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중세의 유럽, 거대한 저택 안을 걸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름답고도 신기해 둘러볼 법도 한데, 눈을 뜨고 제일 처음 보았던 중년의 여인을 따라 걷는 걸음에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결국 공작이라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진짜 결혼식을 하러 가고 있는 것이다.
하얗고 심플한 듯 화려한 웨딩드레스의 치맛자락을 끌어가며 걷는 커다란 복도, 양옆으로 늘어선 웅장한 기둥. 걸어가는 길만으로 이그노트 공작이라는 가문의 권위가 느껴졌다.
결혼식장으로 보이는 건물 앞, 훤칠한 남자가 보였다. 어둠과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선명한 푸른 눈동자.
이 심각한 상황에서도 멍해질 만큼, 다시 봐도 너무도 멋진 사람이었다. 화려한 건물의 장식도, 쏟아지는 쨍한 햇살도 그의 존재감 앞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한껏 시린 표정을 지은 그를 보자 흠칫 몸이 떨렸다.
아까부터 눈이 마주치면 지그시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듯한 눈에 움찔하게 되었다. 혹시 신부의 영혼이 바뀐 걸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쭈뼛거리며 그의 옆에 섰다. 설상가상 식장은 겉에서 보기보다 훨씬 컸고, 안에는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들 미소를 짓거나 밝은 기색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엔 전부 보였다. 한 겹 벗겨 낸 얼굴 뒤로 감춰진 경계의 빛이.
침이 꼴깍 넘어갈 만큼 위압적인 분위기에 굳어 있는데 머리 위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신부가 그렇게 굳어 있으면 안 되지. 얼굴 펴.”
그러니까 굳어 있는 것 아니겠어요……?
대학 생활도 제대로 못 해 보고 이제 막 민증을 써 보기 시작한 나이에 갑자기 결혼이라니! 그러고 보니, 그쪽은 몇 살이시죠?
슬픈 것은 지나갔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런 것이 궁금해졌다. 사실 슬프고 절망적인 것은 흔한 일이었으니까.
“계약은 유효하다. 그러니 제대로 이행하도록.”
그러고 보니 아까도 이런 얘기를 했었지. 계약.
두 남녀가 만나고 좋아해서 행복하려고 하는 게 결혼일 텐데. 이 몸의 주인도 그리 행복한 미래를 두고 있었던 건 아니었구나.
몸만 남고 영혼은 길을 잃었을 ‘사샤’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이 이상하게 얽혔다.
나는 다른 사람을 향한 애정을 받으며 살 것도 마음 불편했겠지만, 계약 관계일 뿐인 결혼이라면…….
“축복 가득한 날 이그노트 공작님의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카일러 이그노트 공작과 사샤 이베른 영애가 입장하겠습니다.”
안쪽에서 하얀 옷을 입은 이가 큰 소리를 내자 웅성거리던 하객들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가 먼저 걸음을 떼자 어쩔 수 없이 한 박자 느리게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가운데 쭉 뻗은 길을 걸어 커다란 여신상 아래 멈춘 그의 옆에 눈치껏 나란히 섰다. 결혼의 시작을 알린 이가 여신이 어쩌고 하면서 뭔가 말을 했고, 잘 알아듣지도 못 하는 말들을 듣고 있다가 그의 혀 차는 소리에 놀라 뒤돌아서 하객들을 바라보고 섰다.
온갖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들로 반짝이는 하객들의 탐탁지 않은 시선들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너무 위압적인 신랑의 존재감과 눈앞의 화려함이 점차 날 선 걱정을 무디게 만들고, 체념하게 만들었다.
그래, 지난 생이나 지금이나 뭐라고 다를까. 그땐 주변에 아무도 없었고, 지금은 누가 있을 뿐일 것이다.
잠깐이라도 이런 생을 ‘선물’일 거라 생각했던 걸까. 뭘 잘했다고.
“온화하신 넬리의 찬란한 날개 아래, 유구한 이그노트에 무한한 화목이 깃들기를.”
신관인 듯한 분의 성혼선언 같은 멘트가 끝나자 모여 있던 이들이 입을 모아 ‘화목이 깃들기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슬쩍 곁눈질하자 공작의 단단한 턱이 꼿꼿해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저들을 아래에 두고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공작가이니 황족 다음가는 권력을 가졌겠지만 그 권위의 규모를 감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을 마치고 복잡 한 얼굴로 연회장에서 벗어났다.
