으로 큰 움직임은 없었다.

“그럼 나는 진짜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의무를 다하고 싶은 걸까, 옳다구나 받아들이고 피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하고 싶은 걸까.

아무것도 정해지지도 않고 알아내지도 못한 상황에서도 밤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잠은 자야 하겠기에 잠옷까지 챙겨 입었으나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사샤는 힘을 주어 문손잡이를 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를 걸어 그의 방문 앞에 도착해서는 똑똑, 느리게 노크했다.

아무도 없는 긴 복도에 울린 노크 소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 전,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낮은 울림이 문 너머로까지 전해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푸르스름한 달빛만이 비추는 공작의 침실이 눈에 들어왔다. 서늘한 공기를 품은 듯한 공간, 카일러는 커다란 1인용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다.

“무슨 일인가.”

찾아온 것이 사샤라는 걸 아는 듯 그는 감은 눈을 뜨지도 않은 채 말했다. 사샤는 그런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침대로 사박사박 발을 옮겼다.

“안 주무시나요? 잠은 침대에서 주무셔야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내자 카일러가 감았던 눈꺼풀을 스륵 들어 올렸다. 파란 방에서 푸른 눈동자가 더 시리게 빛나는 듯했다.

방에 둔 조각 같은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는 사이, 카일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의 발길에 따라 사샤의 심장이 두근, 박자 맞춰 뛰어 댔다.

“그래. 내일 먼 길을 떠나니 일찍 자야겠어.”

그가 침대에 올라오는 몸짓만으로도 관계를 가졌던 날이 떠올라 온몸이 조여들듯 긴장되었다. 바로 덮쳐질 것만 같은 아찔함.

그러나 조용히 침대 위로 올라온 카일러는 그녀의 옆자리에 똑바로 누워 곧바로 눈을 감아 버렸다. 닿는 것이라고는 그의 단단한 팔에서 흘러나오는 열기 정도?

사샤가 아랫입술을 살짝 말아 물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다시 한번 그를 살피던 사샤도 옆에 누워 침대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일…… 나가세요?”

사샤의 목소리가 침대 천장에 닿기 전에 포물선을 그리며 그에게로 떨어졌다.

“그래.”

그의 목소리도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곧…… 돌아오시나요?”

무슨 대답을 바라고 묻는지는 사샤도 몰랐다. 그냥 언제 들어오는지를 알고 싶었거나, 아니면…… 없는 시간 동안의 자유를 누려 보자 뭐 그런 생각이었을까. 카일러는 어느 쪽이라 생각했는지 모르겠으나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올 이유가 없어졌으니.”

그런데 그의 대답은 사샤의 질문보다 더 아리송했다. 사흘에 한 번씩 공작저에 들렀던 것도 이유가 있어서였던 걸까? 왜 이유가 없어졌을까.

내일을 위해서인지 금세 잠이 든 듯 카일러의 일정한 숨소리를 느끼며 아직 혼돈에 빠진 사샤는 천장을 응시하며 눈을 깜빡깜빡 느리게 움직였다.

*

날이 밝았고, 공작은 눈을 떴을 때 이미 없었다. 정말 부지런한 사람이다, 하고 잠이 덜 깬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공작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바빠서 며칠씩 집을 비워 가며 일하는 것일까. 궁금한 것은 참 많은데, 왠지 직접 물어보기가 뭐해서 그의 앞에선 속으로 궁금해할 뿐이었다.

대신 오늘부터는 로제와 파반에게서 공작저의 일에 대해 배우기 시작할 것이다.

평범하게 아무 일도 없는 아침 일과가 지나가고 사샤는 바로 로제를 불렀다. 시간 끌 거 없이 바로 시작하고 싶었다.

“좋습니다, 사샤 님. 지금부터 이그노트 공작가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응. 좋아. 시작해 줘.”

사실 배우는 것에 부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정말 전무하다 싶을 정도로 이곳에 대해 모른다는 걸 들키는 게 가장 큰 걱정이었다.

그러나 어떤 귀띔이 있었던 것인지 뭔지, 로제는 이그노트 공작가가 제국에 어느 정도 권세를 가진 가문인지부터 시작해서 황실에 대한 정보까지 아주 기본적인 설명부터 시작했다.

그녀가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안살림이라는 것은 우선 공작저를 관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재산을 관리하는 것까지 모두 포함합니다만, 그것을 전부 다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재산…… 그렇구나.”

“이그노트 공작저는 그 유구한 세월만큼 오래된 자산들을 많이 가지고 있고, 관리 또한 복잡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공작님께서 직접 하시고 파반이 함께 돕는 것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엄청난 것을 맡아 버릴 뻔했다. 잘 배워 나중에 내가 다 제대로 관리를 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뭐 그 많은 재산을 다 내 것으로 하고 싶다는 것은 아니고……. 풍족하지 않은 삶을 살아오긴 했지만 그런 욕심과는 거리가 있었다.

