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저, 저기 사샤 님.”
“사샤 님, 그만하세요. 그건 저희가…….”
복도에는 새라와 미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응접실 문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1층에서 집무실 다음으로 큰 응접실 안에는 앞치마까지 두르고 손에는 차곡차곡 접은 걸레를 든 사샤가 종횡무진 움직이고 있었다.
계급이고 뭐고 제겐 아랫사람을 단번에 휘어잡을 카리스마 따위 없었다. 잘하는 것은 일이니까. 게다가 저번 소문부터 잠재우려면 하녀들과 친해지는 게 이득이다 싶었던 것이다.
저 반응을 보니까 지난번 뒷담화에 대한 벌도 좀 되는 것 같고……. 아, 그럼 2층의 도서관부터 시작할 걸 그랬나.
“여긴 청소 자주 못 하는 곳인 모양인데, 너희가 일 떠넘긴 게 아니라 내 손을 빌려주는 것뿐이야.”
내 의도와 달리 죄짓는 것처럼 덜덜 떨고 있는 걸 보기 뭐해서 달래려고 한마디 던져 주고는 계속해서 소파 사이의 테이블 상판을 닦았다.
사흘에 한 번 들락거리긴 하지만 저택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 응접실은 생각보다 먼지가 있었다. 잘 사용하지 않는 곳이라 청소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돌아다니며 본 이그노트 공작저는 매우 커다란 규모와 화려함에 비해 많이 허전했다. 관리하는 인원도 왠지 적어 보였고, 심지어 식구도 없고.
분명 유구한 역사의 이그노트라 했는데.
“가족은…… 아무도 없는 걸까.”
문득 읊조린 사샤는 다 닦은 테이블 위로 의미 없이 휘적휘적 걸레를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결혼식 날 연회장 안에 들어갔다 나온 것 외에 그녀가 한 일은 없었다. 누군가를 소개시킨 기억도 심지어 그 연회장을 채운 사람들 외에는 낯선 이와 인사한 것도 없었고, 결혼식 자체도 매우 간략했다.
“여긴 원래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제 소파를 마른 걸레로 닦기 시작했다.
혹여 사샤가 청소해 놓은 곳 중 어디 더럽힐까 싶었는지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새라와 미니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더니 부리나케 뛰어 들어왔다.
“사, 사샤 님! 걸레 이리 주세요!”
“여기 저희가 할게요. 방으로 돌아가시면……!”
일 좀 도와주려고 하는 거라니까 뭐 이렇게 기겁들을 하지? 뭐 물론 귀부인들은 이런 일 절대 하지 않겠지만 좀 과하지 않니……?
로제가 그렇게 무서운가. 난 그렇게 씹었으면서…….
어리둥절한 상황에서도 걸레를 놓지 않은 채 사샤는 쭉쭉 팔을 뻗어 소파를 닦았다.
“너무 가만히 있는 거 싫어서 그래. 로제가 돌아오면 혼날까 봐 그런 거야?”
“아니, 그래도 마님께서 하실 일은 아니고, 그러니까…….”
“로제는 모르게 할게. 아…… 내가 있는 게 불편해?”
“그래. 불편해 보이는군.”
흡! 사샤는 비명 대신 숨을 훅 들이마셨다.
너희들이 황급히 뛰어 들어와 호들갑스럽게 굴었던 이유가 이것이로구나…….
“카, 카일러 공작님.”
익숙하다 싶은 낮은 목소리는…… 바로 카일러였기 때문에.
세 사람은 벌떡 일어나 나란히 서 풀썩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두 하녀와 나란히 서서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엔 아무것도 없어서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카일러의 푸른 눈동자가 또르륵,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느리게 움직였다.
그걸 지켜보는 세 여자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입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렸다.
“사샤, 무슨 일인가.”
그가 꺼낸 말에 옆에 있던 하녀들이 흠칫 놀랐다.
응? 뭐지. 뭐에 저렇게 놀라는 거지. 그렇게 무서운 목소리가 나온 것도 아니고, 살기를 내뿜은 것도 아닌데.
갸웃하면서도 정작 본인도 긴장감 가득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청소를 하고 있었어요. 저택에서 너무 할 일 없이 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자칫하다간 저 하녀들이 걱정하던 대로 불똥이 제대로 튈 것 같아서. 그러게 왜 이렇게 난데없이 등장하는 거람! 아직 해가 쨍쨍한 낮인데!
사샤는 속으로 엇나간 계획에 혀를 차고 있는데, 정작 사샤의 대답을 이해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미동도 대답도 없는 그를 보며 사샤는 그 모르게 속으로 쯧, 한 번 더 혀를 찼다.
그래서 꾸준히 해야 하녀들이랑 좀 가까워졌을 텐데…….
하지만 카일러는 그녀를 다그치거나 이해가 안 된다며 몰아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에 잠긴 듯했다.
살짝 아쉬운 마음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청소도 깨끗하게 해 놓고, 하녀들과 친해지고…… 그래서 뭔가 보여 줄 만한 게 있었다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괜스러운 마음에 입술을 말아 물고 그를 살짝 올려다보자 그는 아직도 정리가 안 됐는지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입을 떼려는데, 카일러가 더 빨랐다.
“나머지는 올라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는 평소보다 바짝 굳어 그를 힐끔거리지도 못 하는 두 하녀를 한 명씩 지그시 바라봐 준 후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공작님, 뭐라 하시지 않을 거야. 걱정 마.”
아무래도 혼날 거란 걱정에 떨고 있는 듯해 살짝 말을 건네주고는 카일러의 뒤를 따라 응접실을 나섰다.
안심시키려고 했는데 잘 안 됐는지 뒤에선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 잘못한 건가.
