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저녁 식사를 위한 식탁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열이틀 만에 처음으로 함께하는 식사.
‘으…… 그런데 왜 침대보다 더 떨리는 것 같지.’
그가 멋있어서? 그건 아니다. 마주 보고 앉아 우아하게 포크를 놀리고 있는 모습도 물론 멋있었지만 그만큼이나 침대에서의 모습도 엄청 멋……지…….
“사샤 님, 생선을 좀 더 드릴까요?”
미니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음식 서빙 외엔 말도 붙이지 않던 미니가 제가 잘 먹는 음식까지 눈여겨보다 가져다준다니.
카일러와 같이 있으니 공작부인 대접을 해 주는 척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러기엔 딱히 그의 눈치를 보는 것 같지는 않고.
카일러와 함께 방에 들어갔다 나온 그 짧은 순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어리둥절한 사샤를 뒤로하고 미니가 바쁘게 움직였다. 평소 조용하던 식사 시간에 카일러 하나 더해졌을 뿐인데 이상하게 소란스럽다.
주변의 고용인들도, 사샤의 마음도.
“…….”
그에 비해 카일러는 매우 조용했다. 존재감이 워낙 어마어마한 사람이라 있는 듯 없는 듯이라는 말을 갖다 붙일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먹는 것은 중요하니까 꼼꼼히 씹어서 하나하나 먹으면서도 가만히 그가 움직이는 걸 바라보았다. 두근거리지 않더라도 눈길이 자연스럽게 가는 남자였다.
무서운 사람일까, 무뚝뚝한 사람일까. 착한 사람일까 아니면 책에 나오던 악한 사람일까. 정말…… 너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짧은 시간 알 수 있는 것은 예복 입은 몸이 진짜로, 얼굴과 비슷할 만큼 멋들어진다는 것.
사샤는 얼른 고개를 떨구고 음식에 집중하는 척해 버렸다.
식사를 마치는 타이밍에 맞춰 개인적인 일로 출타했던 로제가 공작저로 복귀했다.
카일러는 로제의 복귀 보고를 받자마자 그녀를 따로 불렀다.
뭐 항상 저렇게 출타 후엔 따로 부르는 거겠지, 하고 사샤는 사샤대로 잠들기 전 할 일들을 했다. 목욕을 하고 머리를 말리고 빗으며 책을 읽었다.
최근에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곳의 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에 뭐가 중요한 건지 가릴 정보는 없어도 우선 잡히는 대로 시작했다.
「제국을 위한 전설」
“뭔가…… 원초적이란 말이지.”
그런 이유로 눈에 띄는 책이었다.
이 제국은 데르마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로 이 책에는 제국 신화와 함께 여러 가지 제국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쓰여 있었다.
실질적으로 사는 데에 도움은 안 되겠지만 왠지 재미있는 거 같아서 이틀째 읽고 있었다. 제국 신화 다음 장에는 무슨 청력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제국의 위험을…… 귀로 듣는다…….”
카일러 공작이 직접 공작부인 자리를 지키라는 명령도 내려 주었으니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는 의욕도 생겼다.
이 신기한 세계에 대해 배우다 보면 그것도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단지 살기 위해서만 사는 것과는 다르다는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소리가 책에 빠져 있던 사샤의 정신을 깨웠다. 시간이 꽤 흘렀는지 창밖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책 사이에 깃털 펜을 넣은 채 덮고는 천천히 있던 자리에서 움직여 방을 나섰다.
“제가 없는 동안 별일은 없으셨습니까.”
카일러의 방으로 향하는 그 짧은 동선에 로제가 말을 걸었다. 잠깐 걸음을 멈췄다가 돌아보자 그녀가 바라보고 있었다.
공작님이 아까 불렀을 때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던 건가.
“네, 별일 없었어요.”
일은 내가 만들었으니까.
“그렇군요.”
묘하게 입술 끝이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 건 착각인가. 로제는 공작의 방문 앞에 서서 단정히 사샤를 보았다.
