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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빛나는 웃음 (35/38)

35. 빛나는 웃음

“어제 래연이 청혼을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호근이 겨울에 접어들기 직전 반가운 소식을 전해 왔다.

호근은 채운과 강희의 이전 집인 서궁 근처에 의방을 차렸기 때문에 생각보다 자주 볼 수 없었다. 헌데 오랜만에 찾아온 그가 기다리던 반가운 소식을 전한 것이다.

최사립을 시작으로 궁에서 분 피바람의 돌풍은 려국 전토에 거세게 몰아쳤다. 최씨 일가와 그들과 공생하던 이들에게까지 분 겨울바람에 한동안 형장의 흙이 그들의 피로 마르지 않을 정도였다.

허나 백성들은 그 무서운 혈풍을 두려워하기는커녕 두 손을 들고 만세를 외치며 반겼다.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핍박하며, 송국에 신하국을 자처하여 공물을 늘리던 이들이 스러진 일이니, 앞으로는 태평성대를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만식은 죽음과 함께 죄는 완전히 묻히고, 영웅으로 기록되었다. 그의 비틀린 증오가 자신의 핏줄에게로 향한 것은 참으로 애석한 비극을 낳았지만 마지막에는 충신으로 죽었다. 해서 한만식에게 있었던 일은 비사로만 남게 되었다.

다만 재영은 오라비인 한만식의 죄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궁에 있지 못하고 조용히 떠나는 것을 택했다.

왕비는 채운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린 그녀가 오롯이 왕의 힘이 되어 주길 바랐지만 재영의 결심을 바꿀 수 없었다.

“전하께서는 한 서기의 재주를 아끼신다오. 그대의 오라버니도 공을 세우고 그리 가지 않았소? 그래도 정녕 떠나야 하오?”

“소녀를 어여삐 여겨 주신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소녀는 반역자 집안이라는 오명을 쓰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황감하며 망극하옵니다. 오라버니의 일은…… 오라버니의 잘못이 아닙니다. 바로 저의 욕심이 그 사태를 부른 것입니다.”

“한 서기…….”

그게 어찌 욕심이겠는가.

재영이 원정에 뛰어든 때부터 그녀는 이미 훌륭한 신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똑똑한 그녀도 형제의 미움을 조절할 수는 없었고, 연모하는 상대를 잘못 택하는 오류를 범했다. 외적으로는 나라에 크게 공을 세운 이였으나 내적으로는 가련한 한 명의 여인인 것이다.

“어머니께서도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잃은 이곳 도성에서는 더 살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어머니는 유독 추위에 약하신 분이라 이참에 따뜻한 남쪽으로 떠나려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안정되시면 저는 사찰에 들어가 할 일을 찾아볼 계획입니다.”

왕비는 더 이상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재영의 재주를 알게 된 윗대 종친들은 그녀를 차비로 들여 재주를 쓸 길을 열어 줄 수도 있다고 했지만 그건 피차 서로를 불행으로 이끌 일이었다. 왕비는 그런 말로 그녀를 더 힘들게 하기보다 놓아주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재영은 왕비의 배웅만 받은 채 어느 날 조용히 떠나고 말았다. 강희가 꿈을 꾸고 돌아온 순간부터 가장 두려운 상대였던 재영의 조용한 퇴장이었다.

최사립이라는 거대한 권력과 최씨 가문의 몰락으로 안 그래도 엄청난 일거리가 밀려드는 이때, 재영의 부재는 왕의 업무를 잠시 멈출 정도의 파급력이 있었다. 황급히 재원을 요구하게 되었지만, 또 자리가 비면 비는 대로 몇 사람이 그녀의 자리를 채우고 일하게 되었다.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또 별안간 사라진 재영은 궁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 갔다.

* * *

호근도 최씨 가문의 몰락에 기뻐하던 이들 중 하나였다.

그는 만운의 노력 덕에 래연을 찾을 수 있었지만 힘들게 찾은 래연은 그를 피했다.

삼 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당한 고통에 그녀의 정신이 매우 피폐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호근과의 재회를 반기지도, 그를 다시 만나지도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밀어낸다고 쉽게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호근이 이 땅에 돌아온 이유가 바로 래연을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진정한 삶을 가꾸기 위해서였으니 미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그녀가 그의 옆에 있어야 했다.

그날부터 호근의 끈질긴 노력이 시작됐다. 그는 송국에서 좋은 본보기를 두고 바로 옆에서 지켜본 산증인이었다. 엄숙하고 딱딱한 장군의 모습 말고는 다른 모습은 없을 줄 알았던 채운도 이룬 일을 그가 못할 리가 없었다.

호근이 래연을 위해 제일 처음 한 일은 그네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때 래연이 살던 집에 그네를 맬 나무가 없었다면 그는 아마 기둥을 심어서라도 그네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네가 다 완성된 후에도 래연은 그네를 타지 않았다.

호근은 그네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래연에게 시위라도 하려는 듯 비가 오는 날 밤새 비를 맞으며 그네를 지켰다. 그리고 그 밤, 래연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어두운 방 안에서 그가 비를 다 맞고 있는 모습을 안타까이 지켰다.

아침이 되어 그네 옆에 쓰러진 호근을 제일 먼저 발견하고 안채로 옮긴 건 래연이었다. 호근은 그녀 부모님의 간호를 받으며 그 집에서 사흘 밤낮을 끙끙 앓았다.

다음에 호근이 래연의 집에 만든 건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목욕탕이었다. 그는 채운의 집에 있는 목욕탕의 설계를 그대로 본따 그보다는 조금 작지만 고쿨과 목간통까지 갖춘 어엿한 목욕탕을 제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

목욕탕이 완성된 날, 래연은 그녀의 어머니에게 이끌려 첫날부터 그곳을 이용했다.

호근은 다음 날 그녀의 눈이 퉁퉁 부은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채운이 그 의방에서 목욕탕을 지은 첫날 성 부인도 울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여인네들의 똑같은 반응에 호근은 울컥하면서도 기운을 차렸다. 혼자인 자신의 복장을 어지간히도 터지게 하긴 했지만 지금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 은애하며 행복한가. 래연과 자신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니 저 눈물은 희망이 보이는 징조라고 저 혼자 생각했다.

