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짙은 푸른색과 곳곳에 금색을 둘러 고급스러운 공간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사샤의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노을이 물러가고 어설픈 어둠이 방에 차오르자 소리 없이 다가오는 그가 마치 어둠에서부터 걸어 나온 신인 듯했다.
“저, 저기…… 아.”
훤칠한 키에 그녀를 감추고도 남을 듯 넓은 어깨와 가슴 그리고 푸르게 빛나는 서늘한 눈동자 아래, 이 팽팽한 긴장감을 버티지 못한 사샤가 목소리를 내 봤지만 덮치듯 다가오는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침대에 앉은 그녀의 위로 올라온 그는 그녀의 망설임과 주저는 무시한 채 곧장 얼굴을 내려 입술을 머금었다.
흡, 숨을 삼키는 사이 그가 사샤의 분홍빛 입술을 이로 살짝 물었다. 온몸이 굳은 듯 긴장하던 입술이 짧은 자극에도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벌어졌고, 뜨거운 살덩이가 그 틈새를 노리고 입술을 타고 넘었다.
“흐응……!”
생경한 감각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단단하고 뜨거운 벽은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는 듯 굳건했다.
‘산 같아……. 밀리지도 않네.’
입 안에 들어찬 뜨거운 혀는 도망치려는 작은 혀를 옭아매고 입천장을 훑으며 숨 막히도록 아찔하게 움직였다.
사샤의 저항에도 그의 몸은 단단했고 입 안을 침범한 혀는 뜨거웠다. 헤어 나오기가 어려울 정도로 그가 주는 온갖 감각에 손끝 발끝부터 짜릿한 듯, 저린 듯 서서히 점령당해 갔다.
‘아, 뭐가 이렇게…… 좋은 거야.’
“웅, 읍, 흡……!”
밀어낼 수도, 그렇다고 당길 수도 없는 사샤의 입에선 좁은 틈을 비집고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게 남자의 욕망을 부추기고 단단하게 키우는지도 모르는 채.
입술과 혀의 마찰과 그 질척한 소리에 정신이 팔려 있던 사샤가 두 번째로 놀라 흠칫 떨었다. 허벅지를 스치고 골반에 와 닿는 뜨거운 살덩이가…….
“흐, 후…… 자꾸 그렇게 밀고 떨어 대는 건, 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혀나 아래를 스치는 그것만큼이나 관능적인 목소리가 뜨거운 호흡과 함께 쏟아졌다. 본능적으로 그를 밀어내려고 어깨를 짚고 있던 손에 힘이 살짝 빠졌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어쩌지 못하며 그의 눈을 피해 다니던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짙은 눈썹에 유려한 눈매, 자세히 보니 눈매는 동양적인데, 그 안에 담긴 파란 눈동자가 너무 신비로웠다.
높다란 콧대도 낮고 울림 좋은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입술도 마치 조각한 듯 너무 멋있고, 단단한 손과 팔이 닿고 안아 오는 것이…… 설레는 한편 너무 안정적이어서 놀라 버렸다.
“아, 아니, 저는…….”
밀어내기는커녕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우리의 계약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관계가 있을 것이라 설명했고, 고개를 끄덕인 것도 그대이니.”
그가 빨아 대느라 금세 부푼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슴이 들썩일 만큼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사샤의 두 눈동자는 혼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미 그의 위압감 흐르는 분위기에 압도되었고 표정과 다르게 한껏 뜨거운 몸짓에 묶여 버렸음에도 섣불리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처음 보는 남자, 심지어 처음 보는 세계의 이그노트라는 성과 공작이라는 지위밖에 모르는 남자 아래에서, 알지도 못 하는 계약에 묶여 버리는 일이었으니까.
“무를 수 없다 하였다. 그만 나를 받아들여.”
그가 목덜미를 마치 뱀파이어처럼 물고 빨아들이는 감각에 ‘꺗!’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사이 그의 뜨거운 손이 허벅지를 쓸어 당겼다. 일렁이는 눈동자로 번뜩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으나 눈을 마주친 그의 허리가 단호하게 움직였다.
