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그날 기방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정사丁巳년 유월.
스물여섯 살의 만운은 기골이 장대하고 뛰어난 무예와 전공을 가진 헌헌장부였다.
덕분에 그 젊은 나이에 정사품 장군과 군기감을 겸임하며, 승승장구하는 이였다. 바로 위로는 왕의 최측근인 윤채운 대감을 형으로 두고 있었고, 본인도 왕의 총애를 받는 걸출한 인물이었다.
허나 만운은 지금 저처럼 처량한 신세가 없다며 한탄하는 중이었다.
“에효!”
“땅이 꺼지겠소. 무슨 일이시오, 장군?”
벌써 육 년째 형보다 더 자주 보는 남부 도사 정태천이 껄껄 웃으며 말을 건넸다. 만운은 그를 보며 까닥 고갯짓만 하고서 다시 바닥을 보며 한숨만 장하게 쉬었다.
“후우, 우리 형은요……. 거짓말쟁이입니다.”
“예? 그게 무슨 큰일 날 소리요?”
정태천은 깜짝 놀란 시늉을 하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만운은 그의 첫째 아들과 연배가 비슷했다. 하지만 무뚝뚝하고 애교나 장난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아들보다 만운을 상대하는 것이 더 재미날 때가 많았다.
그리고 만운이 이런 식으로 엉뚱한 소리를 할 때면 필시 형을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릴 때였다. 오늘도 그런 말일 게다.
아니나 다를까, 만운이 이어 하는 말이 그랬다.
“예전에 우리 염이가 태어나던 날, 우리 형이 달 보고 뭐라 그랬게요?”
“……뭐라 했소?”
“저보고 미안하다며, 염이가 끝이라고.”
“으잉? 거, 무슨 소리요?”
“어? 아뿔싸, 형 귀에 들어가면 나 죽소!”
주절주절 답을 하던 만운은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선 얼굴이 허예지며 입을 막았다.
그러나 늙은 생강이 맵다고, 그가 하려다 만 말만으로도 대충 감을 잡은 정태천은 속으로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허나 체면이 있지, 이 어린 장수 앞에서 어찌 그러겠는가.
만운이 여기 도착하던 엊그제 처음 한 말이 네 번째 조카를 봤다는 말이었다. 꼬물꼬물한 그 녀석을 또 훔쳐 오고 싶었지만 그러다 이번엔 형수에게 쫓겨날까 봐 눈물을 머금고 그냥 와야 했다는 것이다.
입이 찢어지도록 웃으면서도 정말 아쉬워하는 표정을 보니, 가능하기만 했다면 진짜로 조카를 훔쳐 오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가 하나로 끝이라 하다가 넷을 낳았다며 형을 거짓말쟁이라 고자질하는 것이다. 사사로이 윤채운 장군도 알고 있는 정태천은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그런데 조카가 태어난 걸 그토록 좋아하던 이가 이렇게 한숨을 짓는 것 또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아무튼 못 알아들은 척 시치미를 뚝 뗀 정태천이 다시 말을 걸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만, 조카가 넷이 되어서 소원 성취했다고 하지 않았소?”
“네, 소원 성취, 맞지요. 형은 다 잘해요. 제가 바라는 것도 척척 들어주고, 못하는 게 없어요. 그런데 저는 어떻게 열 살이나 어린 그 녀석을, 그 녀석을…….”
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만운의 입에 다시 긴 한숨이 나왔다.
만운의 나이 올해로 스물여섯.
본래 그의 인생 계획대로라면 이 나이가 형이 장가간 나이이니, 그도 장가를 가야 했다. 헌데 아무리 중신이 많이 들어오고, 어여쁜 아가씨들이 앞에서 얼씬거려도 도무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담영?
담영, 그 꼬맹이?
그 녀석은 고작 열여섯 살이다. 아니,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그의 눈에는 계속 열 살이었다. 헌데 그 꼬물거리는 조카를 두고서 이곳에 사흘이나 더 빨리 내려오게 만든 원흉이 바로 그 담영인 것이다.
그렇다.
만운은 사흘 전 임무를 핑계로 이곳으로 도망친 것이다.
막내 조카 진이 태어난 건 소원을 이룸과 동시에 그가 형수에게 바랐던 마지막까지 모든 걸 털어 낸 일이었다. 형수에 대해선 그 이전에 이미 먹구름을 거뒀지만 진의 탄생으로 모든 것이 해소된 것 같았다.
그는 기뻤다. 정말이지 진심으로 기쁘고 축복할 일이었다.
그래서 친한 무장들을 데리고 기방에 갔다.
그도 그 엄격하기로 소문난 윤채운의 동생인지라 유흥을 썩 즐기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혈기왕성한 사내가 술과 계집을 마다할 리가 있겠는가. 그는 거나하게 한턱을 쏘고, 그날따라 취기와 흥이 돋은 나머지 기방에서 하루 머물 작정을 했다.
옆에서 시중을 들던 기녀의 미색도 꽤나 고왔다. 교태 어린 미소와 나긋나긋한 몸짓으로 그를 은근슬쩍 유혹하는 자태가 참으로 마음을 동하게 했다.