채운은 목욕탕을 먼저 짓고, 그네를 나중에 만들었다. 그러니 목욕탕 이후 래연에게 바칠 것이 필요했다.

호근은 다음 날부터 과일을 사다 나르기 시작했다. 래연이 임신한 것은 아니지만 과일은 어찌 됐든 여인네들의 몸에 좋은 것이었다. 호근은 할 수만 있다면 인근 과수원들을 몽땅 통째로 살 마음도 있었다.

과일을 사다 나른 이후 선물이 하나둘씩 늘기 시작했다. 한 번도 여인네 장신구를 사 본 적이 없어서 방물장수 앞에서 좌판만 노려보던 그 누군가도 산 것을 자신이 못 살 리가 없었다.

호근이 래연에게 바치는 정성은 인근 마을에 유명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두 달의 시간이 지났다. 생각보다 짧다고 하는 이가 있다면 호근은 제 시커먼 속을 내보이며 너도 해 보라고 따질 수도 있었다.

허나 그 시간이 얼마나 길어지든 호근은 래연이 마음을 돌릴 때까지 얼마든지 더 치성을 드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날도 래연에게 산 선물을 가지고 귀가하는 길이었다.

래연이 그가 매어 놓은 그네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호근은 걸음을 멈추고 숨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네를 매단 밧줄을 몇 차례 쓰다듬어 보더니,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 조심스럽게 그네에 앉았다.

끼이익, 끼이익.

발을 구르고, 그네가 앞뒤로 움직이며, 래연은 호근이 만든 그네를 탔다.

몇 번이나 움직였을까.

그네가 멈추고, 래연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흐윽, 흐윽, 어흐흑.”

폐부를 째는 듯한 울음이었다. 가슴을 쥐는 래연의 손이 너무 말라 있어서 호근은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앞으로 튀어나가 래연의 앞에 앉았다.

“미안하오, 미안하오. 늦었지만 돌아왔소.”

“어허헝.”

래연은 이제야 제대로 된 큰 소리를 내면서 울며 호근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그를 받아들여 주었다.

그런 시간들이 있고, 지금 호근은 이렇게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축하하오, 서 의원.”

“축하합니다, 서 의원님.”

“하하, 이거 쑥스럽고, 또 기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혼례식은 조촐하게 할 예정인데……. 그래도 두 분은 꼭 초대하고 싶습니다.”

“당연히 가야지요. 허나 아내의 배가 더 부르기 전이라야 할 것 같소.”

채운이 강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의 눈은 티가 나게 부른 강희의 배를 부드럽게 응시하고 있었다. 순간 채운과 눈이 마주친 강희가 그가 뿜어내는 기쁨에 미소로 화답했다.

호근은 이제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대화가 전처럼 부럽지 않았다. 대신 자신은 래연과 이보다 더 행복하게 살리라 의욕이 솟는 것이었다.

“그야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그래서 올해가 가기 전에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노력이 아니라 조르고 있다는 말씀이지요?”

밖에서 기침도 없이 들어온 만운이 호근을 놀리듯 한마디 거들었다. 만운은 호근이 래연과 재회하도록 도와준 것부터 그가 래연을 찾아다니며 상처를 보듬고, 아끼고, 사랑을 쏟는 것까지 모두 지켜본 사람이었다.

호근을 돕기 위해 시간만 나면 쫓아다니며 발이 닳도록 도와줬는데, 이제야 겨우 혼사를 한다면서 아직 날은 정하지 못했다니. 한마디 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목욕탕을 짓는데 만운의 조언과 도움이 한몫 한 것도 사실이었다.

허나 호근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쁘기만 한데, 이 정도의 놀림은 감수할 만했던 것이다.

“앗, 만운 낭장님. 만운 낭장님도 와 주실 거지요?”

“노력이 성공하셔야 말이지요. 그런데 올해 안에 정말 자신은 있는 겁니까?”

“당연…… 하지는 않고, 그래도 꼭! 혹시 안 되면 장인어른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늘어져 볼 작정입니다.”

“노력이 부족합니다, 노력이.”

만운의 말을 호근의 노력을 지켜본 래연의 부모님이 들었다면 입을 딱 벌렸을 것이다. 호근은 그래도 좋았다.

“그렇지요? 제가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너스레가 돌아온 호근의 넉살 좋은 대답에 만운은 놀릴 맛을 잃고 말았다. 이래도 허, 저래도 허 하고 웃기만 하는 호근은 영 맹탕이다. 사람이 심심해져 버린 것이다.

헌데 그 심심해진 호근이 만운이 몇 달간 간신히 잊고 있던 곤란한 주제를 꺼내고 말았다.

“저는 늦었지만 이렇게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허니 만운 낭장님도 저처럼 늦지 마시고 제때에 혼인하십시오.”

“……서 의원, 그건 곤란하오.”

의외로 채운이 부정적인 대답을 하기에 호근은 의아했다. 동생을 너무 아끼는 나머지 일찍 장가를 보내기가 싫어진 걸까?

“네? 만운 낭장님도 내년이면 스물한 살이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강희는 벌써 고개를 돌리고 웃고 있었다.

아직 분위기를 깨닫지 못한 만운은 잘도 그 이유를 대고 있었다.

“형님도 스물여섯에 장가를 가셨기 때문에 나도 아직 생각 없는걸요? 나도 그때쯤으로 생각하고 있소.”

만운의 천진한 대답에 강희는 결국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게다가 채운은 진지하게 한 마디 더 거드는 것이다.

“그것도 곤란하지 않느냐? 내년은 물론 안 되지만 네가 스물여섯 살이 되어도 너의 담영 아가씨는 겨우 열여섯 살일 뿐인데, 혼례를 치르기엔 조금 이르지 않을까?”

너무나 진지한 반대에 호근은 의아함이 더했고, 이제야 알아들은 만운의 얼굴은 시뻘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희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까르르 웃고 말았다.