내 신랑이 되었다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나온 뒤로는 터질 듯한 머리를 정리하며 누군가의 뒷모습을 정처 없이 따라다닌 듯했다.
복잡한 머릿속에 같은 말만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차원 이동을 해 사샤 이베른이 되었으며 곧…… 이그노트 공작이란 남자와 첫날밤을 보낸다……!
결혼식이 끝난 뒤로 하객들에게 인사하러 돌아다녀야 할까 봐 한껏 긴장했지만 그녀의 눈앞에 안내자처럼 중년의 여인이 나타났다.
공작에게서 한두 마디 말을 전해 듣고 앞장서는 중년 여인의 뒷모습을 따라가니 어느새 저택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사샤는 자신을 로제라고 소개한 중년 여인에게 이끌려 제일 먼저 웨딩드레스를 갈아입고 식사도 하고 씻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넓고 고급스러운 모습에 멍했다. 생활감이라고는 생기지 않을 것 같은 공간이었다.
“오늘 주무실 곳은 이곳입니다, 사샤 님.”
로제가 3층의 한 방문 앞에 서서 사샤를 돌아보았다. 넓고도 넓은 공간에 정신을 더 못 차리고 슬쩍 뒤로 빠져 계단 아래로 갈까 싶어 발걸음을 늦추다 딱 들키고 말았다. 입술을 말아 문 채 그녀를 따라 발을 옮겼다.
“이곳은 공작님의 침실입니다. 오늘 밤은 공작님과 지내시고, 사샤 님의 방은 내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드디어…… 그 남자의 방. 한껏 긴장한 채 안으로 들어가길 망설이고 있는 사이 로제는 조용한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공작가는 진짜 대단한 곳인가 보다. 하녀장마저 마치 귀족처럼 우아했으니까.
짙은 남색과 금색이 과하지 않게 어우러진 공간은 넓고, 고급스럽고 차분했다. 딱 이 방의 주인이 생각나는 곳에 서서 사샤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설픈 어둠이 스며드는 시간, 긴장감을 가득 안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답도 없이 엉키고 엉켜 있던 생가들이, 침실에 들어오자 말끔하게 증발해 버렸다.
또 하나의 커다란 문제, 그것도 지금 바로 눈앞에 직면한 문제 하나 때문에.
넓고 고급스러운 방에 압도된 것도 잠시, 붉어진 햇살이 닿은 하얀 침대 시트가 눈에 들어온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걱정만이 솟아올랐다.
초야.
이성과 손을 꼭 잡는다든지, 몸을 꽈악 끌어안는 것조차 생소한 나에게 지금 초야라고 하셨나요? 로제가 그 말을 했을 땐 정신이 없어서 단순하게 단어의 뜻만 알아들었는데 실제로 방에 들어오고 침대를 보니까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역시…… 안 되겠어 아직 난…….”
“그건 곤란한데.”
흡! 휙 몸을 돌려 방을 나서려던 시야가 무언가에 꽉 막혀 버렸다. 서늘한 목소리를 정수리부터 뒤집어쓰고 부르르 어깨가 떨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조각한 듯 선이 분명한 입술이, 날카로운 콧날이,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서늘한 푸른 눈동자.
카일러 이그노트 공작.
내리누르는 듯한 무게감과 감정을 담지 않은 시리게 푸른 눈동자가 서늘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생각을 흐릴 만큼 잘생겼지만 그 위압과 냉기로 흐려진 생각마저 멈춰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되리라는 건 이미 말했고 계약에 모두 포함된 내용이었는데, 도망가면 곤란하지. 아까도, 이것 때문에 도망치려 한 건가.”
아, 예…… 사샤라면 그렇겠죠. 근데, 불행히 제가 그 여자가 아니라서 저도 매우 곤란하……다고요.
그의 시선에 주눅이 들어 입술을 말아 무는데 그가 손가락을 들어 내 입술을 당겨 이에서 해방시켰다.
이가 긁은 입술의 감각, 다른 이의 손이 닿은 적 없는 입술의 감촉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이미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 분명히 밤을 함께해야 한다는 걸 설명했고.”
나직한 목소리가 여운처럼 울렸다. 그의 목소리와 허리에 얹은 팔에 이끌려 어느새 침대에 올라앉아 있었다.
그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군더더기 없는 속도로 그녀는 알몸이 되고 말았다.
두 사람의 초야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
똑똑똑.
“사샤 님, 일어나셨습니까.”
아침을 알리는 소리에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다 눈꺼풀이 올라갔다. 사샤는 천천히 몸을 뒤척이다가 갑자기 윽, 하는 소리와 함께 움직임을 멈췄다.