다른 술동무들과 헤어진 그는 그 기녀를 따라 그녀의 방으로 갔다. 안에는 등잔불 하나와 작은 술상 하나가 차려져 있어 초야의 분위기마저 풍기고 있었다.
‘초야는 무슨!’
괜히 빈정거리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때는 그것도 좋았다.
형을 질투하는 건 아니지만 부럽기는 했다.
아내와 아이.
이전엔 별로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그가 형이 혼인했던 나이가 되어서 그런지 마음이 헛헛해진 것 같았다.
방은 그리 꾸몄지만 기녀는 혼인 초야의 신부는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몸짓으로 그를 능숙하게 이끌었다. 기녀가 한 잔 더 따라 준 술이 달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술보다 여인의 품을 느끼고 싶었다.
만운은 그녀를 침상에 이끌고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호호, 아이, 장군님.”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저고리 안쪽으로 막 손을 넣으려는 그 순간, 문고리가 흔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드르륵, 벌컥.
“만운 무장님!”
그를 저 호칭으로 부르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온몸을 돌던 취기가 확 깬 만운이 벌떡 일어나 방을 쳐들어온 인영의 이름을 불렀다.
“담, 담영아, 네가 여긴 어떻게!”
그러나 담영은 대답도 않고 문지방에 버티고 서서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에 눈물을 매달고 있었다.
“만운 무장님이 어떻게, 나를 두고 만운 무장님이 어떻게 다른 여자와……. 으허어, 우아아앙!”
그러더니 아주 장하게 울음을 터트리는 것이다.
만운은 황망한 와중에도 담영이 저리 울자 걱정도 되고, 웅성웅성하는 밖의 기척에 이 기방까지 귀족 처녀를 들이는 미친놈이 누군지 울화가 치밀었다.
시집도 안 간 처녀가 기방에 오면 어쩌자는 건가.
“담영아, 네가 여기에 왜? 어떻게 온 거냐?”
담영은 그것이 추궁처럼만 들렸나 보다. 그 말에 도끼눈을 뜨더니 빽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온지가 중요해요? 왜 오다니요! 지금 내가 왜, 내가 왜 여기에 온 건데! 으흑, 언니들 말이 맞았어요, 남정네들이란 눈에 불을 켜고 지켜도 딴짓을 한다고. 그래도 설마 했는데……. 내 님만은 아닐 거라고……. 으흑, 으허엉!”
담영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그가 앉은 침상을 가리키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만운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사이 기녀는 저가 알아서 옷을 챙겨 입고 슬쩍 비켜서 있었다.
하긴 딱 보기에 기방에 남편을 찾으러 온 아낙네라.
이곳에선 그리 드문 일만도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그 현장에서 걸린 만운은 거의 제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담영의 통곡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웅성웅성.
“어디서 누가 이렇게 우나?”
“좀 잘해 보지, 낄낄.”
술 취한 뭇 사내의 희롱하는 소리가 방 안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담영을 더 이상 여기에 둘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일어나자 품이 다 헤쳐져 상반신의 맨살이 몽땅 드러난 걸 본 담영이 아예 기방을 통째로 뒤집어엎는다 싶을 만큼 큰 소리로 통곡하는 것이다.
“담영아, 제발 이러지 마라.”
“어흑, 내가……. 딸꾹! 내가 그토록 부족해요? 끄읍, 내가 그렇게 싫어요?”
그새 얼마나 목 놓아 울었는지 목과 코가 다 잠긴 담영은 딸꾹질까지 시작했다.
“담영아, 그게 아니라……. 너는 아직 어리지 않느냐?”
“흑, 내가 왜 어려요! 내 나이에 시집가는 애들이 딸꾹, 한둘인 줄 알아요! 흥, 내가 몇 살이 될 때까지 그 핑계를 댈 건데요? 난 다 컸다고요, 딸꾹! 볼래요?”
그러고는 담영이 주저앉은 자리에서 기세 좋게 일어나더니 갑자기 차려진 술상으로 돌진했다. 일순간 그것을 엎으려고 그러나 하고 봤더니, 담영이 그중 술병을 집어 들어 그대로 벌컥거리며 마시는 것이다.
“어, 어, 너 그거…….”
만운이 방금 마신 것은 딱 한 잔이었다. 그는 달게 마셨지만 그가 마시기에도 꽤나 독한 술이었다.
그것을 담영이 순식간에 다 들이켠 것이다.
“난 버써 이마안크음 커다구, 딸꾹.”
술을 병째로 마시고 한순간에 대취한 담영이 빈병을 휘두르며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그대로 꼬꾸라지며 쓰러지는 것이다.
만운은 그녀가 바닥에 쓰러지기 직전 간신히 붙잡을 수 있었다.
그날 어떻게 집으로 돌아온 건지 잘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그 순간 이후로 다시는 그 기방에 발을 들일 수 없다는 건 분명했다. 그 직전까지 교태를 부리며 유혹하던 기녀의 흥미롭다는 웃음을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벌게질 정도였다.