“형!”

“아니 그렇소, 부인?”

채운이 동의를 구하는 순간에도 강희는 대답할 수 없었다.

형수 옆에서 시중을 들던 하녀들까지 웃음보가 터지자 만운은 붉어진 얼굴이 아예 불타오를 것같이 변했다. 게다가 그때 그 새털 같은 입맞춤도 생각나면서 자신이 어린아이를 탐하는 변태라도 된 양 민망함을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형, 정말 그럴 거야!”

그는 담영이 일을 벌이고 달아난 후 여기까지 오는 도중은 물론 그다음에도 그녀와 관계된 놀림을 충분히, 넘치도록 들어 왔다. 그것은 병사들과 동료들 사이에서도 한동안 회자될 만큼 훌륭한 놀림거리였던 것이다.

허나 만운이 워낙 발악을 하기에, 또 이후 경천동지할 일들이 많았기에 소문이 잠시 가라앉는 것 같았다.

헌데 다른 이도 아닌 형이 후속타를 날리다니! 그 일에 대해서는 여태 모르고 있던 호근이 알게 된다면?

이 이후의 일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때 이 집사가 손님이 온 것을 알려 왔다. 그런데 하필 이때 찾아온 손님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바로 그녀, 담영의 아버지였다.

“대감마님, 민영회라는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오셨는가? 어서 들라 하시게.”

채운은 그가 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듯 놀라지도 않고 맞아들였다.

잠시 후 민영회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뒤로 얼굴을 쏙 내민 아이가 한 명 보였다. 담영이 아버지를 따라왔던 것이다.

내년이 되어야 올 수 있을 것 같던 민영회는 생각보다 빨리 도성에 오게 되었다. 그는 최사립 일파를 몰아낸 수왕이 새로운 인재로 국정을 채우기 위해 끌어들인 인물 중 하나였다.

민영회는 인사 조치와 함께 종경의 일을 정리하고, 도성으로 왔다. 그리고 모든 게 정리된 후 가장 먼저 채운을 찾아온 것이다.

채운은 민영회와 인사를 나누며 담영에게도 아는 체를 했다.

“영애도 함께 오셨군요.”

“영애라니요, 아직 어린아이인걸요. 그냥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뭐하느냐? 장군과 부인께 인사드려야지.”

“담영이라고 불러 주세요, 윤 장군님, 부인.”

담영은 강희에게 살갑게 인사하고는 만운의 모습을 확인하고 활짝 웃었다.

“응? 정말 담영이라고 불러도 될까? 하지만 그래선 안 될지도 모를 것 같은데…….”

강희가 담영을 반기며 인사하자 담영도 조신한 척 고개를 숙였다. 담영의 인사에 묘하게 웃으며 말을 흐리는 형수를 보면서 만운은 가슴을 치고 싶었다.

‘설마 형수마저!’

하지만 만운이 곤혹스러워 하는 걸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운은 어른들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얌전히 앉아 있던 담영이 답답하여 몸을 꼼지락거리는 것을 제일 먼저 눈치챌 수 있었다. 역시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아이가 얌전한 척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을 보니 벌써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어른들이 이야기하시는 동안 너는 나가 있자.”

“좋아요, 만운 무장님!”

담영이 그의 말에 냉큼 답하며 발딱 일어섰다.

딸이 만운을 부르는 호칭에 민영회가 눈을 부릅떴지만 눈치를 채지 못한 담영은 만운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하린댁이 차려 준 감주와 다과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우와, 도성에 오니 약과의 색부터 다르네요? 어떻게 이런 빛깔의 약과가 있지요?”

담영이 붉고 노란 약과의 색에 감탄하기만 하며 감히 손을 대지 못하는 걸 본 만운이 그것을 집어 주며 권했다.

“먹어 봐, 이건 사탕이라는 거야.”

“우와!”

사탕을 한입 먹어 본 담영은 처음 맛본 달콤함에 탄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사탕은 우리 려국에서는 나지 않아서 송국에서 들여오는 거야. 헌데 우리 형수의 아버님이 큰 무역 상단을 꾸리시는 분이시거든. 그래서 종종 먹을 수 있어. 네가 원하면 얼마든지 줄 테니 가지러 오렴.”

“네, 그래야겠어요! 이제 여기 와야 하는 이유가 이걸로 또 늘었네요?”

“응?”

“만운 무장님 보러 온다고 했잖아요.”

“그…… 랬지?”

너무나 순수하게 호의를 표하는 담영에게 만운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답했다. 이런 어린아이에게 너 나 정말 좋아하는 거냐, 이렇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럼요, 자주자주 올게요. 그래야 한눈을 못 팔죠.”

“응?”

“우리 언니들이 한 말이에요. 그냥 그렇게만 알면 된대요.”

만운은 뭔가 섬뜩한 말을 들은 것 같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게 편할 것 같았다. 그리고 담영은 여러 가지 주제로 사람들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성 부인께서는 정말 예쁘세요. 우리 언니들은 배가 부르니까 점점 뚱뚱해져서 별로 안 예쁘던데. 나도 자라면 성 부인처럼 예뻐질 수 있을까요?”

“그럼, 너는 지금도 충분히 예쁜걸.”

“헤헤.”

저가 예쁘다는 소리에 헤벌쭉 웃던 담영은 또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어머니 말씀대로 성 부인은 그런 못된 여자를 가련하게 여겨 주시고 장례까지 치러 주실 정도로 마음씨도 고와서 더 예쁘신 걸 거예요.”

“응? 그게 무슨 소리냐?”

“영혜랑 마을 아이들을 괴롭혔다는 그 못된 여자 있잖아요? 아, 참. 그날도 있었죠?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날 밤에 그 여자도 죽었대요. 헌데 성 부인께서 장례를 부탁하신다고 하셔서 봉분까지 쓴 묘를 만들었다고 해요. 제가 보기엔 그 여자가 그때 성 부인을 해코지하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도리어 그런 은혜를 베풀다니. 정말 대단하시지 않아요?”

“어? 어, 그렇구나.”

