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장. 그 후 이야기
만운이 처음 해미도에 간 것은 도망갈 장소로 택했던 것이지만 결국 그것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얼마 후 그는 아비인 채운보다 더 자주 끼고 안고 다니던 염을 남겨 두고, 다시 그곳으로 떠나야 했던 것이다.
염이 겨우 백일.
만운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거 같은 제 친조카 염이를 두고는 갈 수 없다며 몰래 해미도까지 조카를 훔쳐 가려던 열혈 숙부였다.
덕분에 채운에게 붙들려 대련을 빙자한 ‘칼 타작’을 당했지만 이번엔 강희도 말려 주지 않았다. 한순간 없어진 아이 때문에 강희도 매우 놀랐던 것이다.
그래도 만운은 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미적거렸고, 결국 채운이 그를 쫓아내듯 보내 버렸다.
전체 크기가 도성의 반 정도인 해미도는 그중 반이 나라에 귀속되어 있고, 나머지 반이 원정에 공을 세운 공신들에게 나누어져 있었다.
헌데 공신들에게 분배된 반 정도가 바로 최사립 일파가 차지한 곳이었다. 몰락과 동시에 모든 재산이 몰수된 그들에게 해미도의 지분도 몰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해미도의 거의 사분의 일 정도 되는 영토가 주인도 없이 공중에 붕 뜬 상태가 된 것이다.
만운이 맡게 된 것은 바로 그 영토의 관리와 새로운 분배였다. 그 영토는 나라에 다시 귀속되는 것이 아닌 원정에 참여한 병사들의 몫으로 나눠 주기로 결정되었다.
참전한 병사가 한둘이 아니지만 이주해서 사는 이에게 가장 많은 몫의 땅이 주어졌고, 나머지 병사들에게도 일정 기간 소출이 주어지는 등의 이득이 돌아가게 되었다.
이익을 나눠야 할 이들의 수는 많고, 그에 따른 일들은 산재해 있었다.
만운이 일을 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새 직책과 사람들이 더 필요함을 알게 됐다.
이에 수왕은 해미도를 믿고 맡길 이는 만운밖에 없다며 그에게 새 관직을 만들어 제수했다. 덕분에 만운은 일 년에 반은 넘게 해미도에서 살아야 했고, 그렇게 시간이 흘렸다.
* * *
개경.
채운은 또래로 보이는 두 소년과 함께 넓은 연무장을 돌며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년들은 거센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하악, 하악!”
“하악!”
“자세를 바로 잡고 가슴을 내밀어라!”
채운의 호령에 어깨가 굽었던 소년들이 가슴을 반듯하게 펴며 고개를 들었다.
“호흡을 들이쉴 때는 코로, 내쉴 때는 입으로!”
“후윽!”
“헉, 헉!”
소년들의 숨소리는 거의 동시에 비슷하게 들리고 있었다.
“보폭이 너무 크다! 보폭은 가슴 넓이보다 적게, 발은 발뒤꿈치부터 전체가 바닥에 부드럽게 닿도록, 그리고 주먹은 가볍게 쥐어라!”
소년들의 보폭이 방금 전보다 조금 줄어들었다. 키가 거의 비슷한 소년들은 채운의 호령에 서로 보조를 맞춰 가며 달리는 속도도 비슷했다.
“팔은 계속 그 각도를 유지하고, 옆구리에서 가볍게 저어 주어라!”
채운의 말에 맞춰 소년들의 자세는 더욱 발라졌다.
이렇게 같이 뛰면서 자세를 교정해 주는 채운의 교육에 의해 소년들은 바른 자세를 몸에 익히고 배게 만들었다.
“좋아! 세 바퀴만 더 돌자. 그리고 한 식경 쉰 후 연무를 시작한다.”
“네!”
“네!”
소년들은 동시에 힘차게 대답하고, 뛰는 데 열중했다. 따가운 봄볕이 연무장에 내리쬐면서 소년들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하압!”
“하압!”
연무장을 달리던 두 소년이 이번에는 나란히 구령을 외치며 칼을 휘둘렀다. 그리고 옆에서 지켜보던 채운이 그중 한 아이의 자세를 고쳐 줬다.
“염아, 칼을 내리칠 때 어찌하라고 했지?”
“원하는 지점에서 끊어 치라고 했습니다.”
“그래. 그런데 지금 네가 내려치는 자세에서 칼끝이 많이 흔들리고 있다. 다시 그 부분에 집중해 보거라.”
“네, 아버지.”
“영한아, 지금 네 자세는 나무랄 데가 없다. 그렇게 더욱 정진하거라.”
“네, 고맙습니다, 대감마님.”
채운의 칭찬을 받은 영한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염은 칭찬을 받는 영한을 부럽게 쳐다보고는 다시 칼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공터엔 다시 소년들의 구령이 울려 퍼졌다.