아마 인정을 받고 싶어서겠지……?

간단한 설명이 끝나고 한동안 이그노트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어떻게 되는지, 어떤 수입으로 관리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을 한참 동안 하고 나서야 오늘의 공부가 모두 끝이 났다.

“하루 만에 모든 것을 하긴 어려울 듯하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궁금한 게 생기시면 언제든 바로 말씀해 주시고요.”

로제가 설명을 마무리할 땐 벌써 평소의 점심시간을 살짝 지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엔 설명을 하느라 목이 칼칼해진 로제와 익숙하지 않은 깃펜으로 열심히 받아 적은 종이가 남아 있었다.

자리 정리를 마치면 바로 일어날 것 같은 로제를 보다 사샤가 문득 입을 뗐다.

“아, 로제. 저…… 이베른의 가족들을 공작저로 초대하고 싶은데, 어떤 절차로 해야 하는지 알려 주겠어?”

사샤는 계획대로 가족들을 초대하기로 결심했다. 카일러의 탐탁지 않은 반응은 조금 걸렸지만 허락도 받았겠다, 그들을 만나는 게 최고의 정보를 얻는 방법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곳 사람들은 전혀 본 적 없는 내 기억 이전의 사샤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리고…… 이전엔 절대 가질 수 없었던 ‘가족’이니까.

“예, 사샤 님. 원하시는 대로 진행하시죠. 우선 초대장부터 보내시면 됩니다. 초대장은…….”

로제가 설명해 주는 것들을 꼼꼼하게 듣고 살피고 기억하면서, 사실 조금 설레는 심장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약 일주일 뒤가 좋을 것 같습니다. 후작가에서도 저희도 각자 준비할 것이 있을 테니까요.”

“그 정도는 필요한 거구나……. 좋아. 그럼 점심부터 먹고 바로 시작할게.”

그것으로 오늘분의 수업이 모두 끝이 났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바로 점심 식사를 위해 이동했던 탓에 밥을 먹으면서도 옆에는 아까 열심히 받아 적어 둔 종이가 놓여 있었다.

성격에 맞지 않게 그동안 놓고 있던, 혹은 참아 왔던 것들을 이제 조금씩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쉬는 것도 좋지만 역시 무능력하게 있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

이베른 후작가를 초대하는 것을 시작으로, 제대로 이그노트 공작부인이 되어 보겠단 다짐을 하면서 오늘 점심으로 나온 생선찜을 푹 떠서 한입에 먹었다.

*

처음 로제에게 들었을 땐 길게만 느껴졌던 일주일은 금방 흘러갔다.

난생처음 사람을 초대하는 일에, 낯선 일들투성이였다. 마치 남의 집에서 생색내며 중요한 사람들을 초대하는 듯해 신경 쓰이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긴장의 나날을 보내는 바람에, 정작 카일러가 일주일이나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

대망의 초대 날, 이제 사샤는 무서워질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모르는 날 알고 있는 사람들, 처음 만나 볼 내 ‘가족’.

“준비는 모두 끝나셨다고 들었어요. 저희도 굉장히 열심히 준비해서 기대돼요.”

총괄하느라 바쁜 로제 대신 사샤의 곁에서 조잘거리며 치장을 돕고 있는 것은 코니였다.

“공작저에 사람을 초대하는 일이 굉장히 드물거든요. 은근히 기대하는 분들도 많으세요.”

그녀는 처음 왔을 때 너무나 수줍은 얼굴로 잘 부탁한다 인사를 마친 뒤 바로 사샤의 헤어부터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조잘조잘 얘기하는 코니의 목소리 덕에 조금 괜찮아지기는 했지만 긴장을 잔뜩 해서 그런지 시간이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는 거 같았다. 벌써 약속된 시간.

그들이 도착하면 점심을 먹을 것이고 간단하게 티타임을 가진 뒤 원하면 공작저를 소개하는, 너무나 당연하고 간단한 순서를 머릿속으로 되뇌고 되뇌며 저택의 정문으로 나갔다.

저택 정문에 도착한 사샤의 옆에는 로제가 다가와 나란히 섰다. 긴장으로 떨리는 손을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서 있자 그것을 눈치챘는지 로제가 작게 말을 걸어 주었다.

“긴장 푸세요. 가족을 초대하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게 더 사샤를 긴장시킨다는 걸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그사이 쪼르르 달려온 누군가가 로제에게 귓속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직감했다. 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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