만운은 담영에게 맞장구를 치면서도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들었다. 알아선 안 될 무언가를 엿본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그 불길한 느낌은 가슴팍 언저리에 팍하고 내리꽂혔다.

담영이 다른 주제로 계속 조잘거리고 있었지만 잘 들리지가 않았다. 대충 대답을 해 주고 있는 그때 다행히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담영아, 그만 가자. 이리 나오너라.”

“네, 아버지!”

“앗! 아가씨, 이걸 가져가셔요.”

아버지의 부름에 발딱 일어난 담영에게 하린댁이 눈치껏 싼 보따리를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담영이 맛있게 먹었던 한과며 사탕이 가득 들어 있었다.

“고마워요! 또 올게요!”

만운에게 무슨 폭탄을 던져 준지도 모르고 담영은 천진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가 버렸다.

아버지께는 다음에 또 낭장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가는 혼이 날 거라는 엄포를 들었지만 야단은 그때뿐, 담영은 이제부터 매일 만운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허나 담영은 그날 이후 꽤 오래도록 만운을 다시 볼 수 없었다. 만운이 그해 해미도―이전 구마도―로 떠나는 마지막 배에 몸을 싣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만운은 담영이 떠난 후 방에 틀어박혀 버렸다. 담영이 가고 난 후 호근도 그녀와 얽힌 사연을 듣고 반달눈을 한 채 그를 찾아왔지만 퀭한 눈을 한 만운은 이미 버럭 화를 내며 부끄러워하던 그가 아니었다. 잠깐 사이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설마 아이와 무슨 일이 생겨서 저렇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담영이란 아이도 떠날 때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항상 쾌활하며 조금 까불다가 매번 형에게 혼나곤 하던 만운이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만운 낭장님.”

“…….”

호근이 만운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 보려 했지만 그는 온몸으로 대화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붉어진 눈시울을 보니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이만 가 주시겠습니까?”

“갑자기 왜 이런? 아니, 전 이만 가 보지요. 하지만…….”

끝내 뒤돌아보지 않는 만운에게 건넬 말을 찾지 못한 호근은 채운이 오는 걸 보고는 돌아섰다.

“다음에는…… 좋은 소식으로 오겠소.”

“…….”

만운은 호근이 작별 인사를 하는데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호근을 보낸 채운이 만운의 방으로 들어갔다.

“만운아, 너 뭐하는 거냐?”

“형…….”

겨우 고개를 돌려 채운을 바라보는 만운의 눈은 제어할 수 없는 격정으로 붉어져 있었다.

만운의 눈에 휘몰아치는 슬픔은 부인하고 싶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담영이 해 준 이야기 몇 가지가 합쳐지며,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누이를 상하게 한 원인인 고위 귀족가의 영애, 화로에 여자아이의 얼굴을 지졌다는 하녀, ―그 하녀의 주인인 형수, 그리고 형과 형수가 서로를 애틋하게 생각하면서도 준비했던 이혼장.

그것은 천재인 재영과 같은 머리를 갖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만운, 너 왜?”

만운은 형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형수가…… 그녀였던 거야? 그래서 애초에 형이 형수와 이혼하려 했던 거였어?”

정말 사실인지 묻는 만운의 표정은 차라리 부인해 달라고 하는 것처럼 애원하는 얼굴이었다.

“……!”

어린 시절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당시 말고는 다시 볼 수 없었던 처참한 만운의 얼굴에 채운은 가슴이 저미는 것 같았다.

처음에 든 생각은 ‘어떻게 안 것일까’였다. 그리고 다음엔 부인할까 생각했다. 허나 만운은 이미 확신을 갖고 시름에 잠긴 얼굴이었다.

자신도 이런 고민을 했던 것일까? 아니, 만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그 현장에 있지 않았던가.

그가 가졌던 원망과 증오심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것이었다.

허나 채운은 그것을 자신의 가슴에서 삭히고, 묻었다가, 지워 버렸다. 그녀가 만운을 구했을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채운은 강희를 계속 미워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끝까지 떠나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기억을 숨기면서까지 그녀를 붙잡았다.

그렇게 되기까지 만운의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만운은 끝까지 모르길 바랐다.

방금 전까지 호근을 놀리려 덤비고, 담영의 일로 놀림 당하면서 민망해 하던 만운.

그러니 담영이라는 아이가 왔다 간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강희가 마지막 주검을 확인하던 가실이라는 하녀의 이야기를 들어 알게 된 것이리라.

아니, 만운이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동생이 느끼는 배반감, 원망, 혼란들이 만운의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며 채운은 안타깝기만 했다.

“만운아…….”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그게 있었던 거구나.”

채운은 그것이 무엇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그것은 만운에게 절대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집무실에 다시 돌아간 순간 없애 버렸지만 진작 태워 버리지 않은 것이 자신의 가장 큰 잘못이었다.

다만 이미 알게 된 이상 채운은 동생에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가슴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생각을 할 수가 없어. 어지럽다, 형.”

만운은 웅크린 채 쉰 목소리로 불쑥 한마디를 했다. 그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려던 채운의 손은 덩치만 큰 아이의 어깨를 잡아 주지도 못하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만운은 그때의 어린아이로 돌아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그랗게 어깨를 말고 흐느끼면서 어린 시절 한순간 사라져 버린 누이와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에 젖어 있는 것이다.

이 순간 채운은 강희에 대해 어떤 변명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또 만운에게는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건 동생의 이름을 부르는 것뿐이었다.

“만운아…….”

“나도 알아. 종경에서 내가 찾은 그 여자가 바로 그 짓을 한 장본인이라는 거. 대가 댁 위세만 믿고 몹쓸 짓을 한다는 하녀들……. 누이가 그런 여자에게 잘못 걸린 것이었어. 어머니는 심약하셔서 돌아가신 거고, 아버지도 견디실 수 없었던 거야. 그러니 우연한 사고에 불행이 겹친 것이지.”

도리어 만운이 강희의 변명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그만큼 이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는 것이다. 허나 그런 모습이 채운의 마음을 더 아리게 하고 있었다.

