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응접실에 멍 때리듯 앉아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사샤의 머릿속은 복잡한 듯했다. 정보들이 열심히 굴러다니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조금씩 엉키고 있는 듯한 느낌.
가족이란 건 매번 그녀에게 형체 없는 그리움을 가져다주었다.
응접실에는 급히 들어온 터라 다시 방으로 돌아갈까 싶은 마음에 일어나 걸어 나가는데, 복도 끝에서 티 트레이를 끌고 오는 로제와 마주쳤다.
“아, 로제. 공작님께 가는 거라면, 내가 해도 될까?”
마찬가지로 그녀를 발견하고 고개 숙이던 로제가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랐는지 사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로제가 머뭇거렸다. 하긴, 뭔가 미덥지 못할 만도 하지. 사샤가 약간의 머쓱함을 담아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자 로제는 머뭇머뭇하면서도 트레이를 사샤의 손에 넘겨주었다.
그것을 끌고 몇 걸음 더 걸어 그가 있는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에게선 따로 대답이 없었지만 충분히 기다린 뒤에 집무실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지도를 펼쳐 놓고 무언가 정리를 하고 있다.
“저, 차를 가지고 왔어요.”
소파 쪽으로 트레이를 밀면서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 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들어온 이가 누군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아 소파 앞 테이블 위로 트레이에 얹혀 들어온 것들을 옮겼다.
그리고 곁눈질로 보고 배운 대로 차를 우렸다. 시간이 흘러도 지도 위에 집중하는 것 외에 미동 없는 그를 바라보다 소파에 앉아 제 몫의 차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아, 차향이 좋네. 우릴 때도 좋았던 향이 입 안으로 들어오니 더욱 은은하게 적셨다. 사샤는 캐모마일 같은 향이 자신의 머릿속을 안정화시켜 주길 바라면서 집중한 카일러를 건너다보았다.
일에 집중한 남자는 멋지다는 말이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지켜보니 5밀리미터도 움직이지 않는 얼굴로 지도에 집중한 얼굴은 좀 멋있어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매끈한 이마, 그 선을 잇듯 아래로 쭉 뻗은 콧날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아래에서 굳게 다물린 입술도 남자치고 색이 아주 고운데 고집스레 닫힌 모양이 섹시함을 은근하게 어필하는 듯했다.
‘물론 나를 의식하고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지도 위를 빠르게 훑는 거친 눈빛에 오히려 지켜보고 있던 사샤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저리 딱딱하게 구니.”
“초대장도 여럿 보냈는데 회신조차 없더래요.”
“결혼을 한다기에 나아졌나 했더니. 부인도 저택에 가둘 셈인가.”
자기를 보고는 이베른 후작을 칭찬했으면서, 돌아서는 이들이 카일러의 뒷담을 했다.
분명 아직 제게 목소리가 들릴 법한 위치였는데, 목소리를 낮춘다거나 하는 기색도 없이 옆 사람과 했던 말이 똑똑히 들렸다. 나를 얕본 것인가. 기분이 확 상했다.
더불어 무서워하는 것인지 싫어하는 것인지, 부정적인 것밖에 없는 카일러에 대한 말들에 사샤의 입술이 삐죽이 나왔다.
그렇게 잘생긴 얼굴이 일게 몰두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문득 카일러가 얼굴을 와락 찌푸리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음? 무슨 일이지? 선뜻 다가가지는 못하고 바라보고 있는데 그 상태에서 꼼짝도 안 하던 그가 몇 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얼굴을 풀었다.
“하, ……수상해.”
혼잣말도 나직이, 짧게 끝내는 카일러의 목소리마저 너무나 멋있어서 걱정되어 바라보던 시선이 살짝 넋을 놓았다.
“계속 거기서 기다리는 것인가.”
흡! 몰라서 그냥 둔 것이 아니라 알고 있었던 거구나.