네 번째 카일러 공작의 방으로 들어가는 걸음에, 로제는 의미 모를 미소를 남기고 돌아 내려갔다.
카일러 공작의 방 커다란 문 앞에 서면 여지없이 긴장이 된다. 이곳으로 들어가는 네 번째 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똑똑, 문을 두드린다.
“들어와.”
안에서 그의 목소리가 대답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문고리를 잡아 문을 열었다.
불도 낮춘 방 안에서 그가 커다란 검을 닦고 있었다. 낮고 붉은 빛이 비추는 그의 실루엣이 마치 한 마리의 맹수 같았다. 몸을 보고 충분히 유추가 가능했지만 역시 기사…… 같은 것인 모양이다.
싸움도 어마어마하게 잘하겠지? 생각하며 천천히 침대 쪽으로 걸어 그 끄트머리에 가 앉았다.
조금 있으면, 저 검을 다 정리하면 이리로 올 것이다. 느리고 큰 걸음으로 걸어와 나를 눕히고 그 위로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다. 그럼 커다란 손으로 떨고 있는 몸을 어루만져 뜨겁게 만들고, 뜨거운 입술로 내 몸을 떨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스릉—
검이 검집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흠칫 떨린 뒤론 얼굴이 화악 뜨거워져 버렸다.
그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카펫 위로 사박사박 소리가 이어지자 심장 박동이 그 두 배로 뛰기 시작했다.
“저……!”
급하게 목소리부터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래, 우선 확인해야 하는 일이 있는 거니까……!
카일러는 사샤가 낸 목소리에 바로 발을 멈추었다. 그녀의 발끝에 멈춰 선 그를 올려다보자 빛을 등진 그가 사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공작님과의 계약에…… 잠자리가 포함되어 있나요? 사흘에…… 한 번씩……?”
번뜩,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계속 벌벌 떨지 말고, 궁금해 잠을 뒤척이지도 말고 차라리 물어볼 건 물어보는 게 낫겠다 생각하고 두 눈 딱 감고 물었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몸도…… 입도.
힘들게 물어보았더니 왜 대답이 없는 거야.
공작저의 고용인들이 말하던 대로 무섭고 무뚝뚝하고…… 그런 사람인 건가. 내가 분위기 파악을 못 한 건가…… 내일이면 조용히 공작저 지하실로 끌려가 죽는 건…… 아니겠지!
“그래, 알았다.”
응?
그는 엉뚱한 대답을 하더니 단단한 팔로 사샤를 끌어안고 침대 위로 누웠다. 단단한 힘에 이끌려 얼결에 그의 품에 안긴 채 쓰러져 버리고 만 것이다.
“싫어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대의 거절은 받아들여야 하니까.”
가슴속까지 뒤흔드는 것 같은 낮은 목소리가 읊조렸다. 품 안의 작은 여체를 쓰다듬어 도닥이는 손이 투박한데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것도…….”
계약인가요?
그 온기에 파묻혀 조심히 입을 뗐던 사샤의 목소리도 끝내 마무리되지 못했다. 낮고 느린 숨소리가 울리고 그가 내뿜는 뜨거운 숨결이 머리카락을 타고 흘렀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이 접촉에 익숙해지느라 애쓰는 사이에…… 설마하니 잠들었니?
혹시나 싶은 마음에 몸을 살짝 뒤척여 보았으나 단단한 팔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의 눈이나 입도 열리지 않았다. 오로지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울릴 뿐이었다.
날 잡고 이렇게…… 잠이 오니? 대답을 하라고, 답답아!
속으로는 그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정작 품에 안긴 몸은 전혀 떨리지도 요동치지도 않았다.
넓고 고요한 공작의 침실은 빠르게 어둠에 침식돼 들어갔다. 그가 품고 있는 어둠 속에서 머리 위로 떨어지는 느린 호흡이 점점 커져 갔다.
느리고, 고요를 깨지 않으면서도…… 뜨거운.