“…….”

“그런데, 그런데 형, 난 왜 이렇게…… 왜 이렇게 가슴이 쥐어뜯기는 것 같을까?”

“만운아!”

채운은 웅크린 만운의 어깨를 감싸 안고 안아 주었다.

무예를 단련하기 위해 만운이 스승님의 밑에 함께 들어간 후로 동생을 이렇게 안아 준 적이 없었다. 헌데 지금 안아 준 만운은 덩치는 자신보다 더 컸지만 아직 그때의 어린아이처럼 흐느낌을 참느라 떨고 있었다.

“형, 나는 형수가 좋아. 그리고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그때 형수가 나의 이 손을 잡으며 안도하며 기뻐하던 표정을 잊을 수 없어. 그리고 형과 함께 작은 배로 실종되었을 때, 형수가 기절한 형의 몸을 묶어서 살았다고 했지? 크나다란 그놈 때도 그랬고 말이야. 우리, 사실 그때 형수 덕분에 이긴 거잖아? 그렇지?”

“…….”

“그런데 형, 그래도 말이지……. 지금은 형수 얼굴 보기가 힘들 것 같아. 나 어쩌지?”

“괜찮아, 괜찮아.”

“나, 그래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많이는 아니야, 조금만. 잠시만 나가 있다가 올게.”

강희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당장 저가 제정신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집을 나가는 것, 강희를 피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말이었다.

채운은 저리는 가슴을 저 홀로 봉합하려 애쓰는 만운을 말릴 수가 없었다.

“어딜 가려는 것이냐?”

“여기서 제일 먼 곳. 해미도로 가 볼까? 그곳의 공신들이 성 대감 말고는 대부분이 사라져서 주인 잃은 곳이 많거든. 그래서 정리가 필요하다고 들었어. 크나다, 그놈에게 한 약속도 지켜야 하고. 그 약속을 한 것이 나이니, 그놈을 책임지는 것도 내가 돼야 해. 그러니 녀석도 함께 데려가 볼까 하는데, 괜찮을까?”

“그래.”

사실 채운은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만운은 여태 그에게 단 하나뿐인 가족으로 돌봐야 할 동생이기도 했지만 그의 의지처이기도 했다.

허나 지금 동생에게 당장 강희를 보고 받아들이라는 것 또한 무리였다. 만운의 말대로 그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언제 가려고?”

“말을 꺼냈으니 당장 가야 할 것 같아. 전하를 뵙고 재가를 얻으려면 시간도 촉박해. 한 서기님이 아직 계셨으면 알아서 해 줄 텐데……. 그나마 절로 들어간다고 하는 걸 남부 도사가 붙잡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내가 가는 길도 한 서기님이 살펴 주실 거야.”

“그래…….”

채운은 결정과 동시에 떠날 계획을 짜는 만운을 잡을 도리가 없었다.

벌떡 일어난 만운은 눈을 쓱쓱 비비고 칼만 챙긴 채 방을 나갔다. 성큼성큼 마당을 지나 걷던 만운이 한곳에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것은 며칠 전 그와 채운이 함께 만든 그네였다.

고급스런 목재를 이어 정성 들여 만든 그것은 장인의 솜씨로 만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강희가 경탄을 하며 눈물을 글썽일 만큼 좋아하는 것이었다.

“형, 이거 말이야…”

“응?”

“지금은 나 힘들게 도망치는 거지만, 형수가 이 그네를 윤씨네 아이들로 꽉 채우면 저절로 모든 게 풀릴 것 같아.”

“……?”

“지금 배 속에 있는 녀석은 누이 몫이고 말이지. 다음에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나를 위한 조카가 한 녀석 더 태어나면 좋겠어. 그러면 용서고 뭐고 할 것 없이 저절로 모든 게 다…….”

만운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그네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그 말은 정말 아이가 그만큼 생기면 좋겠다는 말 같기도 했지만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다는 소리로도 들렸다.

“많이 낳아야겠네.”

“응, 많이, 많이…….”

그날 만운은 강희를 보지 않고 급작스럽게 떠났다. 그리고 하필 일정이 절묘하게 맞은 덕분에 그는 사흘도 지나지 않아 해미도로 가는 배에 오르게 되었다.

새해가 다가오고 있었다.

* * *

“아아아아아악!”

방 안에선 산모의 비명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새해가 지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날, 강희와 채운의 첫 아이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녀의 출산을 돕기 위해 도성에서 가장 아이를 잘 받아 낸다는 산파와 궁에서 보낸 의관과 의녀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조금만 더요! 조금만 더!”

“아악, 아아아!”

어제 오후에 시작한 진통은 밤을 넘기고 새벽이 올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밖에서 사람들이 모두 초조하게 지키고 있는 동안 밤새 진통을 한 강희도 점점 기운이 빠지고 있었다.

“마님, 정신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조금만 더요!”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모두 움찔했다.

“서방님, 지금 벌써 여덟 시진째죠? 초산이라지만 진통이 너무 길어지고 있네요.”

“초산엔 이보다 더 오래 걸리는 사람도 많다오. 마님은 무사하실 거요.”

호근이 래연의 걱정스런 말에 안심하라는 듯 위로했다.

래연은 아직 표시는 나지 않았지만 임신 중이었다. 그래서 고통스런 초산의 비명 소리에 더 초조해 보이는지도 몰랐다. 허나 호근이 아무리 쉬라 해도 고집스런 래연은 남편의 곁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도 밤을 새며 산실 밖을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호근도 강희가 진통한다는 소식에 달려와 방금 전까지 방을 지키다 나온 길이었다. 그도 의관과 의녀와 함께 출산을 돕고 있었지만 강희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어떤 녀석인지 쉽사리 나오려 하지 않았다.

“헌데 래연, 대감께서는 어디 계시오?”

“또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저런!”

강희의 출산을 가장 초조하게 기다리는 이는 바로 남편인 채운이었다.

