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 꿈과의 이별 (34/38)

34. 꿈과의 이별

국정이 논의되고 있는 대전 안은 또 다른 말로 전쟁터였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오가면서 살벌하게 대치된 기류가 거센 공방이 벌어지는 대전 안을 휘감고 있었다.

“모함이요, 모함!”

“뉘가 모함을 한다는 것이오? 사실이니 저자가 여기 있을 수 있는 것 아니오?”

“저자가 뉘인데 그러는 것이오. 저런 팔다리 없는 병신을 데려오면 없는 사실도 꿰맞춰지는 것이오? 설사 저자가 정말 그 해적선에 타고 있던 자라 해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대감, 대감께서 아무리 저를 모른다 하셔도 저는 대감을 아옵니다. 바로 대감이 저를 그 배에 태우지 않으셨습니까?”

임봉곤이 최사립을 똑바로 쳐다보며 소리쳤다. 왜의 해적들에게 끌려가 노예처럼 부려지며 살아온 세월도 억울하건만 해적의 소굴에 있다 하여 해적이라는 오명을 씌워 그보다 더한 죄를 씌운 것이 최사립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가진 원한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 배에 함께 타고 있던 그의 동료들 모두가 최사립으로 인한 억울한 희생자였던 것이다.

허나 원한에 찬 임봉곤의 절규를 듣고도 최사립은 콧방귀를 뀔 뿐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는 외려 큰소리를 쳤다.

“네놈이 누구인데 감히 나에게 그런 모함을 하느냐! 아니, 누구의 사주를 받고 감히 내게 이런 더러운 수작을 하는 것이냐, 누구냐!”

예상했던 것이지만 최사립은 완강히 부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적반하장으로 임봉곤을 몰아대고 있었다.

“그 배에서 화염으로 수장된 저의 동료들이 한 줌 고깃덩이가 되어 물속에서 고기밥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동료의 억울함을 푸는 일에 제가 모함을 하다니요! 대감, 바로 대감이 그 배를 몰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배라니, 해적선 말인가? 나와 해적선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네 정녕 누구를 믿고 이리 방자한 짓을 한단 말이냐!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다니, 이는 나를 능멸함이오, 나를 음해하려는 수작이란 말이오!”

임봉곤에게 호통을 치다가 나중엔 대신들을 둘러보며 소리치는 최사립의 눈에는 서릿발 같은 살기가 맺혀 있었다.

임봉곤은 제 억울함을 호소하면서도 적반하장인 최사립에게 눌려 부르르 떨고 있었고, 대신들은 눈치를 보며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이대로 그를 놓아줄 수는 없는 일이다.

“최사립 대감!”

“뭐, 뭐라? 참지정사, 그대가 감히 내게 뭐라 하였는가!”

“최사립 대감이라 하였소! 왜, 나도 그 대단한 권력에 기대어 눌러 보시구려!”

태사라는 권력으로 약한 증인의 말을 누르고 있다고 꾸짖는 통렬한 질책이었다.

최사립은 김승언의 무례를 지적하고 싶었지만 당장 용상에 앉아 있는 젊은 왕이 그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아니, 그가 여태 누가 저를 모함하는 것이냐 하고 지적질을 한 대상이 바로 왕을 향한 것이라, 왕의 심기가 좋을 수가 없었다.

“참지정사, 정신이 나갔소? 저 어리석고 무도한 자의 말을 듣고, 이 나를 그런 일에 연루시키려 하는 것이오? 단지 저자의 말만 듣고? 저자는 분명 누군가의 음모로 나를 음해하려는 수작을 펼치고 있는 것뿐이오!”

“그렇소. 괜히 남의 죄로 돌려 빠져나갈 생각은 마시오!”

“그렇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저는 진정으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닥쳐라! 내 너의 수작을 결코 간과하지 않을 것이야!”

이미 내놓은 목숨을 걸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나온 자리였지만 임봉곤은 최사립의 기세에 질려 점점 주눅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에 다른 최사립의 일파들이 임봉곤을 몰아치며, 김승언과 그 주변인들이 최사립 일파에 맞서고 있었다. 지엄한 용상 아래 국정을 논하는 대전에서 고함 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만하시오!”

왕의 일갈에 모든 이들이 입을 다물고 왕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단 한마디였지만 왕의 말에 실린 무게에 대항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의 옆에 윤채운이 서 있기에 그가 앉은 자리는 역대 어느 왕보다도 더욱 단단하고 힘이 있어 보였다.

“여봐라, 임봉곤. 그대는 자기가 한 말에 얼마나 진정성을 보일 수 있느냐?”

“제 목숨은 물론 제 가족과 친지들 모두의 목숨도 걸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결코 모함을 하거나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뭐라! 네 이놈!”

“태사, 과인은 아직 그대에게 발언하기를 허하지 않았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왕의 말끝에 최사립은 쓰디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왕이라 해도 대신들에게 함부로 반말을 하지는 않는다. 허나 지금 최사립에게 한 명백한 하대에 왕의 적대심이 충분히 드러났던 것이다.

