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뭐, 부인이 부인다워야 말이지.”
집무실 회의 테이블 한쪽에 쌓인 화려한 봉투들을 노려보던 사샤는 흠, 콧김을 뿜고는 돌아섰다.
성격상 또 훔쳐보는 일은 못 하는 탓이었다. 차라리 그에게 물어보는 게 낫지.
뭘 더 들춰 볼 것도 아니고 있으면 괜히 신경이 쓰일 것 같아 그의 집무실에서 나가려는데, 문득 문밖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이 멈칫했다.
귀를 기울여 보니 목소리는 1층 관리를 맡고 있는 미니와 새라였다.
“어제도 오셔서 주무시기만 하고 나가셨다면서요?”
미니의 촉새같이 빠른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화젯거리라면 단연 이 집 주인인 공작의 얘기일 것이다.
근데, 그게 저렇게 소곤거릴 일인가.
“그러니까. 공작님, 여자엔 진짜 관심 없으신 줄 알았는데…….”
“그건 그래요. 역시 그렇게 무서우신 분도 그런 욕구 같은 건 어쩔 수 없나 봐요.”
그제야 그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챈 사샤의 볼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여자는커녕 세상 만물에 감정도 관심도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계약으로 부인을 들이고, 집에 와선 잠만 자고 나간다니…….
‘자기’ 위한 사람을 들이기 위해 부인을 들였……다는 건 아니겠지?
그게 계약의 목적이었던 걸까?
그때 다른 이가 끼어들었다.
“난 엘리나 영애가 오신다는 줄 알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 여신 같다던 그분을 마님으로 모신다고 자랑하려고 했는데! 사샤 님은 언니라면서……. 어제 4층에서 내려오다 봤는데, 음…….”
언니? 아…… 사샤한테 여동생이 있었구나. 엘리나란 사람이 얼마나 예쁜진 모르겠지만, 그렇게나 예쁘단 건가? 사샤도 굉장히 예쁘던데.
사샤는 자신의 볼을 손으로 톡톡 두드려 보았다. 눈 떴을 때 거울 속에 있던 모습은 솔직히 너무너무 아름다웠다.
원래 내 모습이 아니었으니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그 잘난 카일러 공작의 옆에 세워 둬도 크게 밀리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 목소리는 2층 담당 니나였다. ……기억해 두겠어.
“아냐, 멀리서 보면 부스스해서 그렇지 사샤 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데. ……허어, 그래서 공작님이 사흘마다 돌아오시는 건가?”
“이 사실을 제국 영애들이 아시면 얼마나 땅을 치고 울까요? 그런 자리라도 들어오고 싶어 할 영애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요.”
기품 있던 로제에 비해 하녀들이 수군대는 수준은 많이 낮았지만 사샤는 들리는 대로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문을 열고 나갔다.
“어제도 오셔서 주무시기만 하고 나가셨다면서요?”
1층과 2층의 청소를 하고 있는 하녀들의 무리 뒤에서 열일곱의 코니는 재빠르게 발을 놀려 따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 떠드는 말들이 너무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물론 코니도 엘리나 후작 영애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은 아니지만 반짝이는 금발과 푸른 눈동자가 매우 아름다운 분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 푸른 눈이 깊고 반짝여서 마치 푸른 바다의 보석 같다 했다.
이베른 후작가에 청혼서가 들어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마님으로 당연히 그분이 들어올 거라 생각했던 건 코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결혼식 당일에 정원 정리 담당을 맡았다가 연회장으로 향하는 사샤 님을 보았을 때 생각이 바뀌었다.
엘리나 님이 얼마나 예쁜지는 알 수 없지만 비교할 대상이 없어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분이었다.
“다들 못 본 건가…….”
소문으로 들은 금발벽안의 엘리나 영애는 매우 화려한 모습이었다. 옅은 금발에 투명한 다갈색 눈동자를 가진 사샤 님은 화려함과는 조금 거리가 멀지언정 전혀 미모가 딸리는 분은 아니었다.
“아냐, 멀리서 보면 부스스해서 그렇지 사샤 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데.”
엘리나 영애 얘기를 꺼내며 더욱 무서운 얘기를 하는 니나의 말에 새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맞아, 결혼식 이후엔 사샤 님이 꾸미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코니도 정원을 오며 가며 산책을 나오신 듯한 사샤 님을 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니나와 새라, 미니의 말에 따르면 많은 영애들이 원하는 공작님의 부인이 되신 건데……. 고용인들에게 뻐기는 것도 없고, 사치를 부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때였다. 공작님도 안 계시겠다 신나게 떠들던 언니들의 옆에서 별안간 벌컥, 문이 열렸다.
