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진회색의 커다란 마차에서 내린 것은 기사의 예복을 갖춘 카일러였다. 마차와 비슷한 진회색과 짙은 블루 톤의 기사의 예복은 그의 시린 얼굴에 무게감을 더해 주었다.
“카, 카일러 공작님을 뵙습니다.”
성큼성큼 황궁 내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황제의 궁 정문으로 향하는 카일러의 곁으로 시종, 혹은 귀족들이 지나가며 고개를 숙였다.
발견하는 순간에는 그가 뿜는 위압감에 잠깐 굳었던 사람들은 흠칫 놀라 인사를 건넨 뒤 그의 뒷모습을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궁이 가까워질수록 눈에 띄는 시녀들과 그녀들의 안내를 받아 지나가던 영애 두 명도 그의 등장에 깜짝 놀라며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는 그가 지나가자 억눌린 비명을 지르는 듯한 이상한 소란을 부렸다.
영애의 곁에서 티도 못 내는 시녀들은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든 내적 소란과 눈길들을 모조리 무시한 채 카일러는 곧게 걸음을 옮겼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온 그는 오로지 목적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이었다. 황제의 궁 바로 앞의 짧은 다리에 발을 딛자 건너편에서 또 한 무리의 걸음이 멈추는 것이 보였다.
선두에 선 이는 화려한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였다. 매혹적인 금발머리에 새빨간 입술이 반짝이는 아주 화려하고 고귀한 여인.
이 여인은 카일러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이라 발걸음을 멈추고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그러나 저편에서는 발걸음만 멈추었을 뿐 어떠한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내리깐 눈도 들지 않고 잠잠히 기다리는 카일러를 잠깐 바라보던 황후는 별안간 기분 나쁜 혹은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다리를 건너가 버렸다.
초조한 기색으로 그런 두 사람을 보던 시녀들이 황급히 카일러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종종거리며 황후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반응 또한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카일러는 일절 흔들림 없는 푸른 눈동자를 들어 황제의 궁으로 들어섰다.
시종 중 어느 누구도 그를 막아서는 이 없었다. 거침없는 걸음은 궁전 정문에 가까운 알현실에 닿았고 그 안에서는 황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르르 윤기 나는 갈색 머리카락에 초록 눈동자. 꽃미남 같은 그는 카일러가 들어오자 사르륵 미소 지어 반겼다.
“폐하를 뵙습니다.”
카일러가 올리는 예에도 손사래를 치곤 제 앞의 소파를 가리켰다.
“오다가 황후는 만났나?”
장난기 가득 담긴 그의 말에 카일러는 난감한 한숨을 내쉰 뒤 예를 올리고 소파에 자리 잡았다.
“오늘도 장난은 사양입니다, 폐하.”
나직하게 흐른 저음의 목소리가 알현실을 울렸다. 듣기 좋은 한편 서늘한 냉기를 품은 듯한 목소리였다. 그것을 들은 황제, 리디안의 입꼬리가 더욱 길게 올라갔다.
“쿡, 내기하겠나. 황후가 자넬 잠깐이라도 보겠다는 소원을 이루었다고 한동안 조용해질까, 치부를 건드렸다고 내게 눈을 부릅뜰까.”
속을 알 수 없이 빙글빙글 웃는 모습에 카일러는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궁으로 부르신 게 황후 폐하께 절 보이기 위한 건 아니시겠죠.”
“왜 아니겠나.”
환하게 웃는 입과 달리 눈은 웃고 있지 않는 황제 리디안은 시녀들이 분주히 차려 놓고 나간 티 테이블에서 스콘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황후 덕에 생각지도 못한 결혼을 하게 되었으나 정작 카일러 본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젠가 하게 될 결혼이었고, 그 상대조차 본인이 결정했으니까.
“결혼한 지 열흘이 더 지났나? 어떤가.”
황제는 금방 흥미 가득한 얼굴이 되어 카일러를 향해 두 눈동자를 반짝였다. 악한 성정도, 유한 성정도 모두 가져 기복이 죽 끓듯 하는 리디안은 어떤 면에서는 유쾌하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선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다.