“임봉곤, 듣거라. 그러나 네가 한 말만 듣고 국가의 가장 상위에 있는 대신을 함부로 벌할 수는 없다. 너의 말을 증명할 것이 있느냐?”

자신의 입을 다물게는 했지만 이어지는 왕의 말에 최사립과 그의 일파는 찡그림을 멈추고 웃을 수 있었다.

증명을 하라니, 임봉곤이 제아무리 떠들어도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전에 증거부터 모두 없앤 그 계획은 배를 조달하는 것부터 그 배를 이끄는 것까지, 드러나도 자신들과는 연결할 수 없는 것으로 치밀하게 준비했던 것이다.

“저의 이 몸이 증거입니다.”

“너의 안타까운 사정은 알겠다. 허나 그것이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네 말이 정녕 진실이라면 다른 증거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라.”

“그리하겠습니다!”

일이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지엄하신 왕이 저의 말을 믿어 주신 것이다. 감읍한 임봉곤은 혼자서는 다시 일어나지도 못할 대전의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엎드려 인사했다.

“태사, 그대는 정녕 결백함을 주장하는가?”

“주장이 아니라 사실이옵니다. 저는 하늘을 우러러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발언권이 허락되면 바로 길길이 날뛰며 길게 제 억울함을 호소할 것 같았던 최사립은 그것으로 말을 마쳤다.

그는 이것으로 사태가 끝났다는 것을 확신했다. 김승언을 비롯한 윤채운 등이 조사랍시고 움직이는 동안엔 조금 숙이고 있어야 했지만 더 찾는다 해도 결코 그를 묶을 수 있는 증거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임봉곤을 물러나게 하라!”

왕의 명으로 임봉곤이 물러나는 모습을 보며 한쪽은 웃고 한쪽은 찡그렸다.

김승언 등은 임봉곤이라는 결정적인 증인에 최사립을 성토하고 그를 실각시킬 것을 기대했지만 역시 최사립은 입심만으로도 그것을 유유히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사실 증인 하나만으로 최사립에게 반역의 죄를 씌우고 실각시킨다는 것은 무리였다.

허나 임봉곤이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의심을 받아 오긴 했지만 설마 하던 중립파들에게까지 의혹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또한 의혹을 종식시킬 명분 때문에라도 공개적으로 왕의 감시와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들의 활동과 음모가 위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임봉곤이 나가고도 국정은 계속되었다.

황망한 것은 역모의 의심을 받는 최사립이 국정을 이끌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수왕이 등극하고도 바꿀 수 없는 대세였다. 때문에 그렇게 중대한 죄의 의심을 받고도 최사립이 그토록 뻔뻔하고 기세등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이제는 거의 일방적으로 법을 좌지우지하던 최사립의 힘이 꺾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가 말하는 것은 친왕파의 대표인 김승언과 혹은 중립파 대신들의 반대에 계속 부딪히곤 했다. 비록 최사립을 무너뜨리지 못했지만 그의 기세를 꺾은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국정을 파하려는 순간, 최사립의 사남인 최필경이 나서며 새로운 주제를 냈다.

“소신 최필경, 아뢰올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시오.”

최필경은 자리에서 한발 나서 장황한 설명을 시작했다.

“소신의 처에게는 매우 똑똑한 조카가 있습니다. 헌데 그 조카는 열 아들 부럽지 않을 만큼 똑똑하긴 하나 안타깝게도 딸아이입니다…….”

그가 하는 말은 조카가 단지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남동생들에게도 차별받고, 그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해서 여인들에게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조금이나마 내주자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인네들을 밖으로 마구 내돌릴 수는 없소!”

“그렇소, 말도 안 되오!”

“그건 저도 반대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처음엔 친왕파와 중립파에서 반대의 의견이 나왔지만 나중엔 최사립의 일파에서도 반대를 했다. 국정의 주제가 되기엔 실로 황당한 주제였던 것이다.

어찌 됐든 발언의 내용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기도 했다. 헌데 제 가문이 반역에 얽히느냐 마느냐 하는 마당에 내놓은 안건이라 보기엔 너무나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허나 최필경의 발언은 수왕과 채운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최필경의 처에게 실제로 그런 조카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이 말을 한 의도가 더 문제였던 것이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수왕의 진영에 있는 한재영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허면 그의 오늘 발언이 설마 정말 그녀를 국정에 등용시키자고 한 말이겠는가. 당신들 뒤에 있는 군사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니 그녀를 노릴 수도 있음이다, 경고함이었다.

최필경은 의견만 내고서 그것에 대해 갑론을박으로 난장판이 된 대전을 재밌게 보고 있었다. 수왕은 그런 그를 매섭게 노려봤지만 그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발언을 위해 나섰던 자리에서 물러나 되돌아갈 뿐이었다.

수왕은 그날부로 재영의 호위를 늘리고, 그녀의 신변에 대한 경계를 강화했다.

그래서 그들이 진정으로 노리는 수를 놓치고 말았다.