채운은 소년들의 훈련을 지켜보며 자세를 바로잡고 다른 훈련도 번갈아 시켜 가며 약 한 시진가량 더 있었다.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 이제 몸을 풀고 마무리하거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대감마님!”
두 소년은 채운이 가르쳐 준 몸을 푸는 체조를 하며 마지막 구슬땀을 흘렸다.
그때 예닐곱 살 먹은 두 여자아이가 연무장을 배꼼 들여다보면서 차례로 제 오라비를 불렀다.
“오라버니, 엄마가 부르셔!”
“오빠, 우리 엄마도 오빠 부르셔!”
두 계집아이들은 채운을 보지 못했는지 멀리서 소리만 치고는 곧장 가 버렸다. 한창 노는 데 정신이 팔린지라 심부름만 얼른 하고 놀기 위해 달려간 것이다.
“영한이, 네가 먼저 가 봐라.”
“네, 그럼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영한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가고 나자 채운이 염을 번쩍 들어 안았다.
“앗, 아버지, 저 땀을 많이 흘려서 냄새 나요!”
“하하하, 내 아들 땀 냄새가 역할 리가 있겠느냐!”
채운은 환히 웃으며 염의 젖은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비볐다.
조금 버둥거리던 염이 민망한 듯 웃으며 아버지에게 얌전히 안겼다.
“아까는 영한이만 칭찬해 줘서 서운했느냐?”
“그럴 리가요, 아버지.”
그런 염이가 더욱 대견해서 채운은 아들의 젖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너도 오늘 잘했다. 영한이는 너보다 한 살 더 많아서 아직 너보다 잘하는 점이 많단다. 하지만 내 눈엔 내 아들이 참 잘나 보이는구나. 그런데 영한이 앞에서 팔불출처럼 네 칭찬은 못하겠고, 참느라 혼났다. 그래서 인색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니 서운하더라도 조금 참거라.”
“아버지!”
염의 얼굴이 아까 영한이 채운의 칭찬에 변했던 것보다 더 발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제 아비의 칭찬이 기분 좋은지 입가에 엷은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자, 네 어머니가 왜 부르시는지 가 볼까?”
“네. 헌데 저 이만 내려 주시면…….”
그대로 저를 안고 연무장을 나가려는 아버지의 품에서 염이는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채운은 염이 왜 그러는지를 아는지라 짐짓 짓궂은 표정을 하고 되물었다.
“왜, 진이 보고 또 울까 봐?”
“저 그게……. 네.”
얼마 전, 채운의 막내인 진이 어머니께 안겨 있는 형을 보고 통곡을 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막내의 그런 모습마저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염이가 그걸 여태껏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어찌 내 어린 시절과 이리 똑같느냐…….’
그러니 뭐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샘이 많은 막내의 버릇을 고쳐 줄 길은 딱 하나였다.
저도 동생이 생겨 봐야 알겠지. 그리고 막내는 딸인 게 더 좋지 않을까.
채운은 속으로 그런 흐뭇한 상상을 하면서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도 이제 호근의 도움 없이 머리끈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새로 산 머리끈을 내밀며 유혹한다면 그녀도 넘어갈 수밖에 없으리라.
“하하하, 그래, 그만 가자.”
채운이 염을 내려 주고 연무장을 나섰다.
아버지의 큰 손에 꽉 잡힌 제 손을 보며 염의 얼굴엔 방금 전의 웃음이 더 진해지고 있었다.
“이번엔 언제 오세요?”
담영이 이제 당연한 듯 제집처럼 차지하고 앉은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며 만운의 귀환 날짜를 물었다.
해미도가 바로 이웃도 아니건만 그녀가 묻는 어조는 만운이 간 곳이 옆 동네나 되는 것같이 말하고 있었다. 그만큼 만운이 개경과 해미도를 왔다 갔다 한 시간이 길고, 또 자주 있어 왔던 것이다.
“어제 남부 도사의 전갈을 받았으니 사흘 안에 오실 거야.”
강희의 대답에 샐쭉 웃는 담영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찌 보면 그것은 사냥감을 노리는 매의 눈빛과도 같아서 만운이 만약 저것을 보았다면 몸 전체에 오소소 돋는 소름에 얼어붙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수줍어하셨으면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아직까지 버티시다니, 참 용감하셨어요.”
“용감?”
“네, 용감이요. 이제 졌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저항하셨으니까요.”
주어가 빠져도 담영이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모를 사람이 누가 있으랴.
강희는 담영이 말한 우스운 표현에 입가를 누르고 호호 하고 웃었다. 그리고 그러느라 그녀의 마지막 말의 어감이 기묘하다는 걸 아직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려국 최고 귀부인의 내실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척 던져 놓고 담영은 혀로 입가에 묻지도 않은 과자 조각을 핥았다.
강희는 그런 담영을 격세지감을 느끼며 바라보았다.