빨래터도 아니고 버젓이 복도에서 이렇게 크게 떠들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공작님의 집무 공간들이 모인 곳이었고, 그 주인이…… 바로 오늘 아침 저택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분이 계실 때엔 온 저택이 얼어붙는 것만 같은 느낌이어서 모두 바짝 긴장을 하고 일한다. 일이 너무 바빠 자주 못 오시는 게 이 저택에서 오래 일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마구간지기 니콜 아저씨가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집무실의 문이 열리니 모두 화들짝 놀라 굳어 버린 것이다.
그때까지도 열심히 뒤를 쫓던 나도 깜짝 놀랐다. 부드러운 금발머리에 잠옷인 듯 아주 심플한 하얀색 드레스……. 안에서 나온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우리 대화의 당사자 사샤 님이었다.
크, 큰일 났다……!
사샤 님은 항상 곁에 하녀장이신 로제 님이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챙기고 살피고 계셨다. 공작님 귀에까지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로제 님이 아시게 된다면…….
코니의 머릿속은 복잡하고도 빠르게 핑핑 돌아갔다. 그런데, 긴장이 심장을 움켜잡기도 전에 집무실을 나온 사샤 님은 유유히 언니들을 스쳐 지나 걸어가시기 시작했다.
은은한 꽃향이 먼저 다가왔다. 빳빳하게 굳었던 코니의 앞으로 올 때까지도 그저 저 뒤의 어느 곳을 바라보듯 시선을 둔 채 초연한 얼굴을 하고, 사샤 님은 고요히 발을 옮기셨다.
발소리마저 고요한 그분이 복도를 걸어 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모두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어, 어떡해……?”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니나였다.
원래 이런 뒷이야기 나르는 것을 좋아하던 니나는 혼란스러운 듯한 얼굴이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새라와 미니는 얼굴이 창백해져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코니는 언니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사샤 님이 사라진 뒤를 돌아보았다.
사락이는 소리를 내며 흩날리던 머리카락과 치맛자락이 왠지 계속 눈에 밟혔다.
*
사람이 있을 리 없던 집무실에서 문소리가 나자 화들짝 놀라 굳은 그녀들의 얼굴이 보였다. 저 뒤에서 열심히 따라오는 작은 아이까지 네 명.
사샤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그대로 스쳐 지나가 버렸다.
그녀가 걸음을 옮겨 간 곳은 건물 뒤편에 있는 작은 분수가 있는 정원이었다. 널찍한 뒷마당의 경계인 회양목 너머 아늑한 공간이었는데 며칠 전 발견한 이후 자주 찾는 곳이었다.
그걸 또 로제가 눈치챈 모양이다. 어제까진 없었던 티 테이블과 의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열흘 동안 이 집에서 일하는 어린 하녀들에게조차 이렇게 쉽게 씹히고 있었구나 생각하니 죽어 있던 자존심이 팍 상하는 느낌이다.
죽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일과 공부에 지친 스스로를 위로하려 그런 쓸데없는 다짐을 한 적이 있었다.
죽은 건 맞지만……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건데, 결국 이것도 내 삶인 건데.
“죽을 것도 아닌데…… 이러고 살 수는 없지.”
뒷담화는 일도 아니다. 악착같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적이 오르면 무조건이었다. 친구가 없어서 그런가 하고 친구를 사귀어도 마찬가지 결과였다.
어딜 가나 순탄하게 좀 살 수 없겠니…….
“에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선 여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알려 줄 사람이라든지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
첫 번째 고민부터 막힌 사샤는 혀를 쯧, 차고는 테이블 앞 의자를 빼내었다. 이제야 겨우 익숙해진 넓은 드레스를 잘 추스르고 앉았다.
오전 시간이라 그런지 햇살이 정통으로 작은 정원을 채우기 시작했다.
계급이 있는 사회에선 그 계급의 선을 잘 지켜 줘야 한다. 특히나 지위가 높을수록 그에 걸맞게 챙겨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래야 자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우선은 이 공작저의 고용인들에게 제대로 공작부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데…….
“난 엘리나 영애가 오신다는 줄 알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 여신 같다던 그분을 마님으로 모신다고 자랑하려고 했는데! 사샤 님은 언니라면서……. 어제 4층에서 내려오다 봤는데, 음…….”