“별다를 거 없습니다. …….”
분명 어미까지 완벽한 문장인데 말끝에 덜 끝난 듯한 여백이 있다.
결혼하고 달라진 한 가지가 떠올랐기 때문에.
“바쁜 와중에 사흘에 한 번은 꼬박꼬박 집으로 간다기에 기대했더니.”
기대했던 만큼 실망도 있는 그대로 표정에 드러나는 그는 정치를 하는 사람보다 연극을 하는 배우 같았다.
아름답고 감정 표현이 확실하고, 기복이 심해 마치 연기를 하는 듯이 보였다.
리디안이 말한 사흘에 한 번이, 방금 카일러를 잠시 멈추게 한 이유였다는 걸 리디안은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자꾸 야욕이 넘쳐 얼쩡거리는 인간, 혹은 마물들을 치기 위해서 백방으로 돌아다니는 카일러로서는 한창 일이 많을 땐 한 달 동안 공작저에 돌아가지 못한 적도 있었다.
결혼식이 끝난 다음 날 바로 서쪽의 이상함을 감지하고 떠났음에도 사흘에 한 번씩 세 번이나 공작저에 들른다는 것이 이미 큰 변화였다.
“그러게 제국에 어여쁜 영애가 얼마나 많은데. 짐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그대에게 남은 인생 바칠 영애들이 수두룩했단 말이다.”
리디안의 나른한 목소리에 카일러는 살짝 눈썹을 올리는 거로 불편함을 표했다.
그런 반응이 리디안에게는 그저 헛웃음이 나는 것이다.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도 그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이베른의 영애와 결혼하겠다고 통보 아닌 통보를 했다. 당연히 제국 수도에 미모로 소문난 엘리나 영애일 줄 알았던 리디안은 사샤라는 생소한 이름에 두 번째 뒤통수를 맞았다.
심하게 무뚝뚝하고 감정이 결여되다시피 한 이 남자는 그럼에도 외모와 기본 매너 덕에 많은 영애들의 선망의 남자가 되었다. 그것을 즐기지도 못하고, 그것의 이점도 모르고…….
아니, 결국 그것은 그에게 독이 되고 말았구나.
사랑받지 말아야 할 이의 사랑을 받아 버렸으니…….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재촉한 결혼이었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신중하게 좋은 가문, 좋은 영애와 짝지어 주고 싶었는데, 여자엔 관심도 없이 일만 하던 이가 왜 그녀를 선택했을까.
“뭐, 그대가 선택했으니……. 그나저나 매일 집에서 보고 있어도 모자란 때에 바쁘게 해서 미안하다. 서쪽을 이번엔 제대로 눌러 줘야겠어.”
스콘에 클로티드 크림만 올려 전부 먹은 리디안이 그렇게 말하자 카일러가 좀 더 미간에 깊은 골을 만들었다.
“집에…… 제가 같이 있어야 합니까.”
무감한 얼굴에 찌푸린 짙은 눈썹, 남자다운 선이 의도치 않은 관능미를 만드는 외모를 가졌으나 감정이나 욕구를 거의 모르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누구에게나 일반적인 그런 것들을 가르쳐 줄 이가 없었으므로.
그런 그가 관심을 보이는 것에 리디안이 ‘호오’ 하는 입 모양을 만들며 소파에 기댔던 등을 떼 앞으로 숙였다.
“당연하지 않나. 이제껏, 이십 평생 살던 곳을 떠나 어마어마한 공작저에 달랑 혼자 떨어졌으니. 영애, 아니…… 부인의 기분이 어떻겠냐 이 말이지.”
진지하게 듣고 있지만 전혀 흡수를 못 하고 겉도는 카일러가 확연하게 전해졌다. 리디안도 차마 남 말 할 처지는 못 되지만 혀를 차게 만든다.
그래 놓고 또 씨익 웃어 보인다.
“후후, 이런 거 아님 언제 그대를 가르쳐 보겠나.”
“제 결혼 이후 왠지 즐거워 보이십니다.”