그는 정월의 매서운 찬바람이 추운지도 모르고 벌써 몇 번이나 밖을 오가고 있었다. 려국 최고의 무사라는 평을 듣는 그도 아이를 낳는 아내의 비명 소리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런 때 만운 중랑장께서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왜 하필 그 먼 해미도까지 가셔서 첫 조카를 볼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인지, 원.”

호근이 저도 모르게 만운을 탓할 때였다.

“내 이럴 줄 알았소! 내가 없다고 그새 내 흉을 보시다니. 서 의원, 설마 했지만 나 서운합니다?”

“앗, 만운 중랑장님!”

기운찬 목소리, 바로 만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드디어 돌아오셨습니까, 도련님!”

호근이 불쑥 나타난 만운을 반갑게 맞자 함께 밤을 새운 이 집사도 눈을 번쩍 뜨며 그를 맞았다. 마님의 산고에 숨죽이던 집 안이 만운의 활기찬 기운에 밝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호근은 오랜만에 본 만운의 모습을 살피며 물었다.

“대감은 만나셨습니까?”

“네, 밖에 있더군요. 벌써 만나고 왔습니다. 저 반갑다는 소리도 않고, 퀭한 눈으로 하늘만 쳐다보고 있기에 칼부림 좀 해 주고 왔습니다.”

“네에?”

“하하하, 농담입니다. 울 것 같은 얼굴이라서 토닥거리고 위로해 주고 온 것뿐입니다.”

설마! 앞에 것보다 뒤가 더 농담 같다.

“응애애애, 응애!”

그때 방 안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태어났습니다! 조카가 숙부를 기다린 모양이오. 만운 중랑장님이 오시자마자 울음소리를 들려주다니 말이오! 축하드립니다!”

헌데 호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달려오는 이가 있었다. 채운이 아기 울음소리를 듣자마자 달려 들어와 산실의 문 앞에 선 것이다.

그러나 가까스로 이성을 찾은 것인지 그는 당장이라도 벌컥 열어젖힐 줄 알았던 산실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었다. 자신이 몰고 온 찬바람이 안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고 멈춰 선 것이다.

잠시 후.

안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산파가 아기를 안고 나왔다.

“앗, 대감? 감축드립니다, 대감. 건강한 아드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마님도 건강하십니다.”

문에 바짝 다가와 귀를 대고 있었던 것 같은 채운을 보고 순간 놀랐던 산파가 아기를 보여 주며 말했다. 그 안에는 눈도 뜨지 못한 새빨간 아기가 강보에 쌓인 채 안겨 있었다.

“……!”

말문이 막힌 채운은 아기를 지켜보기만 했다. 부자간의 첫 대면을 사람들은 기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산파가 아기와의 대면 시간을 짧게 멈추고 말았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다시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내는, 아내는 어떻소?”

“지금은 잠드셨습니다. 대감께서도 쉬셨다가 손발을 다시 씻고 들어오세요.”

“그러지.”

산파가 들어가고 나서도 채운은 아직 멍한 표정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형, 아버지가 된 걸 축하하오.”

그런 형에게 다가간 만운이 축하 인사를 건네고, 다른 이도 축하와 덕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만운은 산실 바깥 대기실로 들어오기 직전에 채운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오랜만에 본 인사를 나누는 게 먼저였지만 그 전에 채운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만운은 실소를 해야 할지, 자신이 한 말을 취소해야 할지 잠깐 고민을 했다.

채운은 하늘을 보며 계속 이 한마디를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하다, 만운아. 하지만 아이는 저놈 하나로 끝이다. 저놈이 끝이야!”

어이가 없었던 만운이 채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어, 형, 다 좋은데……. 그럼 형수한테 이제 평생 독수공방하라는 말이야?”

“앗! 만운아, 돌아왔구나!”

“응? 형?”

“뭐가?”

오랜만에 만난 만운은 마지막에 봤던 상처받은 아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른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리했구나. 그런데 저 녀석이 지금 뭘 물어본 거지?’

아내의 출산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 채운은 만운의 말을 놓치고 말았다. 만운이 그런 형을 생전 처음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평생 독수공방할 거냐고?”

“뭐? 서 의원이 좋은 처방을 알고 있을 테니 당연히 그럴 필요가 없……. 녀석, 오자마자 한다는 게 무슨 엉뚱한 소리냐!”

“아아아악!”

그때 다시 들린 강희의 비명 소리에 채운은 다시 사색이 되었다. 형에게서 무슨 말을 듣기는 그른 걸 알게 된 만운이 산실 앞 대기실로 간 건 그 때문이었다.

그는 어젯밤 도성 밖에서 묵고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지금 막 도착한 터였다.

헌데 그가 도착하자마자 조카가 정말 기다렸다는 듯이 나온 것이다. 덕분에 만운은 나타난 것만으로도 행운을 가져온 이가 되었다.

산모와 아기가 모두 무사하고 건강한 덕분에 채운의 집에선 거의 잔치가 벌어졌다. 물론 잔치는 출산을 돕던 이들과 이 집 하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바깥바람은 더 싸늘하고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했지만 대문에 금줄을 거는 사람들의 표정은 환하기 그지없었다. 금줄이 풀리고, 객을 맞이할 수 있게 되면 그때는 이 집에서 떠들썩하니 제대로 잔치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이 집에서 한 사람, 아기가 누워 있는 가장 안쪽의 깊숙한 거처에 있는 강희만 바깥의 경사스런 분위기에 섞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가…….”

방금 잠든 그녀의 아들은 실컷 젖을 먹고 만족스럽게 입을 오물거리며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강희의 마음은 터질 것처럼 벅차면서도 한편으로는 감격스러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강희는 저가 딸이 태어나길 기원한 이유도 잊어버렸다.

채운의 말처럼 그것은 꿈이었을 뿐 운명과는 멀어진 일이었다. 이제부터는 새 운명이 기다리고 있고, 그 운명은 자신의 힘으로 개척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이유는 아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출산 후 기진한 강희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는 거의 혼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한밤중이 되어서야 깨어난 것이다. 이 추운 날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옷이 다 젖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깔끔한 옷을 입은 채 누워 있었다.

그리고 눈을 돌리자 작은 침상에 아기가 누워 있었다.