“하아, 정말 귀찮네.”
돈은 열심히 벌면 됐지만 사람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놈의 삶은 어째 어딜 가도 평탄하지를 못 하니.”
자주 하던 한탄인데, 사샤의 고운 목소리로 듣자니 뭔가 새롭고 어색했다. 적응해 나가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네.
커다란 저택의 커다란 방은 넓고 예쁘고 갖출 것을 다 갖추고 있었지만, 아직 너무 부담스러워서 불편한 면이 있었다. 아직까진 ‘내 방’이라는 느낌이 잘 들지 않았다.
저택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에 그런 불편함이 더해져 열심히 돌아다녔고, 그 결과 이렇게 쏙 마음에 드는 공간도 찾았다.
그때, 자박자박,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쫑긋 귀를 세우니 그 발소리는 조심스럽게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발소리는 회양목 너머에서 멈추었다. 누구나 올 수 있는 자리고 정원을 관리하는 인원도 꽤 되니까 인기척이 대수로울 건 아니지만.
이쪽에 목적이 있는 걸음인 것 같단 말이지.
급할 것 없이 분수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귀를 기울이고 있자 바스락, 풀잎 건드리는 소리가 났다.
“저, 사샤 님. 차를 가져왔습니다.”
조심스러운 어린 목소리. 돌아보니 코니가 트레이를 들고 나타났다.
“응. 그래.”
오래 들고 있기 버거워 보이는 트레이를 보며 얼른 대답해 주자 코니는 흡, 숨을 들이마시고는 얼른 다가와 테이블 위에 티 웨어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잘 우러난 차를 찻잔에 채우는 것까지 조심조심 천천히 하는 모습을 보며 방금 전 일을 떠올렸다. 이 조그마한 아이는 열심히 떠들던 하녀들을 뒤따라오고 있었다.
마주친 적은 별로 없지만 열심히 정원을 정리하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코니, 오늘의 차는 무엇이지?”
차를 따르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사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사샤라는 아이는 얼굴만큼이나 목소리도 너무 예뻐서 말하다 살짝 놀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찻주전자를 내려놓던 코니가 흠칫 놀라 달그락, 하는 소리를 냈다.
“아, 네, 사샤 님. 오늘 차는 배를 블렌딩한 홍차예요.”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코니는 이것저것 더 정리하고 불편한 부분은 없는지 열심히 살폈다.
“차를 가져다주는 건 처음이네.”
찻잔의 화려한 손잡이를 잡으며 넌지시 말을 걸자 슬슬 물러나려 했던 코니가 또 한 번 흠칫 놀란다.
말을 거는 게 그렇게 놀라운 일인가. 넌지시 말을 붙여 보자 하얀 볼에 발그레한 홍조를 띤다. 그게 너무 귀여워서 사샤의 입술도 살며시 올라갔다.
“햇볕이 있어서 정원 청소하느라 힘들 거 같던데, 괜찮아?”
코니의 반응이 나쁘지 않아 더 말을 붙여 보았다. 아까 그 하녀들이었다면 아마 쭈뼛거리며 태연하게 대답하려 노력했을 텐데, 이 아이는 그저 내가 말을 걸어 주고 자신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거 같았으니까.
“어, 어떻게 아셨어요?”
순진하고 귀여운 얼굴로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걸 보니까 왠지 내 마음도 몽글몽글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나이는 잘 모르는데, 코니는 몇 살이야?”
“아…… 저는 열일곱이에요.”
한층 더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열셋이나 많아도 열다섯쯤을 생각했던 사샤는 입술을 모았다. 많이 작다고 하는 생각을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렇구나. 차 고마워. 정원 청소할 때 햇빛은 꼭 조심하고.”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렇게 말하니 코니의 쑥스러운 홍조 위로 배시시 미소가 지어졌다. 뒷담화하는 무리에서 말을 보태지 않고 있던 아이는 오히려 자신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복잡하기만 했던 머리가 순수한 미소와 호감에 풀어지는 것도 같았다. 호감을 담은 눈빛,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껴졌다.
“그럼, 사샤 님. 편히 쉬세요.”
물러나는 아이를 바라보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대학교에서 하던 시작을 전혀 새로운 곳에서 시작할 뿐.
처음이 다소 충격적이었지만…… 이상하게 나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부서지는 맑은 물을 바라보며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