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나는 기약 없이 일이 생겨 나가야 할 일이 자주 생길 것이다. 저택 안에서는 하고 싶은 일을 무엇이든 다 해도 좋다.”
방금 자고 일어난 사람임에도 움직임이 너무나 유려했다. 몸을 쓰는 사람인 것 같은데 찌뿌둥해 보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잠깐 넋을 놓고 바라보던 사샤도 벌떡 일어났다. 살짝씩 어깨를 젖혀 스트레칭을 하면서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있어야 하나, 나가야 하나…… 그가 나가라고 할 때까지 있어야 하나.
소리가 날 듯이 도르륵 도륵, 눈동자와 뇌를 굴려 가며 상황을 살피는 사이 카일러는 옷을 갈아입고 자신의 방을 훌쩍 나가 버렸다.
“뭐야……”
지금 아무 말도 없이 휑하니 나가 버린 거야?
멍하니 앉아 닫힌 문을 바라보며 한동안 움직이지를 못했다. 고민이 무색하게 나가 버린 그를 떠올리다 사샤도 주섬주섬 일어났다.
공작이 공작저에 남아 있는 하루가 이제 막 시작되었다.
*
카일러는 많은 곳을 돌아다니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뒤에 그는 1층의 집무실로 들어가 족히 한 2시간 정도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처음 한 1시간 동안은 자신의 방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지만 왠지 자꾸 저쪽이 신경 쓰였다. 카일러 이그노트라는 남자가 궁금한 것인지, 카일러와 사샤의 계약 내용이 궁금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산책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사샤는 뒷문을 통해 나왔다가 분수대 앞에서 티타임을 갖는 대신 조금 걷고 싶어서 저택 정문 방향으로 크게 빙 돌았다.
곧 커다란 저택 정문이 눈에 들어왔는데 마차가 여럿 서 있어 어수선해 보였다.
게다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불편한데…….’
아는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여기 사람들과 마주쳤다가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뜨끔했지만, 돌아서는 것보다 그녀를 발견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빨랐다.
분명 이쪽을 보았는데, 시선은 고정한 채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만 할 뿐 선뜻 인사를 건네는 이가 없었다.
돌아서 가 버리기도, 정문으로 향하기도 애매한 이 시점에, 문득 한 여인이 용기를 낸 듯 인사를 건넸다.
“이그노트 공작부인, 이렇게 뵙게 되다니 기쁩니다. 레논의 밀리야라고 합니다.”
톤이 높고 싱그러운 목소리의 여인이었다. 결혼 안 한 귀족의 딸을 영애라고 부른댔나. 어차피 이름은 몰라 부르지 못할 것이니 슬금슬금 걸어가 그녀의 앞에서 똑같이 머리를 숙여 주었다.
“뵙게 되어 기쁩니다.”
그런데 사샤가 인사를 받아 주자 문득 다른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쏟아졌다. 뭐, 뭐야. 왜 다들 날 보면서 눈을 번뜩이는 건데!
호기심인지, 호의인지, 아니면 불쾌함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눈빛들이 모두 사샤를 주목했다.
“더미나의 릴리입니다.”
“세오비스의 아론입니다!”
사샤가 깍듯하고 고요히 인사를 건네자 좀 거리가 있던 곳에서 눈길만 보내던 사람들까지 우르르 몰려왔다.
그러더니 너 나 할 것 없이 한마디씩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오디오가 잔뜩 겹쳐 무슨 말을 하는지 듣느라 온 신경을 귀에 집중해야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분인 줄 몰랐습니다!”
“오랫동안 아프셨다고 얘기만 들었지, 이런 미인이신 줄을 몰랐네요.”
“그러니까요. 갑자기 사샤 영애…… 아니, 공작부인께서 나타나서 다들 수군수군했지요!”
목소리 큰 사람이 화두를 던지자 슬슬 대화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아깐 좀 주눅이 든 채 서성이고 있던 것 같은 사람들이 사샤에게 덤벼들 듯 저마다 말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럼, 그 점잖은 이베른 후작이 첫째 영애를 알리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던 거지.”
“그래도요~ 엘리나 영애 초대로 후작저에 몇 번 갔었는데, 공작부인을 진작 못 뵀다 생각하니 너무 아쉽잖아요!”
“정말 너무 아름다우시네요! 결혼식이라 아름다우신가 했는데, 어머. 그냥 예쁘셔요.”
이베른 후작, 사샤의 가족에 대한 정보가 나오기에 귀가 쫑긋하는 사이, 호들갑을 떠는 여인들의 말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사샤에게 예쁘다 하는 것이니 그냥 덤덤하게 눈길만 주면서 엉뚱하게 흘러가는 대화 흐름을 아쉬워했다.
그나저나 대체 이 젊은 여인들이 공작저에는 오는 걸까. 대체적으로 남자 귀족들이 많이 보였지만 그들은 볼일이 있다 치자, 그런데 여인들은 대체 왜……?
너무도 적절하게, 그의 집무실에서 보았던 화려한 편지 봉투들이 떠오른 것은 비약인가. 갑자기 사샤의 눈길이 싸늘해졌다. 이러나저러나 아무리 계약인들 임자가 있는 남자한테 들이댄다는 게, 그게 내 남편이라는 게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어찌 저택 앞에 이리 모여 계신가요?”
남의 남편 보러 왔으면서 부인인 나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 떠는 그런 건 아니겠지.