이 표면적인 제안은 파격적이고 신선하며, 한편으론 우월의식을 갖고 있는 남자들의 공분을 살 만한 내용이었다. 취지가 어떻든 사람들의 입을 타고 널리 떠돌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그날의 논의를 마친 대신들은 그것이 임봉곤의 일을 가리려는 수작이었다고도 했고, 수작이라고 하기엔 황당하기 그지없는 내용이라 실제로 그런 일을 추진하려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해서 최필경이 터뜨린 소란은 조용히 사람들의 입으로 전파되었다.

* * *

강희는 어제와 달라진 오늘을 맞고 있었다.

그동안 재영을 어찌 대해야 할지, 그리고 그녀를 집으로 맞아야 할지, 자신이 그걸 감수할 수 있을지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그런 고민을 하룻밤 새 날려 버린 것이다.

채운의 분명한 선언을 들은 그녀는 궁에 떠도는 소문을 믿었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운명인 양 그가 목숨을 위협하는 약 때문에 그녀와 일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고 단정 짓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괜한 의심이었다.

게다가 그는 그녀가 감히 내색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을 먼저 알고 모든 오해를 풀어 주었다. 그뿐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선물을 주었다.

윤채운이라는 그 사람 자체를.

마음 한 자락을 받긴커녕 그가 증오를 품고 살지 않게 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 최선이라 여겼었다. 이 얼마나 과하고 가당찮은 선물인지 겁이 날 정도였다.

이제 강희는 세상의 어떤 여인도 부럽지 않았다. 감히 비긴다면 나라 안에 최고의 지위를 가진 왕비 전하도 부럽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가진 이상 이 지루하고 답답한 궁에 있는 것도 더 이상 두렵거나 힘들지 않을 것 같았다.

처음 그의 사랑을 확인할 때도 그랬지만 다시 한 번 세상이 달라진 것 같은 기분에 강희가 감격에 겨워 하고 있을 때, 그녀를 방문한 이가 있었다.

“성 부인, 재영 아가씨가 오셨습니다.”

재영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자마자 그녀가 찾아오다니, 참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태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평온해진 것이다.

강희는 이제 그녀를 편히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들라 하세요.”

막상 재영이 들어오자 강희는 잠시 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래도 곧 편안해졌다.

한 번도 대놓고 그녀와 경쟁한 것은 아니지만 여태 마음속으로는 계속 그녀에게 치열하게 질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되니 재영을 보아도 마음이 여유로워진 것이다.

“몸은 어떠신지요. 궁에 계속 머무시려니 답답하시지요?”

안부 인사와 별것 아닌 일상의 말이 이어지며, 강희는 그녀가 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재영이 일부러 강희를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면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말은 않았지만 만운의 하소연, 혹은 부탁 때문에 일부러 찾아온 것일 게다. 재영은 강희를 보살피고 말동무가 되어 주러 온 것이었다.

재영은 그녀의 숨은 직위로 봐선 겨우 이런 일이나 할 사람이 아니었지만 만운은 제 형수를 맡길 만한 사람으로 그녀가 적임자라 생각한 것 같았다. 그래서 재영이 가끔 처소로 찾아오고 있었던 것인데, 때문에 강희는 마음이 더욱 불편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그 마음을 완전히 털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바쁘신 분을 이렇게 걸음 하시게 하다니, 또 도련님께서 조르셨군요.”

“아닙니다. 제가 차를 한잔 얻어 마시러 온 것일 뿐입니다.”

“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오늘 드시는 이 차가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저의 아버지가 이번에 구마도……. 아니, 이름이 해미도라 바뀌었죠? 해미도에서 재배되는 차를 가져오신 것입니다.”

“아, 이것이 바로 그!”

재영과 강희는 차를 홀짝이며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올 때마다 바늘방석 같던 강희는 항상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응수하곤 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요즘은 날씨가 좋은데 계속 이럴 수 있을지 걱정이군요. 아버지는 지난번에 해미도에 가셨을 때 태풍에 발이 묶였다가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농사를 짓는 소작인들이 이때 다가오는 태풍을 가장 걱정하더라고요.”

“네, 이번 여름에 유독 태풍이 많이 지나가서 작황이 걱정될 겁니다. 그러나 다행히 올해의 태풍은 끝난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어머, 정말 다행이에요.”

일상적인 것 같지만 일상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는 두 여인의 사이는 꽤나 친근해 보였다. 허나 담소를 마치고 문을 나온 재영의 얼굴은 퍽이나 어두워 보였다.

재영도 강희가 궁의 소문을 들어 알고 있으며, 그것을 의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허나 오늘은 아니었다. 그사이에 그와 부인이 오해를 풀었던 것 같았다. 활짝 밝아진 강희는 더 이상 자신을 의식하지도 경계하지도 않고 있었다.

재영은 강희가 있는 곳을 뒤돌아보고는 중얼거렸다.

“정말 다…… 끝났구나.”

쓸쓸한 그녀의 말을 들어 주는 것은 나무 위에 앉은 참새 한 마리뿐이었다.

* * *

임봉곤의 증언에 따라 최사립 측은 창고와 상단의 감사를 받아야 했다. 짐들은 다 풀려 속이 드러났고, 장부들은 하나하나 대조하여 조사했다.