‘저런 모습을 보면 요염하기까지 한데, 도련님의 눈에는 아직도 담영 아가씨가 열 살의 어린아이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야.’
어린 시절 사탕에 반해 만운의 부재에도 그냥 넘어가 주고는 했던 담영은 이제 꽃이 피듯 활짝 핀 스무 살의 처녀가 되었다. 귀염성 있게 통통하던 볼살이 빠지며, 성숙한 여인의 태가 언뜻언뜻 보였고, 훌쩍 자란 키는 강희보다 한 뼘은 더 커서 그녀를 내려다볼 정도로 자랐다.
그것이 또 강희의 눈에는 키와 덩치가 큰 만운과 꼭 맞아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얘기하자면 참 오래도록 용감하셨지, 우리 도련님은.”
하긴 이만하면 도련님도 굴복할 때가 되었다. 그만한 세월에 혼인도 않고 있으면서 가까이 하는 여인은 사실 담영뿐 아니었던가. 그리고 도련님이 사실 담영을 속 깊이 아낀다는 것을 모두들 잘 알고 있었다.
“호호, 그래서 제가 더 좋아하는 것 아니겠어요?”
방긋 웃는 담영에게서는 만운에 대한 제 감정을 서슴없이 고백하는 당돌한 여인네의 자신감이 엿보였다.
이 집에 담영의 감정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녀의 고백을 듣지 않은 사람도 없었다. 그녀의 나이가 들수록 좋다는 고백은 점점 더 깊어져 어떨 때는 저돌적으로, 어떨 때는 맹렬하게 다른 식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그럼 이번엔 어떻게 할 건데?”
“어, 그게…….”
“응?”
대답을 조금 망설이는 담영을 보니 필시 또 무언가 일을 벌인 것이 틀림없었다. 웬만한 건은 다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담영이 머뭇거리는 걸 본 강희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디 사 년 전의 그 일보다 더 큰일이야 벌였겠는가.
담영이 한참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음, 사실은 아버지께 정식으로 청혼서를 써 달라고 하였어요. 아버지도 써 주시겠다고 허락하셨고요. 아마 내일쯤이면 대감께 청혼서가 올 거예요.”
“뭐어?”
역시 사고는 사고였다. 강희는 그 말에 정말 놀라고 말았다.
“헤, 헤.”
‘민영회 대감이 청혼서를 쓰는 걸 허락하다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강희는 이 커다란 사건의 배경이 더 궁금해지고 있었다.
담영이 종경에서 그 많은 수행원들 앞에서 만운의 볼에 입을 맞춘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담영이 여태 만운 도련님이 좋다고 따라다니며 한 일은 세월만큼이나 참으로 셀 수도 없는 많은 사건들을 만들었다.
‘청혼서라…….’
그 셀 수 없는 수많은 시도 중에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담영이다.
헌데 남의 손, 아니, 아버지긴 하지만 제 딴엔 반칙이라고 느끼는지 단호하게 거부하던 어른의 힘을 빌려 청혼을 할 줄이야. 강희는 정말 몰랐다.
이런 심각하고 되돌리기 힘든 일을 벌이다니, 지난번 도련님이 왔던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강희는 그 일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궁금해졌다.
‘담영이가 저리 은밀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면……. 호호, 도련님, 이번엔 정말 빠져나가기 어려우실 거 같은데요?’
강희는 해미도에서 개경으로 올라오고 있을 만운에게 속으로 위로의 뜻을 전했다.
담영은 혼사가 결정되는 것을 확신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지난번 만운 도련님은 혼비백산한 얼굴로 달아나듯 떠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만운도 이젠 달아날 곳을 잃었다. 저 상태로라면 그가 이번에 돌아오면 해미도에 다시 갈 일은 없게 될 것이다.
해미도는 이제 려국과 서쪽 국가들과의 중간 기착지로서 완전히 정착되었다. 처음 만운이 그 섬에 가야 하는 이유가 되었던 땅의 분배 문제도 잘 끝났고, 이주민들과 구마도에 맞는 새 제도도 완전히 정착됐다.
만운은 무려 십 년의 세월 동안 그 먼 곳을 오가며 제 소임을 다했다. 그리고 이번에 새 관리를 파견함으로써 완전히 귀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한 강희가 담영에게 슬쩍 물었다. 제 딴엔 입을 다문다고 하고 있지만 그녀가 오래 입을 다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난번 도련님이 오셨을 때 진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자신하는 거야?”
‘청혼서도 보낸다고 하고?’라는 질문이 뒤에 생략되어 있었다.
“그거요? 그건……. 호호, 그건 비밀이에요.”