“아가.”

“깨어나셨습니까?”

“아기를 이리로.”

“네.”

“아들인가?”

“네, 그렇습니다. 아직 새빨간 아기인데도 어쩜 이렇게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잘생기신 겁니까? 정말 잘나시고 잘나셨습니다.”

“그런가. 아, 내가 보기에도 그러하이.”

“호호.”

하린댁은 홀린 듯 아들을 쳐다보는 마님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때마침 입을 오므리며 칭얼거리는 아기씨를 보니 배가 고픈 듯했다.

“마님, 아기씨에게 젖을 물리십시오.”

“어?”

서투른 엄마인 강희가 품을 헤치자 아기는 본능적으로 젖꼭지를 찾아 덥석 물고 힘차게 빨아 당겼다.

“아.”

“사랑스러우시죠? 보는 저도 얼마나 신비하고 사랑스러우신지.”

제가 더 감격스러워 하는 하린댁이 평소에는 거의 하지 않던 수다를 늘어놓았다.

“주인어른께서도 여태 마님과 아기씨를 보시다 가셨습니다. 마님이 진통하시는 동안 내내 뜬눈으로 지새우면서 기다리시더니 아기씨가 태어난 다음에도 도통 주무시지 않으셔서 방금 전 만운 도련님이 억지로 끌고 가셨습니다.”

“뭐? 도련님이 오셨어?”

“아차! 네, 만운 도련님이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도련님이 오시니 아기씨가 태어나셨다며 아기씨가 숙부를 기다리느라 그리 늦게까지 버틴 거라 한답니다. 좀 더 일찍 오셨으면 더 낫지 않았느냐고요. 아, 제가 왜 이리 주책이지요? 너무 좋아서 계속 이렇게 횡설수설하게 되네요.”

“도련님이…… 오셨구나. 어떠셔? 좋아하셔?”

“그럼요. 얼마나 좋아하시는데요? 금줄 다는 것도 도련님이 나서서 거드시고요. 아기씨한테 술 냄새 풍기면 안 된다고 술도 참고, 벌써 몇 번이나 보고 가신지 몰라요.”

“그러셨구나.”

가는 모습도 못 봤는데 돌아오셨다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반가움에 울컥한 마음에 목이 멜 것 같은 그때,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도련님을 어떤 얼굴로 다시 봐야 할까.’

강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눈물을 떨치고 미소를 지었다.

만운이 돌아왔다. 그가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그녀가 이전처럼 그를 반기고 좋아하는 것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강희는 만운이 갑자기 집을 떠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누가 말해 줘서가 아니라 그날 만운이 떠나는 뒷모습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채운이 그녀를 용서하기 가장 힘들어 했던 이유인 만운, 그리고 그녀가 채운보다 더 죄스럽게 생각하던 만운이 그녀가 한 짓을 알게 되었다는 걸.

만운이 해미도로 가 버렸다는 것하며, 언제 올지 기약이 없다는 말을 듣고 가슴을 철렁 내려앉았다. 채운은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강희는 그가 슬퍼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신하게 된 것이다.

허나 그녀는 이후 만운을 영영 볼 수 없는 게 아닌지 두려워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또한 이렇게 말없이 떠난 만운과 이유를 말하지 않는 채운에게 그녀가 아는 척하는 것이 더 죄가 될 것 같았다.

며칠 후 어느 날, 채운은 그네에 앉아 만운이 마지막에 한 말을 우스갯소리처럼 들려주었다.

“녀석이 이 의자를 꽉 채울 만큼 윤씨 아이들을 늘려 주었으면 좋겠다는군. 예전의 우리 가족들 수에다 제 몫의 조카가 하나 더 필요하다고 하더라고. 어떻소, 할 수 있겠소?”

결국 강희는 채운의 품에 안겨 울었다.

그 말을 남들처럼 그저 아이를 많이 낳자는 평범한 대화로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채운은 강희가 운 이유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고 입을 맞춰 줬다. 펑펑 운 것이 민망해진 강희도 모르는 척 그에게 물었다.

“서방님도…… 원하십니까?”

“당연하지 않소! 당신과 나의 아이라면 얼마든지.”

그때쯤 이 집 사람들은 주인 내외가 그네에 함께 앉으면 종종 하는 애정 행각에 놀라지 않고 눈을 돌릴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만운보다 더 많은 아이가 태어나기를 기대했다.

오늘, 그 모두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시작이었다.

“도련님이 오시고 아기가 태어나다니. 정말 우리 아기는 도련님을 기다린 것 아닐까?”

“다들 그렇게 말한다니까요? 주인님은 아기씨를 본 것도 기뻐하시지만 도련님이 돌아오시니 벌써 얼굴이 달라지셨습니다. 동생이 아니라 다 큰 아들이 따로 없습니다. 두 분이 그리 우애가 좋으시니 벌써 아기씨도 숙부를 반기시는 모양입니다.”

“그래, 그런가 보이.”

덜컹.

그때 문이 열리고 만운이 들어왔다.

“어, 형수, 깨어나셨소?”

“……도련님.”

강희는 그를 아무렇지도 않게 맞으려고 굳게 마음먹었었지만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강희의 눈물을 본 만운은 대뜸 사과부터 했다.

“앗, 형수, 미안합니다. 다신 안 그럴게요.”

방에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집 나간 탕아가 돌아온 것처럼 울며 만운을 맞는 강희와 가출했다 돌아온 아들 같은 얼굴로 주눅이 든 만운.

“도련님을 다시는 못 볼까 봐 얼마나, 얼마나…….”

“어디로 간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전쟁터로 간 것도 아닌데, 왜 그러세요? 하하, 전보다 더 우시는 걸 보니 제가 더 좋아진 거지요? 저도 형수가 좋아요. 정말이에요.”

강희는 만운의 진지한 고백에 쉴 새 없이 눈물만 흘렀다. 만운이 해 주는 말은 채운의 고백만큼 그녀의 심금을 울렸다. 이것으로 채운도 멍울진 마음을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채운이 들어서며 만운에게 핀잔을 주었다.