허나 그들에게 화약이 있었던 흔적 같은 것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고, 그에 따른 장부도 찾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조사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최사립은 수왕과 윤채운의 수하들이 자신의 영역을 점령한 모습을 보아야 했다. 그것이 임봉곤이 목숨 걸고 대전에서 증언한 것으로 얻은 결과였다.

헌데 역시 최필경이 대전에서 했던 말은 크나큰 노림수가 있었다.

여인들이 어쩌고 어째?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들이 원한 건 단지 이 일이 대전에서 언급되어 논의됐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 자체가 널리 퍼져야 할 일이었다.

그 황당한 발언으로 그들이 노리는 이는 한재영이 아니었다. 바로 그녀의 오라비인 한만식이었던 것이다.

* * *

“크어억!”

청왕을 향해 날린 화살이 꽂히며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화살은 목표한 이의 몸에 꽂히지 못했다. 제 몸으로 청왕의 몸을 덮은 내관이 그 화살을 대신 맞은 것이다. 그리고 멀리 담장 위에 있던 암살자의 주위로 갑자기 사람들이 들이닥치며, 그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아차 하는 사이에 암살자는 활을 빼앗기고 포박되었다.

만운의 손에 잡힌 암살자는 그 자리에서 저항을 포기한 채 순순히 잡혔다. 최사립의 암살자들과 비교해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한만식, 난 자네가 정말 그러진 않을 거라고 믿고 싶었네.”

만운보다 조금 늦게 들어선 채운이 무릎 꿇려진 한만식을 향해 안타까운 목소리로 탄식했다.

채운이나 만운, 모두 이 자리에 있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헌데 왕의 곁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이 일을 알고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여기에 모여 있는 것이다.

“미리 알고 계셨던 것입니까?”

한만식의 목소리는 이미 모든 걸 체념한 듯 씁쓸했다.

“왜인가? 왜 그랬는가?”

“죽여 주십시오, 대감.”

“이건 자네만의 문제가 아니네. 저들은 자네의 배신에 나를 엮어 함께 침몰시키려 할 것이네. 나는 현재 전하의 안위를 책임지는 총대장이야. 총대장이 이런 구설수에 오르면 전하의 입지를 무너뜨리게 되네.”

“어흑.”

횃불에 비친 한만식은 통한의 표정으로 무너졌다. 그는 차마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자네가 내 수하이기에 자네의 가족들, 어머니와 누이인 한 서기는 어찌하겠는가!”

“그래서, 바로 그래서!”

“뭐?”

한만식의 말은 바로 그들을 해하고자 이런 일을 벌였단 말로 들렸다.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를? 왜?

왕과 상관의 일엔 침통해 하다가 가족의 이야기에 갑자기 분노하는 그는 확실히 비이성적으로 보였다.

“자네, 도대체 무슨 말을……. 아니 왜?”

“죽여 주십시오!”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한만식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그동안 미움에 사로잡혀 옆을 둘러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잡고도 질책하기보다 안타까워하는 윤채운의 목소리를 듣자 저를 갉아먹고 있던 미움에서 벗어나 제대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무슨 짓을! 이 내가 무슨 짓을!’

눈이 뒤집혔던 한만식은 이제야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거의 돌아 버린 그의 정신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열등감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들어오신 새어머니, 그리고 곧 태어난 여동생. 어머니의 존재도 그랬고, 예쁘고 잘난 여동생은 그의 심장에 박힌 가시였다. 문일지십聞一知十 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뛰어난 여동생은 아버지의 자랑이었다.

뛰어난 동생에 대한 자격지심이 불타는 질시로 바뀐 게 언제부터였는지 모른다.

헌데 여아라는 이유로 갇혀 있어야 할 아이가 전장에서 군사로 날뛰고, 이젠 그것도 모자라 정식으로 국정에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는 소식에 그는 한마디로 미쳐 버렸다.

맹목적인 미움이 점점 커지며, 그것이 그의 정신마저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윤채운이 없는 동안 한재영의 활동은 더욱 가시화되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게 한만식을 점점 궁지로 몰아갔고, 미움이 그 속에서 극대화되었다. 맹목적인 미움은 열등감으로, 자격지심으로 끊임없이 파생되며, 급기야 적대적인 질투심으로 그를 더욱 몰아댄 것이다.

그러던 차 그 유혹이 있었고, 바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자신의 혈육에 대한 비틀린 증오가 이런 비극을 만든 것이다.

한만식이 제가 한 짓이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그가 선왕을 죽이기 위해 쏜 화살은 이미 날아간 후였다. 다행히 그것은 청왕의 몸에 맞지는 않은 것 같지만 자신이 한 짓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자네를 이런 식으로 잃고 싶지 않아. 부탁이니 살아 주게.”

“제가 이런 짓을 하고도 어찌 살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도 난 자네가 살길 바라네.”

채운은 아끼는 수하의 배반에 분노하기보다 정말 비통해 하고 있었다.

또한 그가 말했듯이 한만식의 배반은 그들 측에서도 크게 명예가 실추되고 위상이 떨어지는 크나큰 실책이었다. 이것이 누구의 수작에 의한 것인가는 충분히 짐작 가는 것이었지만 이 일이 밖으로 알려지는 것은 막아야 했다.