이야기해 줄 듯 몇 번이고 입을 달싹이던 담영은 마지막에 가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만운과 있었던 일은 시시콜콜 숨기지 않고 다 말해 주던 그녀가 웃기만 하고 말하지 않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강희는 내심 궁금했지만 더 묻지는 않기로 했다. 담영이라면 당장은 은밀한 척 굴더라도 언제고 제 입으로 말해 주고 싶어 안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련님도 조금쯤은 개인적인 사정을 가져야 할 나이도 되지 않았는가.
‘사 년 전 같은 큰 사건만 아니면 되지. 뭐, 걱정할 거 없겠지.’
담영과 만운 사이에 있었던 일 중에 사 년 전이 최고로 큰 사건이었고, 그때의 일은 여러모로 최악의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만운이 기방에 간 것을 어찌 알고 담영이 그곳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기녀의 옷고름을 푸는 장면을 담영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그날 담영은 만운을 붙잡고 울고불고 통곡을 하다 그 방에 있던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 기절하고 말았다.
그때 함께 있던 기녀의 입은 어찌어찌 다물게 했지만 만운이 있던 방에서 울리던 통곡 소리에 대한 소문은 얼버무리기 힘들었다. 때문에 만운은 한동안 온갖 입소문에 휩싸이게 되었고, 그 후 다시 그 기방에 갈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사건은 두 집안을 모두 경악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담영의 나이에 혼인하는 경우도 있는 만큼 더 이상 어리다고 할 수 없는 담영이 저지른 일이기에 더욱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 양쪽 집안사람들은 담영의 마음을 더 이상 철없는 동경이라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만운이 그때까지 미혼이었기 때문에 진지하게 그녀를 만운의 짝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헌데 정작 당사자인 만운이 그 사건 이후 담영을 더욱 피하고 있었다. 그의 눈엔 담영이 도통 열 살의 그 나이에서 자라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그녀가 꽃처럼 피고 여러 총각들의 마음을 흔드는 처녀가 되었어도 만운에게 담영은 여전히 우물가의 귀여운 소녀일 뿐이었다. 달랑 업어 들고 뛰던, 제 등에서 소피가 마려우니 내려 달라 떼를 쓰던 그 소녀.
만운은 피하고, 담영은 그런 그를 쫓는 시간들.
어영부영 그런 세월을 보낸 것이 벌써 사 년이었다.
아마 이 사태가 된 가장 큰 문제는 만운이 이때까지도 혼인을 하지 않은 것 때문일 것이다.
만운은 왕에게 가장 신임 받는 신하이자 왕의 벗인 윤채운 대감을 형으로 두고 있었고, 그 자신도 황금알을 낳는 기착지로 나라의 요지 해미도를 맡을 만큼 왕의 신임을 두텁게 받는 인물이었다.
헌데 어떤 유력 가문들이 혼담을 넣어도 만운은 딱히 마음이 가는 혼처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 말로는 그저 마음이 안 가서라는데, 어떤 이는 그가 담영이 자라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만운이 들었으면 펄쩍 뛰었을 일이지만 어찌 보면 공감이 가는 말이기도 했다.
아무튼 채운은 담영의 사건 이후 더 이상 다른 가문에서 넣은 청혼서를 아예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그런데 담영의 집에서 내일 청혼서를 보낸다는 걸 보니, 이번엔 일이 확실히 성사될 모양이었다.
“어? 숙모…….”
낮잠을 자다 깨어난 막내아들이 강희를 찾으러 왔다가 담영을 보고는 반색하며 안겨 들었다. 그런데 아들이 담영을 부르는 낯선 호칭에 강희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응? 진아, 너 방금 뭐라고 했니?”
“헤헤, 엄마.”
진은 대답 대신 담영에게서 벗어나 강희의 품에 파고들어 안기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담영이 그 질문에 대신 답해 주었다.
“제가 가르쳐 준 거예요. 앞으론 숙모라고 부르라고요.”
“뭐? 벌써?”
“호호호.”
웃음소리만 들어도 담영의 기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벌써냐고 묻긴 했지만 아이들은 이제 곧 그녀를 누나나 언니 대신 숙모라 불러야 할 것 같았다. 그것도 곧.
* * *
담영이 강희의 내실에서 그렇게 웃음을 흘릴 시각, 집으로 돌아오고 있던 만운의 등 뒤에는 소름이 훑어 내려가고 있었다.
‘어으, 이 느낌은? 담영이구나. 담영이 고것이 내 이야기를 하는 게지.’
이 소름은 그가 십 년간 적게도 많게도 겪어 오던 것이었으니 원인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오랜 세월 부정하고 저항하려 했지만 그것도 이제 끝났다. 이번에 돌아가면 아마 곧바로 혼인을 하게 될 것이다.
‘하하, 그 꼬맹이와 혼인이라…….’
피할 때는 언제고 담영을 떠올리는 만운의 입가에는 바보 같은 웃음이 피어 있었다.
헌데 담영이는 과연 약속대로 청혼서를 보낼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까? 벌써 양가 어른들이 날을 잡고 있는 건 아니겠지?