깊은숨을 내쉬는 그의 소리가 들리자 사샤는 그의 몫의 차를 담아 소서를 받쳐 들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이거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차인 거 같은데, 드세요.”
차 이름은 잘 모르지만 직접 마셔 보니 약간 캐모마일과 비슷한 향이 나는 차였다. 어렸을 적 보육원 원장님의 취미가 다도여서 이거저거 들어 놓은 것들이 있었다.
그가 그것을 싸늘한 눈으로 힐끗 보기만 할 뿐 손을 뻗지 않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이거저거 표시된 지도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권한 차를 거부하는 태도에 사샤는 마음이 꽁깃하게 구겨지는 듯했다. 뭐야, 그거 안 마셔 줬다고 삐진 거니, 나…….
“흠…….”
책상 위에 잔을 내려놓은 뒤 애매하게 서서 그걸 지켜보던 사샤는 이상한 생각을 덮으려 카일러가 들여다보던 지도를 같이 들여다보았다.
상단에 제국의 이름이 쓰인 걸로 보아 이 데르마 제국의 지도인 모양이었다.
얼핏 광활해 보이는 지도 한가운데에 수도 플라나다의 이름이 보였고, 왼쪽 위 대각선 위치에 작게 ‘이베른’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후작의 영토가 저기 있구나. 사샤는 저기서 온 거였구나.
“제국의 지도도 처음 보는 건가.”
찬찬히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샤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카일러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여전히 찻잔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예, 처음 봐요.”
이그노트의 이름은 수도 바로 위에 있었다. 산이 많지만 면적만으로는 수도보다도 클 것 같았다.
이베른과의 거리가 조금 있어 보이는 것도 같다.
올 수 있겠지……?
“가족들을, 여기로 초대해도 될까요?”
깊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느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사샤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 뜨끔했다.
초대라는 걸 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대뜸 초대를 하겠다 하는지, 그래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을 가족이라고 초대하고 나면…… 무엇이 알고 싶은 걸까.
“……진심인가.”
그런데 돌아오는 카일러의 반응이 이상했다.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던 사샤가 그의 대답에 고개를 들었다.
“예……?”
“진심으로 이베른 후작 내외를, 이곳에 초대하겠다고.”
“……예. 문제가 있나요……?”
카일러는 찻잔을 내려놓을 땐 쳐다도 안 보던 눈을 들어 사샤를 돌아보았다.
강한 의문을 담고 있는 눈이었지만 정작 사샤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가족을 집에 초대하는 건 솔직히 어느 나라에 가도 마찬가지 아닐까. 계약 관계라 할지라도, 그편이 바깥의 눈을 피하기에도 좋고 말이다.
사샤는 괜히 주눅 들지 않으려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아까 밖에서 들어 보니, 제 결혼에 아버지께서 많은 부분 힘써 주신 것을 알게 되었어요.”
사실 잘 지내 두면 이그노트가에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 들어서도 있었다. 사샤는 가족을 보고, 사이도 돈독해지면 카일러에게 도움이 되리란 기대가 어느 정도 있었던 것이다.
“후작가니까, 돈독하게 지내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는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이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시죠?”
이 사람에게는 침묵이 어울렸지만 막상 대답을 기다리는 입장에서 매우 답답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겨우 눈치챈 것인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카일러의 눈빛이 지긋해서 꼴깍 침이 넘어갔다.
그래, 사심도 없이 저러고 바라보니까 제국의 영애들이 아주 폭 빠진 걸 거야.
의미도 없는 주제에 깊고 차가운 푸른 눈동자로 그윽하게 들여다보는 카일러의 시선을 버티고 있으려니 폭, 그의 입술에서 얕은 한숨이 흘렀다.
“……그대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내용은 긍정적이었으나, 냅다 좋아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분위기였다.
싫어하는 눈치라기보다는…… 뭔가 다른 느낌인데, 워낙 표정이 없다 보니 뭐라 단정 지을 수 없는 느낌이었다.