최사립 측은 원정 당시부터 채운 쪽에 들인 새 군사를 알아내기 위해 기를 썼다.

영원한 비밀은 없는 것이다. 재영이 계속 궁에 머물게 되면서 최사립 측에서도 결국 그녀의 정체를 알아내고야 말았다.

한재영은 실로 뛰어난 천재였다. 전쟁에 군사로 쓰일 정도로 엄청난 지략과 지혜를 가진 천재일 뿐 아니라 기상을 예측하는 능력은 천문관 몇을 모아 놓은 것보다 빼어났다. 그녀는 단순히 머리가 좋은 정도가 아닌 신성으로 떠오를 만큼 놀라운 재원이었던 것이다. 단지 여인이라 실무에 참석할 자격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헌데 왕세자는 그녀의 재주를 알아보고 군사로서 활용할 만큼 파격적인 대우를 해 주었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 후에도 아직 궁에 남아 있는 그녀를 보면 앞으로도 그녀를 계속 대우해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때문에 최사립 측에서 그녀를 회유하거나 포섭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그녀를 공략할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다. 일단 그녀를 목표로 하자 공략 방법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처음엔 채운과 연계된 소문을 이용하려 했지만 채운과 그의 부인이 둘 다 나라 안에 없었기 때문에 크게 쓸모가 없었다. 헌데 그녀의 가족을 파헤치며 그보다 더욱 좋은 패를 발견해 낼 수가 있었다. 아니, 좋은 정도가 아니라 제대로만 쓴다면 왕세자를 꺾어 내릴 명분까지 얻게 될 최상의 수였다.

한재영의 오라비 한만식은 윤채운의 직속 수하로서 공을 세우고 승직한 개선장군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은 내용은 충분한 공략거리가 되어 주었다.

그의 사정을 조사하고 이용할 거리를 찾는 것은 그들에게 일도 아니었다. 다만 그가 폭발할 계기를 주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최필경이 국정에서 떠든 이유였다.

“제가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제가 한 짓은 덮을 수도 없지만 덮으려 해도 내관이 죽었습니다. 이미 다 끝났습니다.”

“선왕께서는 이곳에 아니 계신다. 네가 이곳으로 향한다고 했을 때 이미 피신하셨지.”

“네?”

“그리고 내관도 죽지 않았다. 계영, 죽은 시늉 그만하고 이리 와!”

“네!”

대답과 동시에 담장 안쪽에서 누군가 뛰어왔다.

그런데 뛰어오는 이는 방금 화살을 맞은 내관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멀쩡하게 뛰어오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내관이 감싸 안았던 사람도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계영, 미탁…….”

특별 임무로 경호, 경계에서 빠져 어디론가 갔다는 두 무장이 바로 이곳에서 각자 왕의 옷과 내관의 옷을 걸치고 나타났다.

그들이 나타난 걸 본 순간, 한만식은 머리를 바닥에 대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죽여, 죽여 주십시오. 죽여 주십시오!”

그를 포위한 이들이 모두 그를 쓸쓸히 지켜보고 있었다.

한만식의 일은 시도 자체가 실패였던 터라 외부로 알려지지 않을 수 있었다. 허나 그의 기이한 행동의 원인인 재영에게는 알려야 했다.

“오라버니……. 정말 오라버니가!”

“차라리 그의 승직을 다른 무장들과 같이 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오.”

그가 일을 벌인 원인을 알게 된 채운이 자신을 자책했다.

“모두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군요. 제가 오라버니를 망친 것입니다.”

망연자실한 재영은 힘을 잃고 주저앉아 눈물만 흘렸다.

오라버니가 자신을 싫어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깊은 감정일 줄은 몰랐다. 결코 다가서려 하지 않는 오라버니와 가까워질 방법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저가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노력을 하지 않았다.

“오라버니를 만날 수 있습니까?”

“지금은 만나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소. 한 중랑장이 원하지 않소.”

한만식은 죄도 죄지만 자결의 위험 때문에 모처에 감금된 상태였다. 그리고 비록 그를 치죄하지 않는다 해도 다시 왕의 곁에서 일할 수는 없게 될 것이다.

한만식의 암살 행위는 성공도 문제지만 실패로 잡혔다 해도 심각한 일이었다. 허나 사전에 그를 차단할 수 있었기에 저들은 이 사실을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일을 처리하자 벌써 밤이 깊어 새벽을 향해 가고 있었다.

‘강희는 아직도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을까?’

아마 졸더라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강희가 보고 싶었다.

만식을 막을 수 있게 해 준 이도 바로 강희였다. 채운은 만운에게 뒤를 맡기고 강희에게로 발길을 돌렸다.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소?”

“서방님!”

과연 강희는 채운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채운이 들어오자 벌떡 일어나며 달려들며 품에 안기기까지 했다.

“이런, 많이 기다렸소?”

“조금…… 걱정했습니다.”

이보다 늦게 들어오는 날도 있었지만 강희는 오늘 유독 불안한 마음으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보이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에게 뛰어든 것이다.