모든 걸 수용하고 받아들이자 등 뒤에 돋았던 소름은 짜릿한 전율로 바뀌는 것 같았다.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해 준 염이에게 감사해야 되는 건가?’
만운은 등 뒤의 소름이 걷히자 다시 녀석, 아니, 담영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며 웃음을 흘렸다.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 * *
만운이 집에 도착했을 때, 그를 가장 처음 맞은 사람은 바로 진과 영한이었다.
영한은 길석과 수란의 아들로 올해 열한 살이었다. 그리고 염과 함께 훈련을 받는 동무이자 경쟁자이며, 염의 사람이 될 아이였다.
“숙부우!”
만운을 부르며 달려간 진은 그의 품에 덥석 안겼다.
다른 조카들도 그렇지만 이 녀석은 얼마나 귀여운지 이맘때의 염을 다시 생각나게 했다.
‘염이도 이 녀석만 할 때가 있었는데, 요즘은……, 휴우.’
이제 겨우 열 살인 염은 이제 전처럼 귀엽지가 않았다. 그가 담영에게 결국 무릎을 꿇은 이유도 바로 염이 때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설마 그것까지 알려진 건 아니겠지?’
만약 그 일이 알려졌다면 벌써 단자사주 또는 후보자의 명단 따위를 적은 종이가 오가고, 날도 잡혀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담영에게 그것만 입 다물고 있으면 직접 청혼서를 넣겠다고 했으니, 이번에는 그녀도 비밀을 지켜 줄지도 몰랐다.
그러나 문제는 ‘줄지도’라는 것.
‘염이 녀석이야…….’
자존심 강한 그 녀석이 제 입으로 그걸 말할 리도 없고, 숙부가 온 것도 보고 싶어 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꼬마는 그를 엄청 반겼다.
“숙부, 왜 이제 왔어요?”
“오, 이 숙부를 기다린 거야? 숙부를 보니 좋아?”
“네! 좋아요!”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귀를 쟁쟁하게 울렸지만 이런 말은 언제라도 들어 줄 수 있었다.
“나도 좋다, 우리 진이. 그런데 숙부가 이젠 가지 않을 거야. 그러니 우리 진이도 오늘부터는 매일매일 숙부를 볼 수 있어.”
“정말요?”
“그럼!”
“와아!”
몇 달 새 갑자기 말이 늘은 진이에게 또박또박 말을 시키는 것도 꽤 재미있었다. 진은 염이랑 다 똑같은 수순으로 크고 있는 녀석이지만 그래도 손위 형제들이 있어서 그런지 제 형보다 말이 조금 더 빨랐다.
“누이들은 어디 가고, 여기 있니?”
“누이…… 들은 그네 타고 놀아요.”
제 누나들을 어디서 봤는지 잠시 생각하던 진이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역시나 놀랍지 않은 대답이었다.
누가 형수 딸들이 아니랄까 봐 또 그네에서 사는 모양이었다. 날씨도 좋으니 아마 그곳에서 자기도 하고, 해가 저물어야 들어갈 생각을 할 것이다.
형 내외는 만운이 농담처럼 말했던 만큼 아이를 낳았다. 덕분에 이 집안엔 윤씨 성을 가진 남자아이 둘과 여자아이 둘이 있었다.
“넌 안 타고?”
“으음.”
고개를 저은 진은 영한 쪽을 보고 있었다. 누나들과 노는 것보다 영한과 노는 게 더 재미있다는 뜻이었다.
“네가 수고가 많구나. 고맙다.”
저 놀기도 바쁠 나이에 아기인 진을 돌보느라 시간을 뺏기는 아이였다. 그것이 의무도 아닌 호의로 하는 일이라 더 고맙기만 했다.
“별말씀을요. 그보다 먼저 장군의 완전한 귀환을 감축드립니다.”
“저런, 고맙긴 하다만. 너는 어째 말하는 투도 점점 염이를 닮아 가느냐?”
“제가 모시는 주인이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애늙은이 녀석.”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만운의 손은 영한의 머리를 부드럽게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그의 손 아래에서 영한은 웃고 있었다.
영한은 길석이 남기고 간 분신이기에 강희는 그를 대신하듯 신경을 쓰고 있었다. 덕분에 아이는 염과 같이 교육받고, 채운에게 직접 훈련받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수란이 그동안 재혼을 해서 아래로 두 명의 동생이 더 있는 영한의 얼굴에는 한 점 그늘이 없었다. 길석도 이 이상을 바라지는 못할 것이다.
만운은 영한에게 제 맏조카를 찾았다.
“염이는 어디 있느냐?”
“방금 전에 연무장에 계신 걸 보고 왔습니다.”
“그럼 녀석도 저녁이 되기 전에 보기는 글렀군. 형수님이나 뵈러 가야겠다.”