카일러는 성큼성큼 이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구두에 치렁치렁한 드레스는 이제야 좀 익숙해진 참이라 빠르게 걷는 것은 어려웠다.
“아, 앗!”
3층 게단 끝에 오른 그를 보고 빠르게 층계참을 지나 계단을 딛다가 그만 드레스자락 끝을 밟아 버리고 말았다.
단말마와 함께 미끄러져 쿵, 미끄러져 버리고 말았다. 계단을 많이 오른 상태에서 넘어진 게 아니라 천만다행이었다.
다행히 무릎을 계단 면에 찍은 게 전부라 탈탈 털고 일어났다. 멍은 좀 들겠지만 이 정도는 뭐 금방 괜찮아질 거다.
치마를 털고 고개를 드니 3층 계단 끝에서 카일러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빨리 안 오냐고 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이번에는 치마 앞자락을 잡아 든 채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잠깐 내렸다가 다시 몸을 돌려 움직였다.
길 잃을 염려는 없겠지만 좀 천천히 걸어 주지. 소리 낼 생각 없는 투정만 잠깐 부리곤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카일러가 들어가 기다리고 있는 곳은 자신의 방이었다.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그의 커다란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샤는 그 옆의 긴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아까 부딪친 무릎이 욱신거렸다.
“청소를, 했나.”
누구든 깔아볼 것 같은 얼굴로, 그는 참 예의 바르게 말했다.
“예, 뭐…… 집에서 계속 혼자 할 일이 없어서요.”
왠지 그의 얼굴이 살벌하게 보였다. 화가 난 것처럼. 영애들은 보통 안 하는 짓일지 몰라도 그게 큰 잘못은 아닐 텐데……. 뭐 공작부인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뭐 그런 건가.
그런데 그것과는 좀 달랐다. 그윽한 푸른 눈을 한 그가 고개를 저었다.
“후작저에서도 청소를 했었냐는 말이다.”
약간 머뭇거렸다고 느꼈는데…… 맞나? 조심스러운 것처럼.
“아뇨, 한 적 없는데…….”
보통의 영애가 청소를 했었을 리는 없으니까 그렇게 대답했다. 거기서도 안 한 걸 왜 여기서 하느냐, 혼내려는 것일까.
하지만 카일러는 다른 말 없이 그저 그녀를 바라보았다. 살짝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는데 고개를 끄덕인 것처럼 보였다.
왠지 나 뭔가 그의 행동을 잘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맞을까? 물어보고 싶어졌지만, 다시 파란 눈동자를 마주치자 물음이 쏙 들어갔다.
“공작부인은 할 일이 많다고 알고 있는데. 이 큰 공작저의 안살림을 맡는 것이니.”
아, 공작부인이 할 일도 모르고 할 일이 없다 말한다고 혼나고 말았다.
뭐 이 세계에서 공작부인이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는 게 맞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계약을 어떻게 하고 들어왔는지를 알아야 말이지.
공작부인 행세를 떳떳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결혼하는 데에 계약이 필요했을까.
그런 생각에 권위를 부리는 일에는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해도 되는 거였나 보다.
투정은 되었다. 몰랐던 사람에게 왜 타박하느냐 투정할 게 아니라, 알게 된 것들을 실천하고 차근차근 정보를 얻어 가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영혼이 바뀐, 그가 알던 사샤가 아니라는 걸 들켜서 좋을 게 없을 것이고, 생존을 위해선 빠른 적응만이 살길!
“공작부인의 품위와 의무를 지키라는 말씀이시죠. 알겠습니다.”
그래도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의 반응은 보일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잘 지내보고 싶은데, 어렵네.
“얘기했듯이, 자리를 잘 지켜 주면 된다. 자리를, 공작부인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내 이름을 이용하는 것은 허하지.”
세상 서늘한 다짐의 목소리였다.
분명 말투는 상냥한데 말이지. 아마 이 남자, 진짜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없어서 괴물 같은 사람이든지, 아니면…… 이 위압감 넘치는 비주얼과 분위기 때문에 부드러운 속을 오해받는 사람이든지.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건가.’
“대답은.”
“아, 네. 이그노트 공작부인답게 할 일 할게요.”
대답하는 그녀를 보는데 눈엔 웃음기 대신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아까 봤어? 사샤 님께 말씀하시는 거?”
“그러니까. 나 공작님 그렇게 부드럽게 말 거는 거 처음 봤다니까?”
코니는 새라와 미니가 호들갑 떠는 걸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아까는 청소하는 사샤 님을 보고 호들갑을 떨다가 공작님이 다녀가신 뒤로는 또 공작님 때문에 호들갑이다.
그러나 그 내용이 너무 궁금한 소녀는 슬금슬금 그녀들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얘기들 중이에요?”
“어머나! 아, 코니! 이리 와 봐 봐! 아까 공작님이 오셔 가지고 말이지!”
“‘사샤, 무슨 일인가.’ 하고 물어보시는데…….”
꺄아! 만담이라도 하듯 연달아 말한 새라와 미니가 별안간 소리 죽인 비명을 질렀다.
“아니, 사샤 님 그…… 밤마다 부르려고 데려온 것도 아니고, 정략혼도 아니면…… 진짜 좋아하시는 걸까?”
“공작님께서? 사랑이라고? 애초에…… 그게 가능해?”
코니는 세상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새라와 미니를 갸우뚱거리며 바라보았다.
“애초에, 사흘마다 한 번씩 꼭 집에 들르시는 것부터가…… 사샤 님을 좋아하시는 게 아니었나?”
사람으로서의 예의는 지키시지만 칼 같고 벽 같은 분이셨다. 사람이 들 때도 날 때도 그로 인해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감정을 교류하지 않는 분이셨다.
하녀들도 알고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 댈 만큼.
“저녁은 준비되었어?”
그때, 등 뒤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