“그저 다른 날보다 경계할 범위가 넓어져서 좀 늦은 것이오. 그보다 좋군. 당신이 나를 이리 반겨 주다니 말이오.”

“아!”

조금 부끄러워진 강희가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채운이 더 빨랐다. 재빨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 그는 강희를 안고서 침상에 누웠다.

“궁이 답답하고 힘들 테지만 조금만 더 참으시오. 전하께서 인근에 저택을 새로 하사하셨소.”

“네, 오늘 왕비 전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성은이 망극합니다.”

“그렇소. 돌아오면 집에 새 그네를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아직도 지키지 못했군. 미안하오. 하지만 새집에 들어가면 내 꼭 약속을 지키리다.”

“조급하지 않습니다. 서방님은 국사에 바쁘신 분 아닙니까. 아이가 태어나서 만들어도 되는 것이고요. 저는 그런 일로 떼를 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건 떼를 써도 되오. 사실…… 그건 내가 더 갖고 싶소.”

떼라니. 떼를 쓸 일이 아닌 건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반역의 기를 세울 최사립이 눈앞에서 칼을 갈고 있는데, 한가롭게 그네 타령을 할 수가 있겠는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추억은 남아 있었다.

그곳 의방의 나무에 매어 놓은 그네가 생각난 강희는 살짝 웃었다. 그 그네에 함께 앉아 만들었던 추억들과 그가 준 사랑의 기억들.

추억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채운은 그녀에게 그 좋은 기억들을 더 많이 늘려 주고 싶었다.

“그런데 새집에 이사를 하면 또 당신이 일을 찾아서 할 것 같아 걱정이오. 집을 꾸미는 일에 너무 열중하지는 마시오. 지금 당신 몸을 생각해서 무리하지 않기를 바라오.”

“염려 마십시오. 저는 우리 아기에게 해로운 일은 일체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강희는 자랑하듯 제가 얼마나 편하게 있으며, 산책과 좋은 음악을 듣는 것, 좋은 글귀를 계속 아기에게 들려주고 있다는 것 등 태교에 힘쓰는 저의 일상을 이야기했다.

그것을 들으며, 이토록 늦게까지 기다리면 되겠느냐 한 마디쯤은 해야 했지만 채운은 그만두었다. 그녀에게는 자신을 기다리는 것 또한 기쁨이며, 즐거움이라는 것을 그는 헤아리고 있었다.

“어디 봅시다. 오늘은 녀석이 얼마나 컸는지.”

불쑥 옷을 헤치고 배에 손을 얹은 채운에게 강희는 조금 망설이며 물었다.

“서방님은 이 아이가 아들이었으면 하십니까? 아니면 딸이었으면 하십니까?”

“음?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나는 아들이든 딸이든 건강하게만 나와 주면 좋겠소. 그럼 당신은 어떻소? 무엇이길 바라오?”

그가 되묻는 질문엔 행복한 기대만이 있었다.

그녀가 배 속의 아이가 아들이 아닌 딸이길 바랐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 불행한 아이가 다시 그 고통을 겪지 않기를 바라서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이 순간, 다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실 저는 처음에 딸이었으면 했는데……. 이젠 저도 아이가 건강하게만 나와 주면 좋습니다. 서방님을 많이 닮았으면 좋겠고요.”

“하하, 난 당신을 많이 닮았으면 좋겠소.”

“전 그래도 서방님을 많이 닮았으면 합니다.”

강희는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대로 잠든 것이다.

채운은 그녀의 베개를 더 편안하게 바로잡아 주고, 자신도 강희의 옆에 누웠다.

오늘의 일은 강희가 알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더 많은 사랑을 받고, 기쁜 일을 더 많이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녀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싫었기 때문에 강희에게 속으로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이것으로 그녀의 꿈과 관련된 일은 모두 끝났다.

앞으로는 새로운 미래만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좋은 꿈꾸시오.”

창밖에는 바람이 스산해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침실은 따끈했다. 그리고 그 밤이 지나면서 채운은 송국에서 기다리던 소식을 받을 수 있었다.

* * *

날은 다시 지나고, 또 새로운 달이 막 시작했다.

최사립과 그 일파는 여전히 기세등등했으며, 국정에서 다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최사립은 아들 필선과 필경을 대동한 채 대전의 상석에서 회의를 이끄는 주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증거를 찾는다고 들쑤시고 다녔지만 자, 보시오. 아무것도 없지 않소. 결국 이 모든 것이 모함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소. 그 임봉곤이란 자를 다시 데려오시오. 이젠 그자의 뒤를 캐어 감히 태사와 태사의 집안을 모함하려는 그를 치도곤해야 할 것이오!”

최사립의 무죄를 역설하는 자가 대전 앞에서 크게 웅변했다. 최사립의 일파는 그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죄를 주장하던 김승언 등은 분노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죄는 명백하지만 당장 반박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최사립 말고 누가 꾸미겠는가.

최사립의 주장대로라면 전쟁에 진 배상금만으로 기가 질린 왜가 벌인 일이라는데,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오히려 저토록 큰소리를 내고 있으니, 기가 질릴 따름이었다.