“엄마요?”
만운의 말을 알아들은 진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진은 이렇게 잘 놀다가도 제 엄마와 관계된 말이면 뭐든 크게 반응하고 보는 것이다.
“그래, 엄마 보러 가자.”
“와아!”
염이는 이 나이에 벌써 동생을 둔 오빠라서 그런지 의젓했지만 진은 확실히 비교되었다.
그러고 보면 염과 진은 자신과 형과의 사이와도 비슷했다. 나이 차도 비슷하게 많이 났고, 중간에 누이가 있는 것이 그랬다. 그리고 엄청나게 사랑받는 것도.
“진은 내가 데려갈 테니 넌 이제 놀아라.”
“네.”
영한이 씩 웃으며 달려갔다. 가는 방향이 뒤뜰 쪽인 걸 보면 염에게로 달려가는 것이리라. 그리고 노는 것이 아닌 수련을 하러 가는 길일 테고.
고개를 저은 만운은 진을 안고 안채로 들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형수님, 저 왔습니다! 만운이 왔어요!”
“만운이 와써요!”
진이 그의 말을 따라 하며 소리치자 강희가 활짝 웃으며 뛰어나왔다.
“도련님, 오셨어요? 진, 그런 말은 따라 하는 것 아니야!”
“뭐가요?”
갸웃하는 진의 앙증맞은 모습은 어른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강희가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타일렀다.
“숙부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거 아니라고.”
“아아, 네에!”
알고서 대답하는 건지 모르고 그냥 대답만 하는 것인지 진은 네, 하고 답은 열심히 하고는 다시 제 엄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운이 그런 진을 말렸다.
“녀석, 또 엄마한테 안기려고? 이젠 안 된다고 했지.”
“왜요오……. 왜요?”
“엄마가 힘드셔서 그래.”
“네? 엄마가 왜 힘들어요?”
“넌 이제 아기가 아니라서 그래. 그리고 엄마가 뱃속에 네 동생을 데리고 있어서 널 안아 주시면 힘들어.”
“동생이요?”
“그래, 동생.”
진의 물음에 만운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맞다고 대꾸했다.
아들과 시동생의 대화를 듣던 강희가 도리어 놀라 물었다. 멀리 계신 도련님이 자신이 아이를 가진 것을 어떻게 아는 걸까.
“도련님, 알고 계셨어요?”
“하하하, 제가 몸은 해미도에 있어도 집안일에 대해선 모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축하드립니다, 형수님.”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해미도에 있을 때 한 달에 두어 번 받는 서신은 담영이 제 일상을 적은 서신들로, 그런 서신들이 한 달에 몇 번 수십 장씩 묶여서 섬에 들어오곤 했다. 그 서신을 통해 만운은 집안의 사소한 일부터 시작해 도성에서 뭐가 유행하는지, 무슨 일이 있는지까지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요즘 점점 더 제 집에서 있었던 일들보다 이 집안의 일들이 소상하게 적혀 오는 걸 보면 담영, 그녀가 주로 살다시피 하는 곳이 어딘지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감사해요. 그런데 도련님, 혹시 청혼서가 온 것도 알고 계세요?”
“네?”
이게 무슨 말인가.
“엊그제 민 대감의 집에서 청혼서가 온 것을 서방님이 받아 두셨어요.”
“엊그제요?”
“네.”
순간 멍한 머릿속에 사실이 입력되고 이해되기까지 잠시 시간이 흘렀다. 결국 담영이 일을 저지른 걸 알게 된 만운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결국 그새를 못 참고……, 으으!”
붉어진 만운의 얼굴은 부글부글 끓는 듯 보였다.
지켜보던 강희는 웃음을 감추느라 고개를 돌리고 입을 가렸다. 그러다 어쩔 줄 모르는 만운에게 슬며시 물었다.
“그 청혼, 이번엔 받아들이실 거죠?”
“그게……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제가 청혼서를 보내기로……. 으아, 담영이 너!”
그러고는 진을 내려놓은 만운이 목례만 가볍게 하고서 서둘러 뛰어나갔다. 그리고 그가 나가려는 문으로 들어서려던 담영과 부딪히는 게 보였다.
“너, 잘 만났다! 잠깐 이리 와 봐.”
“어, 왔어요? 왜 그래요?”
만운이 그녀를 데리고 다시 밖으로 나가고, 잠시 후 무슨 대화인지 알 수 없는 소리들이 들렸다.
“……!”
“……!”
“헉, 저, 저런!”
“꺄악, 담영 아가씨가 드디어 성공했나 봐!”
나중에 하인들에게 듣기로 만운이 담영을 붙들고 뭐라뭐라 야단을 치려고 하는 순간, 자신의 입으로 그의 입을 막은 담영 때문에 그가 또 얼어붙었다고 했다.
강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웃음만 흘렸다.