빙글빙글 웃으며 리디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제국의 모든 영애들의 1순위였던 카일러가 결혼했으니 헛된 꿈을 꾸던 이들이 분명 정신을 차릴 것이었다.
사랑받지 말아야 할 이의 마음도 이제 단념이 되겠지. 물론 그로 인해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것도 진심이었고.
“서쪽은 계속 주시해 줬음 해. 아직 싹 쓸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실천할 수가 없어서.”
한 나라를 없애겠다는 살벌한 소망을 조곤조곤 말하는 리디안의 예쁜 얼굴에 걸린 미소가 살짝 섬뜩했다.
“계속해서 감시하고 있습니다. 메딜란 공작 영지 쪽에서도 움직임이 들리는 듯합니다.”
카일러의 말에 빙글빙글 여유롭던 리디안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그쪽이…… 아직도 그러고 있단 말이지. 황후가 여기 있는데도.”
메딜란 공작가는 바로 황후 미디에나의 친가였다.
본디 공국이었던 메딜란 공작가의 영지는 제국에 편입되어 제국령이 된 곳이었다. 그 역사가 길지 않아 거의 타국이나 다름없었다.
참, 그 여자도 불쌍하다 해야 할지.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연민이, 날카로운 눈에는 분노가 차 있었다.
“그 황후 폐하를 이곳으로 보낸 목적이…… 아무래도.”
카일러는 언제고 무심한 표정이었다.
누구든 목적이 있다. 교류를 핑계로 어린 미디에나를 멀리 떨어진 제국의 황실로 보내는 것에도, 그런 목적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미디에나를 황후로 맞이한 것도, 마음에 품은 이가 따로 있음에도 그런 리디안의 황후가 된 미디에나에게도.
한낮엔 다락방에서, 밤중에야 후작저의 건물 뒤 정원에서 서성인다는 사샤가 내민 손을 잡아 준 것에도 목적이 있었다.
그 공허함이 눈에 밟혀서 그저 데리고 있으려 했었는데……. 결혼식 당일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무엇이 변하게 했는지, 그 눈빛이 왜 마음을 흔드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 사흘마다 저택으로 향했다.
이쯤 움직이면 저택의 사람들도 그녀를 얕보지 못할 테니까. 원래 있던 후작저에서의 삶을 반복하지 않도록 해 줘야 했다.
그것이…… 그녀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던 목적.
분노로 타오를 듯했던 리디안이 또 별안간 편안히 풀어져 웃는 얼굴로 그를 건너다보았다.
“그대도 마찬가지야. 그런 귀찮은 귀만 아니었어도 평범하게 살았을 것을 괜히 내게, 제국에 매여선.”
카일러도 알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서로에게 유일한 친구가 되어 주었던 황제, 리디안이 자신을 걱정해 주는 마음은 진심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황후에게서 저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결혼을 서두르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자신이 신부를 고를 수 있었다.
생각이 결혼 쪽으로 다시 흐르자 카일러는 지금도 저택에 홀로 있을 자신의 부인이 생각났다.
“제국과 폐하께서 배신하지 않는 한, 저는 변절하지 않습니다. 개처럼 복종하는 게 아니라 공작으로서 폐하를, 나라를 지키고 있는 겁니다.”
오히려 능력이 있다는 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킬 수 있는 힘.
힘이 없어 많은 것을 잃어야만 했던 그때로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새롭게……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
황제와의 대화는 항상 길지 않았다.
그리고 간단한 대화는 소소한 소재일 때가 많았다. 귀찮을 법도 한 걸 카일러는 흔쾌히 부름에 응해 왔다.
그리고 그렇게 들렀던 황궁에서.
“카일러…….”
저 여인으로 하여금, 그를 알게 했다.
황제의 궁을 나서 다리를 지났다. 그리고 마차가 마중 나온 길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처연한 목소리 하나가 그를 당겼다.
붙들릴 만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황궁에 들어가기 전 다리 위에서 마주쳤던 보라색 드레스 자락이 시야에 스쳤지만 그대로 마차로 직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