“증거를 찾았소!”

그때였다. 여태 왕의 앞을 지키며 방패처럼 굳건히 서 있던 채운이 처음으로 국정에서 말을 한 것이다. 소란스럽던 대전은 그의 한마디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뭣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먼저 소리친 이는 최필경이었다.

그와 동시에 최사립의 일파가 소리 높여 채운이 없는 증거를 조작해서 만들어 낸 것이라며 그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쾅!

수왕이 어전의 탁자를 내리쳤다.

“그 입들 다물라! 이곳이 시장 바닥인가? 그 증거가 조작된 것인지 진실인지 보아야 알 것 아닌가. 그대들은 평장사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렇소. 증거를 봅시다.”

“맞소. 증거를 찾았다니, 이는 역모를 증명하는 것이오!”

왕의 말에 김승언 측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허나 최사립은 그들의 말이 들리지도 않았다. 수왕의 자신 있는 어조에 불길한 느낌이 든 것이다.

한만식을 이용한 것은 어느 쪽으로든 유리한 계책이었다. 그가 청왕의 암살에 성공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경우였지만 혹 실패해도 그는 결코 무사히 도망칠 수 없었다. 그가 언제 일을 벌이더라도 마지막에는 그를 붙잡을 수 있게 미행을 붙여 두었던 것이다.

허나 일을 실행한다고 생각한 당일 이후 다시는 그를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일이 무산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불길함은 그때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그 일로 무언가 눈치챈 수왕의 반격이 있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앉아서 당할 수는 없었다. 해적선의 일은 충분한 구실이 되어 줄 것이다. 지금 일파들이 소리치는 것처럼 증거를 만들어 내서라도 자신들을 몰아내려 할지도 모른다.

이젠 은밀함을 벗어던지고 힘과 힘으로 맞붙는 수밖에 없었다.

상단을 조사할 때, 옮겨 둔 병사들이 궁의 곳곳에 숨어 있었다. 효시 하나면 밀고 들어올 병력이 곳곳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반정의 날은 오늘내일 한 치 앞으로 다가온 일이다. 헌데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당장 대전만 장악하면 된다.

최사립은 필민에게 은밀한 신호를 보냈다.

그 순간 왕이 누군가를 직접 불렀다.

“반역에 대한 증거는 양광포까지 나타나 산화한 해적선에 관한 것만은 아니오. 여봐라, 증인을 불러라!”

갑자기 왕이 부른 사람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대전의 문을 바라보았다.

“소장, 전하의 부름을 받고 대령하였나이다!”

그가 누구인지 알아본 사람들이 크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저자는 윤 평장사의 수하가 아닌가?”

“증거를 찾은 게 아니라 본인이 증인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영문을 모르는 대신들은 수군거렸고, 최사립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는 감히 선왕이신 아바마마를 해하려는 증거를 갖고 있소. 그 일을 도모한 자가 바로 이 자리에 있소.”

수왕은 그 말을 하면서 최사립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기에 다들 누구를 지목함인지 알 수 있었다.

한만식도 당시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지만 단순히 이용만 당하는 이는 아니었다. 감히 선왕을 시해하라니, 자신이 파멸하는 일이라는 것은 알았기에 만의 하나를 생각해 그 일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항상 복면을 쓰고 자신을 찾는 이가 최필민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마지막에 그가 일의 성사에 대해 약조한 것을 자필로서 남겨 달라 요구했다. 그걸 남겨 주지 않으면 결코 일을 치를 수 없다고 뻗댄 것이다.

해서 한만식은 현재 최필민이 암살을 사주했다는 친서를 갖고 있었다. 그가 반역의 물증으로 가져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최필민은 나중에 한만식을 잡아 그것을 회수하려 했겠지만 그를 다시 찾을 수 없어 입을 닫고 있었다. 그의 실책이 오늘 이렇게 다시 드러난 것이었다.

만일 아버지에게 실토를 했다면 대책이라도 세웠으련만, 최사립은 한만식이 내민 증거를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정할 최사립이 아니다.

“전하, 저를 이리 모함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최사립이 얼굴이 붉어진 채 기를 쓰는 사이, 그의 아들 최필경이 대전을 빠져나갔다. 어수선한 틈을 타서 나가는 그를 발견하고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모함일지 보면 알 것이오. 평장사, 증거를 더 보이시오.”

“네, 전하.”

드디어 채운이 가져온 내용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최사립 대감이 송국에서 가져온 화약의 양과 유통 경로를 적은 문서요. 그리고 그것을 대량으로 폭파할 수 있도록 개조하는 데 동원된 기술자를 잡았소.”

“뭐요?”

채운은 한만식의 사건이 있은 다음 날 누엔의 남편인 수보에게서 드디어 기다리던 소식을 받을 수 있었다. 몇 달이 지난 새 완전히 가문을 장악한 차수보가 채운의 부탁을 잊지 않고 애를 써서 알아낸 것이다.