이후 혼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두 사람이 이제 청혼서가 오가고 혼사를 치른다 알렸지만 남들은 이 둘이 혼인하는 것에 아무도 놀라지도 않고 있었다. 만운이 귀환한 것은 여름 말이었는데, 한 달도 지나지 않은 가을 초입에 혼인한다고 해도 모두들 당연하게 여기기까지 했다.
만운과 담영의 혼인식은 왕의 주재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왕으로서는 충신인 가문 간의 결합을 축복하고, 동생 같은 만운의 혼사를 반겼기에 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왕 이하 많은 이의 축복과 부러움을 사게 된 혼례였다.
* * *
만운이 극구 감추려 했던 비밀은 그리 오래갈 수가 없었다. 비밀이 없는 담영 때문에 강희는 나중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에 자신의 아들인 염이 끼어 있다는 것을 알고 강희는 놀라고 황당해 했다.
만운이 결국 마음을 돌린 이유가 염이라니.
그러나 생각해 보면 염의 발언이 참으로 위협적이었다.
발단은 만운이 마지막으로 해미도로 떠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가 염과 했던 대화가 참으로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그때도 만운을 해미도에 다시 보내기 싫었던 담영이 대련을 빙자하여 그를 계속 붙들고 있는 중이었다.
담영이 만운과 가까워지고 최대한 오래 같이 있을 수 있는 방법으로 택한 것이 무예 수련이었는데, 그것은 실제로 그녀와 만운이 어울려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대가댁 처녀가 일반 병사들보다도 더 과한 훈련을 하는 것은 극구 말릴 일이었지만, 담영의 부모는 사 년 전의 사건 이후 오히려 그녀를 만운에게 아주 맡기고, 그의 재량대로 다루라고 허락을 내려 버렸다. 이에 담영은 만세를 부르며 환영했고, 만운은 마지못해 그녀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만운도 훈련에 있어서는 엄격했다.
그날 만운은 유독 기를 쓰고 달려드는 담영을 봐주지 않고 몰아붙여 완전히 꺾어 버린 후 냉정하게 쫓아 버리고 말았다. 결국 담영은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집에 가야 했다.
그런데 담영을 보내고 돌아서던 그에게 염이 오더니 진지하게 말을 꺼내는 것이다.
“숙부, 숙부는 담영 누나가 싫은 거지요?”
“뭐? ……그건 아니다. 싫은 건 아냐.”
“그럼 누나와 혼인하기 싫은 거지요, 절대로?”
“뭐, 그렇긴 하다만 절대로까지는…….”
염은 만운이 흐리는 뒷말은 무시했다. 그리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선언했다.
“숙부, 제가 누나와 혼인할게요. 저는 누나와 혼인하고 싶어요.”
“뭐?”
어린 녀석이 혼인이 대체 뭔지는 알고서 하는 소리인지. 너무나 황당했던 만운은 어이가 없어 맥없이 반문할 뿐이었다.
“저는 담영 누나가 좋아요.”
귀여운 조카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고 싶었지만 염은 누굴 닮았는지 매사에 너무 진지한 아이였다. 그리고 저 눈은 결코 농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만운은 어이가 없었지만 정색하고 물었다.
“말도 안 돼! 담영이 너보다 열 살은 더 많거든?”
“숙부도 담영 누나보다 열 살이 더 많으시잖아요. 숙부랑은 되는데, 저는 왜 안 되겠어요?”
“뭐야?”
만운은 일순 말문이 탁 막혔다가 겨우 숨을 토해 냈다.
“그보다 네가 아직 열 살이라는 게 더 문제라는 걸 몰라?”
“저는 앞으로 계속 자랄 거예요. 그래서 담영 누나한테 육 년만 기다려 달라고 할 생각이에요. 육 년 뒤면 저는 혼사를 치를 수 있는 나이가 되고, 담영 누나도 그럭저럭 혼기를 놓치기 전이니 가능할 거예요.”
시종일관 진지한 염이다.
“너 그게 무슨?”
만운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코웃음을 치려는 그때, 담영의 대답이 들려왔다.
집으로 쫓겨 간 줄 알았던 담영이 되돌아왔던 것이다.
그가 집을 떠나는 모습이라도 보고자 모진 대련에 온통 쑤시는 몸에도 되돌아왔던 그녀는 염이의 육 년이란 말에 저도 모르게 참견하고 말았다.
“어머나, 염이 도련님이 그런 생각이라니, 고마우셔라. 하긴 십 년을 기다렸는데, 육 년 정도 더 기다리는 것쯤이야 할 수 있지.”
농처럼 말하는 담영이었지만 앞으로 육 년을 더 기다릴 수 있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염이 말한 육 년 뒤, 열여섯 살이란 나이는 공교롭게도 그녀가 그를 정말 남자로, 배필로 인식하고 모종의 사건을 벌였던 그 나이였다.