살짝 비껴 있던 손을 꼼지락거려 그의 가슴 위로 얹어 보았다. 탄탄한 가슴 아래로 잔잔한 울림이 느껴졌다.
“잘 자네…….”
누군 체온에, 숨소리에…… 잠도 확 달아난 것 같은데.
근데…… 뭐야, 왜 서운하고 그래. 흥.
무섭고 잔인하고 성격 더럽고 그런 사람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아직 그의 이름 말고는 정말 아는 것이 없었다. 처음 만나자마자 몸부터 나눠서인지…… 그와는 얼굴 마주 대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불편했다.
심지어 눈만 뜨면 출타하기 바쁘고, 돌아오면 바로 침대에서 함께였으니 밝은 곳에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다는 건 해 보지도 못했다.
물어보면 대답을 해 줄까. 아니, 나는 내가 사샤가 아니라는 걸 알리지 말아야 한다.
“답답하구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당신뿐인 거 같은데 말이야.
사샤는 계속 잠들지 못하고 그가 주는 온기에 묻혀 있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까무룩 잠이 들었다. 살면서 한 번도 잠들기 전 그녀에게 온기를 나눠 주는 이가 없었던 만큼, 밤마다 그가 주는 체온은 흥분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좋은 잠으로 인도하는 듯도 했다.
*
햇살이 침대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사샤의 이마를 간지럽혔다. 깨우는 이도, 귀를 괴롭히는 목소리도 없이 잠들어 있던 사샤는 몸을 얕게 뒤척이려다 딱 멈췄다.
분명 여기 침대는 두세 명은 잘 수 있을 만큼 넓었는데, 몸이 움직여지질 않는다. 왜 이러지이……. 침대가 벽에 붙어 있지 않으니 벽도 아닐 테고.
“으음…… 응?”
문득 몽롱하던 정신이 깨어났다. 잠들기 전에는 둘이었다가도 평생 눈을 뜰 때 혼자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는데……. 지금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건 벽이 아니었다. 이렇게 단단하게 감싸고 온기를 뿜고 있는 것은……!
‘뭐, 뭐야 오늘은 왜 여기 있는 건데?’
밤중의 일로 지쳐 잠들었다가 깨어나면 온기가 남지 않는 침대만이 있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지치지 않았던 내가 일찍 깬 건가, 어젯밤 잠들기 전 사샤를 안고 있던 포즈 그대로 카일러가 옆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흐익!”
모공도 없이 매끈한 피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리와 밝기에서 보이는 얼굴에 숨이 넘어갈 듯했다.
급히 들이마신 숨에 사레가 들려 기침이 켁켁 나려 했지만 그마저도 서둘러 입을 막고 아프게 참아 냈다.
“깼는가.”
입 안에서 켁켁대던 사샤는 그마저도 멈추었다.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널리 퍼지지 않고 마치 그녀에게로 스며들 듯.
너무 자연스러운 울림과 은근히 다정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잠시 동안 숨을 삼켰다.
“아, 저…… 오늘은 일찍 안 나가세요?”
무슨 말을 할지, 뭘 해야 할지 고민을 하다 사샤는 겨우 말문을 열었다. 그의 숨이 스미듯 퍼진 것처럼 자신의 목소리도 울려서 잠깐 흠칫했다.
“나가지 않는다. 들리는 게 없어서.”
“……네?”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그의 근육이 꿈틀댔다. 그 움직임에 흠칫하는 사샤를 품에서 내려놓고 몸을 일으키는 그는 정말 맹수 같았다. 하지만 사샤의 머릿속에 있는 그 어떤 짐승도 이런…… 느낌을 풍기지 못했다.
이, 이런 게…… 섹시하다는 거겠지?
마른침이 꿀꺽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카리엘은 잠시 그렇게 앉아 사샤를 지그시 내려다보더니 그대로 일어나 침대를 벗어났다. 그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것조차 어색해서 사샤의 두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