만운은 더 이상 집에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양광포에서 제일 처음 출발하는 배를 타고 줄행랑을 친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형의 경고가 가장 무서웠다.
“앞으로는 민 대감댁 말고는 더 이상 네 앞으로 들어오는 청혼서는 받지 않을 테니, 알아서 잘해라.”
거기까지 떠올린 만운은 두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우아악, 그 꼬맹이를 두고 날 보고 어쩌라고!”
“꼬맹이라니, 누구 말이오?”
허업, 정태천, 이 양반이 아직 옆에 있었다.
“혹시 윤 장군이 자주 입에 올리던 그 민 대감의…….”
“헉, 아닙니다! 아닙니다!”
기겁한 만운은 손사래까지 치며 펄쩍 뛰면서 일어나 다른 핑계를 주워섬겼다.
“요즘은 날씨가 좋지요? 그래도 해미도로 가기 전에 한 서기님, 아니, 한 부인께 여쭤 봐야겠습니다.”
“허허, 거참, 내 며늘아기도 몸을 푼 지 이제 얼마 안 됐다오. 그래서 아들 녀석이 특히 더 까탈스럽게 굴지도 모른다오.”
“앗, 그랬지요? 참, 요즘 손주 보시느라 입이 찢어지신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랬소? 허허.”
정태천은 손자 이야기로 만운이 화제를 돌리는 것을 모르는 척 넘어가 주며 웃었다.
한재영이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에 내려온 것을 맞은 이가 바로 정태천이었다. 그녀가 신변을 정리해 절로 들어가려는 것을 극구 말린 것도 바로 그였다. 그리고 왕의 심중을 깊이 헤아려 그녀를 왕의 충신과 혼인시켰다.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의 아들과 혼인시켜 며느리로 삼은 것이다.
그것이 벌써 삼 년 전이었다.
헌데 바로 한 달 전에 첫 아이를 볼 수 있었다.
덕분에 정태천은 모처럼 한백산 만년설 같은 아들 녀석의 웃음을 보기도 했다.
한데 아들은 만운을 싫어하지는 않으면서 그가 제 아내인 재영과 만나는 건 극도로 싫어했다.
설마 아들이 윤만운을 경계하는 것일까? 하지만 만운과 며느리 사이는 단순한 친분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아들이 왜 그리 경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들이 차긴 했지만 제 아내에 대한 속정은 유난히 깊었다.
아마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젊은 장군의 고민과 관심은 오로지 그 꼬맹이에게로 가 있는 것 같았다. 또 저토록 부인하는 걸 보면 한동안은 이 젊은 장수의 혼인 소식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에코, 그러면 내일이라도 슬슬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엉덩이를 너무 오래 붙이고 있다 보면 정 부장께서 싫어하시니까요.”
“어흠, 그렇진 않소.”
“하하, 농입니다. 제가 간다고 하는데 한 부인께서 말리지 않으면 날씨가 좋다는 것 아닙니까.”
날씨가 나쁘면 설마 그가 배를 타는 데 그냥 두겠느냐는 말이다.
재영은 이곳에서 군선이 출항하는 시기를 조절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덕분에 어민들도 안전하게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그렇겠지요.”
며느리의 능력을 아끼고 있는 정태천은 빙긋 미소만 지었다.
만운은 옛날 일이 생각나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렇게 또 신세를 지네요. 전하께서는 아직 한 서기님이 다시 도성에 오시기를 기다리십니다.”
“알고 있소. 그리고 아들 녀석도 전하의 곁에서 직접 보필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으니 언제고 갈 것이오. 기다리시오.”
“네, 고맙습니다.”
“고맙긴. 며느리를 붙잡으라 일러 준 것에 나도 감사하고 있다오. 무엇보다 내 아들이 행복해 하니.”
“정말 감사한 일이지요.”
만운으로서도 재영이 행복한 것은 기쁜 일이었다.
한만식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또 아직도 전하께서는 그녀의 재주를 안타까워하시고, 그로서도 형을 연모해서 결국 떠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여러 가지로 마음이 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자신의 짝을 찾고 아이까지 낳았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정태천은 며느리와 좋게 얽힌 인연이 있는 만운이 고맙고 대견했다. 또 무뚝뚝한 아들과 바꾸고 싶을 만큼 귀여운 구석도 있는 이가 만운이었다.
문득 짓궂은 생각이 든 정태천은 결국 만운이 돌리려던 화제를 다시 꺼내 들었다.
“허면 장군은 언제 그 행복을 맞을 것이오? 아직 꼬맹이라서 안 되는 것이오?”
“네에? 그, 그게 아니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만운을 보며 정태천은 시원하게 웃었다.
“아니라고요!”
만운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그리고 사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정태천은 만운의 혼인식에 참석해 혼사를 치르는 만운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라고 하기엔 꼬맹이 처자가 참으로 어여쁘구려.”
만운은 부인하지도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그리고 신방에 든 지 사흘 후 나오는 만운의 얼굴엔 헛헛함을 모두 날려 버린 행복한 신랑의 표정만 남아 있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