“예끼, 강희는 내 여자다. 넌 사랑하는 네 여자를 찾아야지!”

“엥, 형? 그새 일어났수?”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너도 정말 네 짝을 찾을 생각을 해야지. 네 형수가 언제까지 네 침의를 만들어 줘야 하는 거냐?”

주인이 없던 만운의 침실엔 새 침의가 몇 벌이나 잠자고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그것을 본 만운이 헤벌쭉 입이 벌어져 새로 입고는 형에게 그새 자랑을 한 것이다.

“허! 형, 나 오자마자 그새 구박이야? 형수, 난 소매 끝에 놓인 이 수가 특히 맘에 들어요. 그런데 나도 형처럼 저 색으로 해 주면 안 될까요?”

그새 만운의 능청이 늘었는지 수를 놓을 색깔까지 요구했다.

“어머, 그럼 다음엔 금사로 해 드릴게요, 도련님.”

“너, 점점!”

“흥, 형수가 해 준다잖아. 역시 솔직한 형수가 낫지, 형은 나 없다고 울었다면서?”

“만운아, 네가 너무 오래 쉬었구나. 오늘만은 그냥 넘어가려 했더니, 안 되겠다. 뒤뜰로 나와라.”

“히끅!”

또 정도를 넘었다. 연무장으로 그를 호출하는 엄한 목소리에 만운은 딸꾹질을 하며 강희에게 애처로운 눈길을 보냈다.

강희는 티격태격하는 형제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두려울 만치 행복했다.

만운의 애원하는 눈에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채운을 바라보며 그를 말려 주었다.

“서방님, 지금 밖이 너무 춥습니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난 첫 밤인데, 오늘만큼은…….”

그 말에 채운은 강희가 슬며시 내민 손을 잡으며 그녀의 말을 못 이긴 척 받아 주었다. 그 모습을 훔쳐본 만운은 불현듯 차라리 종아리를 치라던 형수가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형이 웃는 모습이 참 빛나 보였다.

형수와 꼭 잡은 형의 손이 그의 마음도 따듯함으로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과거는 모두 지나갔고, 지금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저 작은 아이야말로 또 다른 미래를 향한 시작이었다.

‘돌아오길 잘했구나.’

그 때문에 만운은 방금 전 한계를 지났다는 걸 잊고 또 형을 놀리다가 한밤에 연무장으로 향할 뻔했다. 어쨌든 그날 윤씨 형제의 집에서는 모든 이들이 행복함에 취해 잠들 수 있었다.

* * *

만운은 해미도에 다 도착하기도 전에 혼란스런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처음 배에 몸을 실었을 때만 해도 그는 배반감과 원망, 혼란스러움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래서 며칠 동안 아무 생각 없이 바다만 바라보며 파도와 눈싸움을 했다.

그러다 생각이 점점 형에게로 흘렀다. 자신의 혼란이 얼마만큼이든 그것이 어디 형만 했으랴. 그래서 서로에게 흐르는 마음을 무시하고 이별까지 준비했었지 않은가.

결국 두 사람이 이루어진 건 운명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던 다른 이유는 원망이 미움으로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 미움은 담영이 말하던 그 여자에게로 향했다.

허나 미움을 받을 그 여자도 이미 죽고 없었다. 죄과는 그 여자가 모두 가져간 것이다.

그 순간 마음속의 응어리졌던 것이 바닷바람에 날아갔다. 눈싸움을 하던 파도가 그 원망들을 삼키며, 그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랐다. 마음을 정리한 만운은 며칠 동안 붙박이처럼 붙어 있던 망루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으아악, 나 해미도로 가는 중이었지!”

그의 미소는 곧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이 배가 어디에 왔으며, 제가 어디에 발을 디뎠는지 깨닫고 만 것이다.

만운은 그의 도착에 희색이 만연하여 뛰어오는 관리에게 붙들려 현청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가 왕에게 해미도로 가겠다며 주청을 올리자마자 당장 배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를 발견했다.

눈앞에 서류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아, 안 돼!”

소리 높여 외쳤지만 그의 몸은 이미 해미도에 묶여 있었다.

‘그때 차라리 며칠 어디 숨어 있다 나올 것을!’

그러나 후회는 너무 늦었다. 맡은 직책보다도 과중했던 책임에서 벗어난 관리는 만운만 초롱초롱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크나다를 데려간 것이다.

크나다는 꽤 똑똑했다. 그것은 즉, 부려먹기 좋다는 말이었다. 만운은 그의 재주를 쪽쪽 짜내어 형수가 출산하는 날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다.

* * *

몇 달 후, 봄.

만운이 강희에게 하소연하듯 중얼거렸다.

“형수, 난 형수가 해 주는 건 다 좋소. 좋거든요……. 내 불평하려는 것은 아닌데……. 나도 국수 좋아요. 그런데 형만큼은 아니오. 그러니 사흘에 한 번 있는 성찬에 내 건 밥만, 밥으로 좀 주시면 안 되겠소?”

“만운아!”

“앗!”

밥투정을 하다 들킨 만운이 재빨리 방에서 튀어 나갔다. 도망가면서도 그 품엔 아직 백일밖에 안 된 조카인 염이 안겨 있었다.

채운이 달아나는 만운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염이는 두고 가라!”

“염이가 날 너무 좋아해서 안 되오! 조금 달리고 잠시 후에 오겠소!”

만운이 달아난 뒤에 남은 두 사람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제가 너무 한 가지만 해서. 죄송해서 어쩌지요?”

“아니오. 저놈을 빨리 장가보내야지 안 되겠소. 내 색시가 내가 좋아하는 걸 해 주겠다는데, 저 녀석이!”

채운이 벼르며 말하고 있었지만 강희는 뜨끔했다.

‘매번 다른 국수지만 국수는 국수였지. 도련님 것은 따로 준비해야겠다. 그런데 만운 도련님이 장가가기는 좀 이를 것 같은데. 담영이가 아직 어려서 어떻게 하지?’

강희는 여전히 만운을 쫓아다니곤 하는 담영을 생각하며 몰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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