그 도전적인 눈빛을 보던 만운은 결국 염에게 소리치고 말았다.
“염아, 숙모 될 여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순간 정적이 흐른 것 같았다. 다음 순간 그의 말을 먼저 알아들은 담영이 폴짝 뛰어오르며 그에게 매달렸다.
“정말요? 정말요? 정말요?”
만운은 제가 무슨 말을 한 건지 그야말로 정신이 멍해져 있었다. 하지만 팔에 매달린 무게감이 제 말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슬쩍 팔을 둘러 감싸 안으며 더욱 찰싹 달라붙는 담영과 그런 그녀를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보다 달아나는 염이 사이에서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었다.
그 후 담영에게는 이번에 해미도에 다시 갔다가 돌아오면 그가 청혼서를 보내겠노라고, 이 일은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단단히 주의를 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이 비밀은 혼인을 치른 지 불과 사흘 만에 알려지고 말았다. 혼인 전까지는 어찌어찌 지켜졌던 비밀이 혼인을 치르자마자.
혼인 후 사흘이 지나서 알려진 이유가 뭐냐고?
그들이 신방에 들고 나서 담영이 신방에 갇혀 있었던 시간이 사흘이었다. 사흘 만에 신방에서 풀려난 담영이 강희에게 냉큼 그 사실을 고한 것이다.
강희는 이야기의 전말을 다 듣고는 아직도 불퉁한 아들이 귀여워서 한 번 더 소리 내어 웃었다.
* * *
혼사를 치른 만운은 매일 바보처럼 웃고 다녔다.
이전의 만운이 발랄하고 쾌활해 보였다면 지금은 그냥 바보였다. 그럴 거면서 왜 십 년, 아니, 사 년이나 버틴 것인지 다들 따져 물었지만 그래도 그의 바보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혼인하고 얼마 후.
수왕이 바보 만운에게 물었다.
예전에 제 형수가 해 준 거라며 수를 놓은 토시 등을 자랑하고 다니면서 나중에 제가 색시를 얻으면 더 예쁘게 해 달랄 거라고 노래를 했던 것을 왕이 기억해 낸 것이다.
“자네가 혼인하면 아내의 수 솜씨를 자랑하겠다고 벼르더니, 왜 아직도 보여 주지 않는가?”
왕의 말에 만운은 그제야 그것이 생각난 듯 아차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 길로 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그는 왕에게 감히 아내의 것을 자랑하지 않았다.
이젠 만운도 열아홉 어린 장수가 아니지, 서른이나 된 경험 많은 장수라 그런 짓은 않는가 보다 납득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만운은 자랑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한 것이다.
왕의 말을 듣고 벼르던 것이 생각난 만운은 그날 당장 담영에게 제 침의에 새로 수를 놓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이나 지난 후 열 손가락 빼곡히 바늘에 두세 번씩은 찔린 손으로 담영이 피가 묻은 침의를 선물했다.
담영은 혼인 후에도 여전히 그와 대련을 하는 여인이었다. 한 달도 안 되어 부엌에 온갖 접시들을 종류별로 다 깨는 전적을 남긴 담영이 이전에 바늘을 손에 쥐어 봤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만운의 청을 받자 거의 사생결단의 각오로 침의에 매달렸다.
만운은 그 침의를 이전처럼 형에게 자랑하지 못했다. 하지만 손가락 전체에 붕대를 감은 담영이 삐뚤빼뚤한 모양으로 제 이름 자를 새겨 자랑스레 내민 그것을 가장 좋아하며, 또 즐겨 입었다.
그해가 가기 전.
윤씨 형제의 집에 새 식구가 는다는 소식이 다시 전해졌다. 강희의 뱃속에 있는 아이와 동갑으로 태어날 아이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그리고 두 형제는 앞마당에 그네를 하나 더 만들어 달았다.
* * *
임술년 초, 아직 새싹이 움트기 전의 겨울.
강희는 칭얼거리는 막내에게 젖을 먹이고 다시 잠자리로 돌아왔다. 그녀가 이불 속에 들어가자 바로 그녀를 감싸는 따뜻한 팔이 차가운 강희의 몸에 온기를 전해 주었다.
“강희…….”
미처 잠이 덜 깬 채운이 잠꼬대처럼 그녀를 부르는 소리였다. 강희는 그의 입술에 ‘네, 서방님’ 하고 답하고는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강희는 꿈을 꾸었다.
그녀는 이전의 그 꿈에서 마지막을 맞았던 나무를 다시 보고 있었다.
헌데 그 나무의 모습이 그때와는 많이 달랐다. 꽃이 피는 나무였는지 흐드러지게 핀 하얀 꽃들이 넘실거리며 그녀에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강희는 꽃비를 맞으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나무 위에서 꽃비를 내려 주는 이가 바로 채운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