수보는 송국 상단에게서 최사립과의 거래 내역까지 필사해 보내 주었다. 그것은 그가 가진 힘이 얼마나 막강해졌는지도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채운은 그것을 토대로 모든 경로를 추적하여 증인들을 확보했다. 한만식의 뒤로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떤 이는 손이 묶인 채로, 그리고 어떤 이는 벌벌 떨면서 대전에 들어서며 곧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아뿔싸, 늦은 것인가?’

잠시 후면 필경의 신호를 듣고 사병들을 대기시킨 필민이 달려올 테지만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무엇보다 증인들을 데리고 온 자들의 신분이 범상치 않았다. 그들 모두 수왕의 직속인 용호군에 속해 있는 자들로서 장군급인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혼자 움직일 리가 없었다. 대전에 들어선 장수들의 수만 세어도 함께 따라온 병사들의 수가 가늠이 되고 있었다.

“네가 한 일을 말해 보거라!”

가장 먼저 무릎 꿇려진 화약 기술자가 증언을 시작했다. 그리고 해적선에 화약을 실은 자들의 증언이 이어졌고, 그 해적선을 몰고 가는 이들의 식사를 책임졌던 여인의 증언도 있었다.

최사립을 바라보는 대신들의 눈길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아니오, 아니오! 이건 왕이 나를 견제하여 만든 수작이오. 모두 모함이요!”

끝까지 소리치는 최사립을 내려다보는 수왕의 얼굴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저자를 포박하라!”

왕의 명을 받은 채운이 최사립을 포박하기 위해 다가섰다.

그러나 필선이 최사립의 앞을 가로막으며 칼을 뽑아 들었다.

대전에 칼을 들고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왕의 허락을 받은 자뿐이었다. 현재 그 허락을 받은 이들은 증인들을 데려온 무장들과 왕의 경호 대장인 윤채운뿐이었다.

헌데 관복 속에 칼을 숨기고 있던 최필선이 칼을 뽑아 든 것이다.

“감히 대전에 칼을 들고 들어오다니!”

“역시 반역자들이었어!”

대신들 쪽에서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바깥에서도 소란이 일었다.

최사립이 준비한 반란군의 힘은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필경이 쏘아 올린 효시가 울리자마자 대전의 뜰을 질러 이곳까지 쳐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대전의 문을 부수고 들어온 반란군의 앞에서 최필민이 피 묻은 칼을 든 채 흉흉한 기세를 뿜어대고 있었다.

허나 그들을 보는 수왕의 얼굴엔 여유가 있었다.

“솜씨가 좋군.”

“예상했던 일 아닙니까. 허나 피를 봤으니 용서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서 이곳을 제압하고, 저도 나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어서 가시지요.”

뜰에서 들리는 칼부림 소리가 대전 안까지 들리고 있었다.

“어허, 내가 있으면 방해가 된다는 말이로군. 용상에 오르니 그대도 참 재미없어졌어.”

원래 그랬다.

“그만 자리를 옮기시지요.”

한목소리로 말하는 채운을 보며 수왕은 최사립 쪽을 일별하고는 자리를 피했다. 그 와중에 용호군의 무장들과 필선, 필민이 대립하며, 대신들은 각자의 편 뒤로 몸을 피하고 있었다.

“아버님, 어서 이쪽으로 오십시오.”

“어서요.”

최사립이 대치의 틈을 타 도주하고 있었다.

대전 안에 들어온 무장은 겨우 네 명뿐이라 다른 대신들의 안위를 위해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최사립은 그대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한만식이 최사립을 덮치며, 필민과의 사이를 막아섰다. 필민은 덤벼드는 한만식에게 칼을 내질러 정확히 그의 목을 찔렀다.

그러나 한만식이 최사립을 덮친 것이 먼저였다.

그 찰나의 순간 그는 벌써 최사립의 목을 꺾은 후였다. 한만식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며 최사립의 목숨도 가져간 것이다.

“아버님!”

최필민의 통한의 비명이 하늘을 갈랐다.

허나 최사립은 이미 시신으로 변한 다음이었다.

“이, 이!”

필민은 감히 저의 태산이었던 아버지를 죽인 한만식의 목이라도 베려 칼을 치켜들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윤채운이 되돌아올 겁니다. 어서 서두르십시오!”

기습으로 틈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잠시뿐, 지금 이곳으로 병사들이 새까맣게 몰리고 있었다. 이미 반역이 밝혀진 이상 다시 가문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허나 가흔 왕자를 모시고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달아나야만 했다.

려국 최고의 권력을 가진 가문의 반란이었지만 허를 찔리며, 최사립이 죽은 탓에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날의 일은 최사립을 포함한 백여 명의 사상자가 생기며 막을 내렸다. 죽은 이 중 최사립을 죽이며 장렬히 산화한 한만식에 대한 일은 백성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최사립의 다른 아들들은 윤채운과 그의 휘하 용호군의 추격에 대부분 척살되거나 잡혔다. 무사히 도망간 것은 필민과 필선 둘 뿐으로, 그들은 가흔과 함께 려국을 빠져나갔다. 나중에 최사립의 나머지 직계로 잡힌 이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이십여 년간 권력을 쥐고 흔든 가문의 몰락인 것이다.

그리고 려국에서 가흔 왕자의 모습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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