허리를 타고 올라온 찌릿한 통증이 뒷머리까지 울렸기 때문이다.
어제는 이 저택의 주인, 카일러가 다녀갔다. 바쁜 일이 많아 그는 이 집에 자주 돌아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어제처럼 저택에 돌아와 자는 날은 며칠에 한 번꼴이었고, 그나마도 바로 다음 날 나가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날 밤이면…….
사샤가 뻐근한 허리를 살살 움직여 몸을 일으킬 때까지 바깥은 조용했다.
“로제. 방에 목욕물만 준비해 줘.”
“네. 그럼 목욕 준비 하고 식사도 이어 준비하겠습니다.”
바깥에서 차분히 답하는 로제의 목소리에 안정이 되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이곳에서 눈을 뜬 첫날의 결혼식 뒤 열흘 후.
사샤는 세 번째로 공작의 방에서 잠을 깼다.
그 열흘간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유로, 아무도 그녀에게 뭔가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천천히 저택을 돌아보면서.
“로제, 공작님은 언제 나가셨어?”
로제에게 말을 편하게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우아한 귀족 같은 중년의 여인이, 만약 있었다면 그녀에게 이모뻘 정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 때문에.
“동이 트자마자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시고 바로 나가셨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정말 바쁜 사람이었다. 사흘에 한 번씩 들어오는 게 용하다 싶을 정도로.
무엇 때문인지 묻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그럼, 필요할 때 찾으세요.”
로제가 우아하게 물러나고 사샤는 목욕으로 뻐근한 몸을 풀고 나와 아침 식사도 간단하게 마쳤다.
음식에 대한 걱정도 쏙 사라졌다. 낯설지 않은 재료들에 주방장의 솜씨가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그러고 나선 천천히 1층을 돌아다녔다. 최근엔 주로 뒤쪽 정원의 분수대 근처에 자주 갔었는데, 오늘은 그의 공간이라는 말에 가지 않던 집무실로 들어가 보았다.
창이 많고, 커다란 책상과 회의 테이블을 갖춘 공간이 넓어 시야에 한꺼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서류가 잔뜩 쌓인 책상에 시선을 던졌다가 회의 테이블 한쪽에 쌓인 것을 들여다보았다.
“편지…… 같은데.”
족히 십수 장쯤 돼 보이는 것은 인장이 찍힌 봉투들이었다. 그런데…… 그게 그가 받을 것처럼 생기지가 않았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진줏빛 봉투라든지 리본으로 띠를 두른 듯한 것도.
딱 봐도 여인이 보낼 것들이었다.
“러브레터……는 아닐 테고.”
아니, 맞을지도.
별다른 생각 없이 저택의 유령처럼 돌아다니던 사샤는 번뜩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이 집에 저런 걸 받을 사람은 그 남자뿐인데 이렇게 정성스럽게 꾸민 거라면…… 진짜 러브레터밖에 없는데……?”
비주얼적으로 거의 신에 가까운 남자이긴 하지만 무뚝뚝함의 표본인 남자였다. 웃어 주는 일 없고, 말 거는 법도 잘 모르는 듯했다. 심지어는 침대에서도…….
어젯밤을 떠올린 사샤는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라 얼른 양손으로 가렸다.
아직도 눈앞에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타 움직이던 그의 모습과 그가 준 감각들이 생생할 지경이었다.
열흘 동안 세 번의 밤. 한 번도 누군가와 밀접한 스킨십을 해 본 적이 없던 그녀로서는 그가 주는 감각 하나하나가 몸에 새겨져 버린 듯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인기가 되게 많은 사람인가 보네.”
제 것이 아닌지라 열어 보지도 못하고, 정황상의 추측만으로 보기엔 시사하는 바가 너무 컸다.
“있는 듯 없는 듯 지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이 자리를 적극적으로 지켜야 하는 건가.”
원래의 나라면, 적극적으로 지켰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는 살아남기조차 힘든 환경에서 살았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여기서 유유자적 열흘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공작이라는 어마어마한 남자와 결혼을 했기 때문이었으니까, 생존을 위해선 이 관계를 지키는 게 맞았다.
하지만 만약…….
“이런 걸 누리기 위한 눈속임으로 결혼을 한 거라면.”
이 결혼이 계약이라는 것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하나만 열어 볼까…….
봉투에 불이라도 붙일 듯한 눈빛으로 제일 위의 진줏빛 봉투를 사샤가 뚫어질 듯이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