“싫으신 건 아닌 거죠?”
아무리 그래도 그의 집에서 그가 싫어하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아, 사샤는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그래. 그대가 원하는 건, 하면 된다.”
단단한 팔이 움직여 지도를 정리했다. 그러고는 책상 가에 쌓여 있던 종이를 끌어다 앞에 놓고 정독을 시작했다.
“고마워요.”
사샤는 허락을 해 준 그에게 한마디 남기고는 그대로 집무실을 나섰다. 가족을 만난다는 기대와 초대를 한다는 긴장과 그리고 반응이 신경 쓰이는 카일러까지, 복잡하고도 미묘한 것들이 얽혀 아까보다 더 복잡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달칵.
소리가 크게 나지 않도록 조심히 문을 닫고 나가는 사샤의 기척이 사라지고 나자 카일러는 종이에 고정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소파 앞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인 티 웨어들과 자신의 왼쪽 팔 앞에서 식어 가고 있는 차.
연한 연둣빛 수색에 눈길을 두고 있던 카일러는 더 이상 김을 올리지 못하는 찻잔을 들어 크게 한 모금 마셨다. 온기는 가셨지만 아직 남아 있는 향이 뻐근했던 근육을 풀어 주는 것 같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공작저에 그들을 초대하겠다니. 카일러로서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 저의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 원하는 거라니까 하라고는 했지만, 마음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이런 걸로 옹졸하게 굴 테냐. 스스로 자책을 했다. 상처받을 것을 미리 예측하지 말자. 결혼 전, 이베른 후작저에서 만났던 그녀였다면 아마 저 얘기를 꺼내지도 못 했을 테니까.
분명 많은 것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 눈빛부터가 달라졌으니까 바로 알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친 적 없던 후작저에서의 사샤는 정말 데려가 주기만 하면 제 역할은 모두 끝난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미래를 위해 자신에게 왔다기보다는 그저 지금을 피하기 위해서.
잠잠하던 귓가가 매우 소란스러워진 상태라 생각은 거기에서 끝났다. 평생을 괴롭혀 온 이 소리를 잠재우는 방법을 아주 최근 찾았지만…… 그것도 거부당한 상태라 미간만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다.
파반을 시켜 딜런을 불러오게 한 카일러는 오래 기다리지 않아 등장한 근육질의 덩치 큰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부르셨습니까, 공작님.”
“현재 남쪽에는 반란을 꾸밀 만한 이가 없다고 알고 있는데, 이번엔 남쪽에서 들린다.”
카일러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톡톡 두드리며 말하자 딜런은 얼굴을 와작 구겼다.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하는 미간 및 얼굴 근육이 풍부한 분노를 표현했다.
“아니, 이놈들이 정말! 서쪽 놈들이 어딜 갔나 했더니 거기에 가 있었던 겁니까!”
우르릉 하는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그런 소리에는 미간을 찌푸리지 않는 카일러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앉았다.
“남쪽을 확인하려면 좀 긴 시간이 걸리겠군. 지구력이 좋고 날랜 이들로 구성하도록.”
“옙! 공작님. 아, 그런데…….”
매 순간 감정 표현이 확실한 그가 살짝 머뭇거리며 카일러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사흘에 한 번씩 돌아올 예정이십니까?”
아니, 그게, 남쪽으로 가면서 그 일정은 좀……! 하면서 딜런은 거의 울상이 되어 말했다.
지난번 서쪽으로 가면서도 사흘에 한 번씩 공작저로 돌아가겠다 우기는 카일러 덕분에 살이 쭉 내린 건 비밀이었다.
“돌아오지 않는다. 잠잠해질 때까지.”
왠지 비장함이 들리는 거 같아 딜런은 첨언하지 않고 물러났다.
“귀도, 가슴도. 잠잠해질 때까지.”
벌써 두 명이 다녀간 집무실 문을 바라보다 카일러는 다시 책상 위 종이로 시선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