들어온다……!
“하읏……!”
짧게 끊기는 숨과 함께 머릿속으로 벼락이 내리쳤다.
그는 분명 열기를 품고 있었고 느리지만 확실하게, 그리고 점점 강하게 그 깊이를 더해 갔다.
그의 몸이 더 내려와 서로의 몸이 온전히 겹쳐지자 그의 무게감과 온기가 더욱 사샤를 강하게 감싸 왔다. 온몸을 관통하는 감각에 사샤는 가녀린 팔을 들어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가 움직일수록, 남자의 팔을 붙든 사샤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하얗게 불거졌다.
도망갈 수 없는 단단한 품 안에서 사샤의 신음 소리가 높아져만 갔다.
그 첫 밤은 그의 아래에서 젖고, 흔들리고, 몇 번이고 정신을 놓고 말았다.
*
쓸쓸한 삶이었다.
가족은 글로 배웠고, 애틋한 보육원 친구 같은 것도 없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랬고, 얼마 안 되어 사고를 당했다.
스물. 참 아무것도 없는 삶이었다. 몇 년을 이어져 봐야 그게 그거였을…….
그런데 다시 눈이 뜨였다. 손발이 따뜻하고 이마가 찡 울렸다.
죽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생소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알고 있었다. 내 생이 끝났다는 것을. 그러나 불과 몇 분 뒤 사그라지던 감각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감각이 모두 돌아왔을 때, 다른 사람들의 손이 내 얼굴과 머리를 마구 건드리고 있었다…….
“헉!”
“아, 일어나셨습니까, 사샤 님. 준비가 거의 끝나 갑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깍듯한 말투와 공손한 손길에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눈앞의 거울에 비친 사람을 보고 꺅! 비명을 질렀다.
“사샤 님? 무슨 일이십니까?”
옆에서 차분히 설명하던 중년의 여인이 비명에 놀라 나를 보고 물었다.
사샤? 뭐야, 나 부른 거야? 저 사람은 뭐야. 왜 날 정면에서 보는 거야, 소름 돋게……! 나잖아!
거울 속에서 투명하게 빛나고 있는 다갈색 눈과 마주쳤다. 뽀얀 피부는 모공이나 주름 따위는 모르는 듯이 매끈했고, 분홍빛의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약간 놀라고 있었다.
생기는 부족해 보이지만 부드러운 금발과 더해져 너무 어여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리 봐도 저건…… 거울 속에 비친 나……인 것 같은데?
두 눈을 땡그랗게 뜨고 거울을 마주 본 채 넋을 놓은 나를 중년 여인이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잠시 빠졌던 넋을 차리고서야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아, 아니…… 저……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러자 그 중년 여인은 주변의 어린 여자들을 내보냈다. 그들은 전부 어두운 단색의 드레스 비슷한 걸 입고 있었다. 저거…… 하녀복처럼 생겼는데…….
“사샤 님,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결혼식이라 많이 긴장하셨을 거라고 공작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결혼식을 마치고 초야를 치르시고 나면 사샤 님은 이베른 후작의 영애에서 온전히 이그노트 공작부인이 되시는 겁니다. 그 뒤로는 저희가 성심성의껏 모실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말투는 다정한 듯했지만 중년의 여인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설명을 선 긋듯 늘어놓아주었는데, 그 안에 기절초풍할 정보들이 숨어 있었다.
얼마 전 OT에서 어쩌다 옆자리에 앉게 된 여자애가 보여 줬던 로판 소설이라는 게 떠올랐다. 조금 많은 것이 이상했지만, 너무 그 소설의 분위기와 딱딱 들어맞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 소설도 여자 주인공이 이런 식으로 갑자기 판타지의 세계에서 눈을 뜨며 시작했다.
진짜…… 내가……?
“로제 하녀장님! 이제 곧 식이 시작된답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정신이 깨어났다.
로제 하녀장……! 그 이름을 들으니 완전히 확실해졌다. 로제는 남자 주인공의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였으니까.