간단하게 질문을 하겠다 던진 말이었지만 불편한 기색이 드러난 듯 모두 움찔했다. 오호라, 역시 찔리는 게…… 근데 왜 남자분들도 놀라는 거지……?
정보의 부족으로 인한 추측은 엄한 방향으로 빠지게 마련이다.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을 접고 저들을 살피는 사이 그녀의 뒤로 굳건하게 닫혀 있던 저택의 정문이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등지고 있던 사샤의 눈에 순간 기대감을 담아 반짝이던 눈들이 나오는 이를 확인했는지 추욱 가라앉는 게 보였다.
“사샤 님, 산책 중이셨습니까.”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집사 파반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사샤에게부터 인사를 건넨 그는 뒤에 모여 있는 이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 그래. 이제 들어가려고. 파반은 어쩐 일로……?”
차라리 존댓말로 귀족들에게 말하는 게 편한 것 같다, 아직도. 파반은 그제야 슬쩍 눈동자를 굴려 사샤 뒤편에 서 있는 귀족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바깥에 초대도 하지 않은 손님들이 계시다 하여 나왔습니다.”
조곤조곤 차분한 목소리로 촌철을 날리는 파반을 보자 ‘하하’ 하는 어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사샤야 눈치를 안 봐도 되는 사람들이겠지만, 공작의 집사인데…… 대단하구나.
뒤의 공기의 흐름을 읽고 있는 사이 파반이 사샤를 살짝 비켜서선 뒤에 모여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그노트 공작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흠, 약속 없이 찾아오는 것은 어느 제국의 예의인가. 내게 볼일이 있다면 약속을 잡아라.”
그러자 여기저기서 더 웅성웅성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서신에 대한 답이 없어서 왔네!”
“더미나가에서 보냈던 초대장에도 답장이 없었다고!”
다들 무엇을 바라고 이렇게 모여든 것일까. 답이 오길 기다리지도 못한 채, 그가 저택에 있다는 소식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파반은 곧게 선 자세로 그들의 항변을 듣다가 다시 차분히 입을 열었다.
“초대장을 받은 것은 약속을 잡은 것이 아니다. 제국의 존망과 관련된 일 외에, 이리 약속도 없이 찾아올 만큼 시급한 일이 있다면 남고, 아니라면 다음 출정 때 가문 모두를 끌고 나갈 것이다. 라고 답하셨습니다.”
친절한 듯 무서운 대답에 귀족들뿐 아니라 사샤도 살짝 멈칫했다. 출정이면 전쟁하러 가는 거 아니야? 그가 벌하겠다 답한 것이 정확하게 뭔지 사샤는 몰랐지만 사색이 된 귀족들의 얼굴에서 정도는 짐작이 가능했다.
제게 시선을 주는 여인들의 눈길이 간절해 보였지만 스윽 몸을 돌려 외면했다. 제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공작님이 저렇게 단호하신데.
“사샤 님, 저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 배웅을 하겠습니다.”
“……그래, 수고가 많아.”
파반이 집사임에도 불구하고 딱 잘라 내는 말에 귀족들이 모두 미련 가득한 얼굴로 쫓겨나듯 돌아섰다.
아니 쫓겨난 게 맞지.
그가 매몰찬 것도 같지만 애초에 왜 저렇게까지 카일러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참 알 수 없는 세계관이다. OT 때 봤던 소설처럼, 로맨스 판타지 책 속으로 들어온 거였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결혼하신 뒤로는 종종 이렇게 오십니다. 받아 주실 거라 생각한 모양이지요. 그전엔 무섭다고 얼씬도 안 하던 분들인데 말입니다.”
각자의 마차를 타고 떠나는 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파반이 대수롭지 않게 술술 얘기해 주었다. 결혼한다고 뭐가 달라지길 기대했던 것일까.
“저택 정문은 딱히 막아 놓지 않습니다. 저택에 계시기만 하면 누구도 이그노트가를 위협할 수 없으니까요.”
무엇을 말하는지 잘 이해는 안 됐지만 아무튼 어떻게 공작저 바로 앞까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풀렸다.
파반이 다시 열어 준 문틈으로 들어가 저택으로 발을 들였다.
공손한 몸놀림으로 저택 어딘가로 사라지는 파반의 뒤를 바라보다 사샤도 걸음을 옮기기 위해 돌아서려다 덜컹하듯 걸음을 멈추었다.
우선 천천히 발을 옮겨 응접실로 들어가 소파에 주저앉아 버렸다.
불편할 거라 생각했던 이들과의 대화로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개중에는 내심 많이 궁금했던 사샤의 가족에 대한 내용도 있었지만 썩 그렇게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점잖은 이베른 후작과 그의 아픈 첫째 딸이라…….”
다들 보지 못했던 것뿐 아니라 아예 존재 자체를 모르고 지낸 듯했던 뉘앙스를 바로 알아들었다. 얼마나, 어떻게 아팠길래 딸이 있는 것마저 알리지 않고 살았던 걸까.
사샤의 몸은 체력이 좀 약하다 싶은 정도였다. 사지 멀쩡하다 못해 외모도 몸매도 꽤 아름다웠으며 움직임에 문제가 없고 열흘 좀 넘는 시간 동안에 내적으로도 전혀 통증은 없었다.
내 영혼이 들어오면서 병은 다 나은 걸까.
아니면 아픈 곳은 원래…… 없었던 걸까.
“가족…… 가족이라.”
그런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 이름이었다.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그것.
되뇌는 순간 그 이름이 사샤의 가슴에 찡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