내가 들어오게 된 몸의 이름은 사샤 이베른. 본래의 나와 같은 스무 살에 이제 곧 결혼을 하고…… 초야를 치를 예정인 후작 영애다!
세상에……. 지난 생이 너무 홀로 외로운 삶이라 일찍 죽여 새로운 삶을 준 걸까. 대신에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문제는 내가 알고 있는 정보가 딱 저기까지라는 거다. 왜 결혼을 하게 됐는지, 이 남자는 누구인지 사샤가 어떤 성격이었는지까지 아무것도 몰랐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한 가운데 하녀장이라 불린 로제가 부케를 가져오겠다며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이게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생각했다. 이대로 모르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어. 방법을…… 방법을 찾아야 해.
무조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을 나섰다. 치렁치렁 걷기만 해도 바닥 청소를 할 법한 웨딩드레스의 자락을 빨래 걷듯 팔에 들고는 소리와 인기척에 집중해 왼쪽 복도를 냅다 달렸다.
어딘지도 모르고 나간다고 해결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선 달렸다.
‘하, 하악, 일하느라 단련된 거 아니었어? 왜 이렇게 힘들어?’
이 건물을 벗어나기도 전에 숨이 차올랐다. 대체 여기는 어디길래 이렇게 넓은 걸까.
‘공작부인이라 했으니…… 여기는 공작님의 저택인가?’
그래도 끝은 보였다. 옆의 창문으로 보아 저 문을 열면 우선 건물은 벗어날 수 있을 거 같았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계속 달리다 숨도 차고 다리도 뻐근해져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된 건지,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우선은 결혼은 막아야지!
드디어 밖으로 통하는 나무 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저택의 규모로 보아 정원도 크고 부지도 어마어마할지도 모르지만, 우선 건물 안에 있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당황해서 냅다 달리는 것치곤 세세한 플랜을 짜며 달리던 나는 나무 문손잡이를 붙들고 냅다 벌컥 열어 버렸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올 거라 여기고 한쪽 팔을 들어 올리는데, 이상하다. 어째서 문을 열기 전보다 더…… 어두운 것 같은 느낌이지?
“사샤 이베른.”
히익!
문을 열자 밖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코앞이었다.
심장을 쿵 떨어뜨리는 굵고 나직한 목소리가 분명 이 몸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만으로도 두 발에 땅에 붙어 버린 것 같았다. 들켰다는 무서움도 있지만…….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심장이 크게 출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어딜 가는 거지.”
이전 생에서 비록 TV는 없어도 어느 연예인이 잘생겼다 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20 평생 살면서 본 그 어떤 사람도 이렇게 멋지고 잘생긴 사람은 없었다.
비현실적인 외모에 잠시 넋을 놓아 버렸다.
훤칠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 강하고 남자다운 얼굴선과 조각한 듯한 코와 입술, 유려하고 매끈한 눈매 안에는 시리도록 깊고 푸른 눈동자가 있었다.
표정 없는 그는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시린 눈동자에서 뿜어 나오는 위압감이 내 발목을 묶어 놔 버렸다.
“이쪽은 연회장 가는 길이 아닌데.”
그리고 정신이 번뜩 드는 순간 알아채 버렸다.
이 남자가 바로 오늘 눈을 뜬 나와 결혼할, 나의 남편이 될…… 이그노트 공작…….
무심한 듯, 나른한 듯 내려다보던 푸른 눈동자가 또륵 굴러가더니 얼굴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아래로 더 내렸다.
행색을 살피고 있는 것이 느껴지자 긴장으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침 삼키는 걸로 긴장한 걸 들킬까 봐 조심했는데, 순간 날카로워지는 눈빛을 알아채고 말았다.
살짝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고 느낀 것은…… 내 착각인 걸까.
말한다, 말한다. 그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 눈썹, 입술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긴장시켰다. 도망가려다 그에게 막히고 나자 주변에 장애물이 없음에도, 더는 도망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계약이라지만, 결혼식 당일에 도망가는 신부라니. 벌써부터 밤이 두려운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